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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18 속회지도자 자료 2025-05-14 신내교회 250518 속회지도자 자료.pdf 5월 셋째 주 그룹큐티나눔 스스로 입은 베옷 에스더 4:1-17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내 맘이 낙심되며(찬송 300장, 구 406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왕의 총애를 받는 하만은 모르드개뿐 아니라 온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유다인을 죽이려 합니다. 왕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하만은 왕의 이름으로 아달월 십삼일에 모든 유다인을 죽이라는 조서를 작성합니다(3:10-14). 사비를 들여서라도 이 일을 꼭 이루려 합니다(3:9). 그가 작성한 조서 내용이 유다인들에게 알려지자, 모두 근심에 싸입니다(3:15).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모르드개가 굵은 베옷을 입고 대궐 문 앞에 있다는 소식을 왕비 에스더가 듣습니다(1-9절). 1)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도착하자, 유다인들은 어떤 행동을 합니까(3절)?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했다. 하만은 모르드개에 대한 앙심으로 모든 유대인을 학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왕이 승인했고, 그 계획이 담긴 조서가 페르시아의 각 지방까지 도달했다. 유대인을 죽이려는 날이 아직 많이 남았음에도 조서의 내용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날을 위하여 준비하게 하라’(3:14)는 요청은 분명 유다인을 학살하려는 사람들에게 한 말이지만, 유다인도 그날을 위하여 준비한다. 각 지방에 있는 유다인들은 자신들에게 예정된 이 엄청난 폭력에 크게 애통하기 시작했다. 유다인의 문화에서 애통은 금식과 굵은 베 옷 입기 그리고 재를 머리에 뿌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모르드개도 동일하게 애통하기 시작했다. 단지 그가 궁궐 문 앞에서 애통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2)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알려준 것은 무엇입니까(7, 8절)? 모르드개가 당한 일,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기 위해서 왕의 금고에 바치기로 한 은의 정확한 액수,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 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 모르드개가 궁궐 문 앞에서 애통한다는 소문은 곧 왕비 에스더에게까지 전해졌다. 애통을 상징하는 베옷을 입고는 궁궐에 들어갈 수 없었다. 분명 모르드개는 왕실에서 일하는 관직을 받았던 것 같다(2:19). 그가 어떤 관직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베옷을 벗으면 궁궐 안으로 들어가서 왕에게 호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왜 애통한 것인지는 알지 못하나 그가 궁궐에 들어오는 것이 더 좋을 거로 생각하고 옷을 보내 모르드개가 복귀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제안을 거절하며 자신과 모든 지방의 유다인이 베옷을 입고 애통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모르드개에 대한 하만의 앙심은 이제 한 민족에 대한 혐오와 증오로 뒤바뀌었다. 한 민족을 학살하기 위해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혐오와 폭력을 조장해서 온 세상을 두려움으로 만든 하만의 무서운 광기를 알려준다. 과연 이런 광기를 누가 멈출 수 있을까? 이 광기를 승인해 준 왕이 자신의 명령을 쉽게 거두어들일 수 있을 것인가. 나눔 1 에스더는 유다인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모드르개와 유다인들이 베옷을 입고 애통하는 이유를 자세히 알지 못한 채, 옷을 보내어 달래려 했습니다. 타인의 위기와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적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모르드개는 에스더가 동족을 위하여 왕께 간구하기를 바랍니다(10-17절). 1) 에스더가 왕을 찾아가기를 두려워한 이유는 무엇입니까(11절)? 왕의 부름 없이 마음대로 찾아가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왕이 금규를 내밀면 살 수 있지만, 에스더는 이미 삼십 일 동안 왕의 부름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우리는 이미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왕후 와스디가 폐위되었음을 안다(1장). 이는 에스더도 아는 사실이다. 자신이 그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가 되었기 때문이다. 왕의 명령을 어기는 행동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에스더는 알고 있다.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왕을 찾아가는 것은 황실의 법에서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심지어 왕은 에스더를 찾지 않은 지 한 달이나 되었다. 에스더 입장에서 왕을 찾아갔을 때 왕이 자신을 반가워할지, 노여워할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2) 모르드개가 이때를 위한 하나님의 포석일 수 있다고 말한 사건은 무엇입니까(14절)?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 자신의 상황이 녹록지 않음을 토로하는 에스더에게 오히려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상황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라고 일깨운다. 전국의 수많은 처녀 중에서 왕후가 되는 것이 녹록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에스더가 왕후가 되었던 사건에 대한 의미를 찾아가는 순간이다. 3) 에스더는 무엇을 결단합니까(16절)? “이렇게(밤낮 삼 일)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모드르개의 따끔한 충고가 에스더를 움직였다. 에스더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관여하신 이유를 찾게 되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놓인 상황이 쉽지 않은 건 사실이다. 에스더는 도움을 요청한다. 자신을 위해 모든 이들이 함께 금식하며 기도해 달라 말한다. 일반적인 금식은 낮에만 시행되지만, 에스더는 밤과 낮을 포함한 삼 일을 금식하며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한다. 그만큼 이것이 중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인의 목숨뿐 아니라 모든 이들의 목숨이 함께 걸려 있는 문제기 때문이다. 나눔 2 에스더는 동족에게 비극이 닥칠 것을 안 후에도 왕에게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왕의 총애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칫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모르드개는 이 순간을 위해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리라 믿습니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를 알면서도 여러 염려 때문에 주저한 적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나눔 3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말대로 왕께 나아가기로 결단합니다.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라, 두려운 마음을 기도와 근신을 통해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지금 믿음으로 결단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서로 이야기하고, 두려운 마음을 떨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다른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긍휼과 인애의 마음을 품게 하소서. 공동체 _ 공동체의 문제를 책임자들에게만 돌리지 않고, 함께 고민하며 답을 찾는 데 동참하게 하소서. 250511 속회지도자 자료 2025-05-07 신내교회 250511 속회지도자 자료.pdf 5월 둘째 주 그룹큐티나눔 불의가 정의를 삼키더라도 시편 119:97-112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너 근심 걱정 말아라(찬송 382장, 구 432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희망도 전혀 보이지 않는 암흑과 같은 순간 말입니다. 시편 119편의 시인도 그런 때를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는 짙은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발견합니다. 그는 빛을 깨닫는 이 명철함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백합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명철을 얻었다고 고백합니다(97-104절). 1) 시인은 자신의 명철함이 누구보다 낫다고 여깁니까(99, 100절)? 시인의 모든 스승, 노인 시인이 살던 당시에는 스승이나 노인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시인은 지혜로운 사람보다 자신이 더 뛰어난 명철을 지녔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 말씀의 뛰어남을 보여주려는 시인의 의도가 있을 뿐 그가 오만방자한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명철이란 바른 행위와 악한 행위를 구분하는 것이다. 2) 시인이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게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101, 104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시인이 명철하게 되어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다 보니 악한 길로 가지 않게 되었다고 여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응당 악한 길로 향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수록 가지 말아야 할 길(삶의 행동들)이 더욱 분명해진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과 우상을 숭배하는 길을 구분하여 보여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은 이웃을 사랑하는 길,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향해 긍휼의 마음을 품는 길과 연결되지만, 우상을 숭배하는 길은 자신을 사랑하는 길,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폭행하는 길과 연결된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이며, 이 세상에서 정의가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 이해되었다. 이렇듯 내면화한 말씀은 나침반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어느 길이 하나님을 향한 길인지, 악한 길인지 알려준다. 나눔 1 시인은 하나님 말씀으로 인하여 명철해졌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명철은 성공하고 부유하게 되는 것과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모든 악한 길, 모든 거짓 행위를 싫어하고 거부할 수 있는 올곧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심어준 명철함은 무엇입니까? 2. 시인은 어두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이 길을 비추는 빛임을 노래합니다(105-112절). 1)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엇으로 비유합니까(105절)? 등, 빛 빛은 어둠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시인은 어두운 밤길에 등불을 켜서 길을 환하게 밝히고서야 길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두운 곳을 환히 비춰주는 빛, 등불에 비유한다. 2)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는 시인은 지금 어떤 상황 가운데 있습니까(107, 109절)? 고난, 위기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등불과 빛에 비유한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이 매우 심하다고 토로하고, 생명이 항상 위기 속에 있다고 여긴다. 물론 우리는 시인이 처한 고난과 위기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의 이야기로 읽어내기 쉽다. 시인이 가야 하는 길에는 악인들이 쳐놓은 올무가 있다. 그러나 그 올무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살얼음을 걷는 심정으로 한 발 한 발 내디딜 수밖에 없다. 자칫하면 올무에 걸릴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살아간다. 불의가 정의를 삼키는 세상 속을 살아가는 고통이 있다. 그래서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빛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발 앞을 비춰주는 등불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등불이 있어야 올무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3) 시인은 주의 증거들로 무엇을 삼습니까(111절)? ▶자신의 기업(유산) ‘증거’로 번역된 이 단어(히. 에두트)는 명령으로 내린 법(법령, 법률)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이 단어가 주로 사용된 것은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두 돌판(증거판), 그 돌판을 넣은 언약궤(증거궤) 그리고 그 언약궤가 놓인 성막(증거의 장막)이라는 표현들이다. 따라서 증거라는 말을 십계명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증거로서 십계명과 같은 법을 자신의 기업, 즉 유산으로 여기겠다고 다짐한다. 기업이라는 단어(히. 나할)는 소유를 분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주로 땅을 나눠주는 것과 연결되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겠다고 말한다. 불의가 정의를 삼키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다는 것은 고난과 위기를 자초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다르게 생각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때 비로소 고난과 위기가 더 멀어질 것이라고 여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쓸모없다고 여기는 이가 있다면 시인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어보자. 불의가 정의를 삼킨다면 지금 당장은 세상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나 정의 곧 빛 되신 말씀은 그 속에서 빛을 내 불의를 태워버릴 것이다. 나눔 2 시인은 하나님 말씀을 빛을 밝히는 등불로 비유합니다. 이 빛은 짙은 어둠 속에서도 무엇이 불의인지를 보여줍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준, 내게 빛과 같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나눔 3 시인은 악인들이 쳐놓은 덫 앞에 있습니다. 자칫하면 깊은 구렁 속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시인은 감춰진 구렁을 환하게 보여줄 말씀에 의존할 뿐입니다. 그것이 가장 현명한 자세입니다. 고난과 위기에서 나를 건져준 말씀은 무엇입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하나님 말씀으로 내가 걸어야 하는 길을 더 환하게, 더 분명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공동체 _ 절망의 구렁에 빠진 이들에게 말씀의 빛이 닿게 하옵소서. 250504 속회지도자 자료 2025-04-30 신내교회 250504 속회지도자 자료.pdf 5월 첫째 주 그룹큐티나눔 삶의 무게 중심을 말씀으로 시편 119:1-16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주님 가신 길을 따라(찬송 448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건물이 빼곡한 도시를 벗어나 탁 트인 들판을 걸으면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넓은 들판에도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조성된 길이 있지만, 가끔은 다듬어진 길을 벗어나는 일도 색다른 즐거움을 줍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시편 119편은 사람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이가 그 길로 걷지 않더라도 시인은 적어도 자신만은 그 길을 벗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의 복됨을 노래합니다(1-8절). 1) 시인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1- 3절)? 행위가 온전한 사람,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사람,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는 사람,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사람, 불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 주의 도를 행하는 사람 보편적으로 유대인은 율법에 근거하여 재물, 장수, 명예 등을 복으로 인식하는 경향성이 있다. <욥기>에 나오는 욥의 친구들은 이런 경향성을 대표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시편 119편의 시인은 다르다. 오히려 행위의 주체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행동하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으로 본다. 소위 ‘복을 받는다’는 개념보다는 율법의 주체인 그 사람이 ‘복되다’고 생각한다. 시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할 수 있는 ‘복’과 그 말씀을 살았을 때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다. 하나님의 길(도)을 잘 걷는 것, 그 자체가 복이라는 시인의 이야기는 일반적인 가치에서 본다면 분명 새롭다. 2) 시인은 누가 율례를 지키고 모든 계명에 주의하며, 의로운 판단을 배우길 원하고 있습니까(5-8절)? 시인 자신 시인은 스스로 복된 사람이 되고자 열망한다. 그러기 위해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준수해야 할 ‘말씀’(법도), 걸어가야 할 ‘길’을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말씀(계명)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고자 한다. 맹목적인 찬양이 아닌 올바른 지성으로 하나님을 칭송하고자 노력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한다면 응당 하나님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고 여긴다. 결국 말씀은 준수하지 못하므로 복된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시인에게 긍정적으로 변하여 동기부여가 된다. 나눔 1 시인은 자신이 ‘어떤 복’을 받을지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무엇을 해야 ‘복된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짜 복된 사람,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런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노래합니다(9-16절). 1) 시인은 무엇으로 사람의 행실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9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준수하다’라는 의미로서 ‘지키다’(히. 샤마르)라는 표현이 본문에서 여러 번 강조 되었다(4, 5, 8, 9절).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무엇으로부터 ‘보호하다’라는 의미로 ‘지키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보호하겠다’ 하면서 오히려 그 말씀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는 것이 곧,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시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결정이다. 2) 시인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다짐합니까(11절)?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마음에 두기로 다짐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었다고 말한다. 이때 ‘마음’(히. 레브)은 감각적이거나 감정적인 측면보다는 의지적이고, 이성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단어다. 따라서 시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둔다는 것은 말씀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의지적으로 결정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모든 물체는 무게 중심이 안정적일 때 넘어지지 않고 바르게 선다. 반면 사람은 무게 중심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순간순간 자세가 달라질 때마다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여기에 또 다른 무게 중심이 필요하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변화무쌍하다. 따라서 말씀에 비추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의지적으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무게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3) 시인은 하나님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무엇에 주의합니까(15절)? 주(하나님)의 길들 시인은 1-16절에서 ‘길’과 ‘걸음’이라는 유사한 이미지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사람이 다니는 용도로서의 ‘길’(3, 5, 14절)은 벗어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4절에서 복 있는 자가 ‘주의 도(길)를 행하는(걷는) 것’이 마땅하다고 노래하는 이유다. 5절에서 시인을 향해 하나님이 정해주신 ‘길’ 역시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이다. 14절에서 시인이 말하는 하나님의 증거(법률)들의 도(길) 역시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의미한다. 이처럼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 존재한다는 것과는 별개로 개인이 그 길을 바르게 걷고 있는지(발걸음)는 다른 문제다. 시인이 고민하는 것은 자신의 발걸음이 그 길에 일치하는지다. 9절에서 시인은 “무엇으로 행실(발걸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기로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시인은 15절에서 ‘주의 길들’, 즉 하나님이 먼저 밟으신 그 발걸음들을 주목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청하신 말씀(길)은 이전부터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신 일들(발걸음)에 기초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먼저 길을 만드시고 그 길을 걸어가신 하나님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의 발걸음에 맞춰서 그 길을 걸어야 한다. 나눔 2 무게 중심을 잘 잡으면 어떤 자세에서도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함으로 삶의 무게 중심을 잡으려 합니다. 지난 한 주간 삶의 무게 중심이 되어준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이야기해봅시다. 나눔 3 시인은 사람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하나님이 먼저 걸어가셨음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걸어야 하는 이 길 위에서 하나님의 발자국을 발견한 적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여 삶의 문제 앞에서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공동체 _ 말씀의 길을 걷는 모든 이와 함께 행하게 하소서. 250427 속회지도자 자료 2025-04-23 신내교회 250427 속회지도자 자료.pdf 4월 넷째 주 그룹큐티나눔 더디 믿는 자들이여 누가복음 24:13-35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찬송 95장, 구 82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마음이 극심하게 무너지면 인지력도 떨어지고 현실감각도 둔해집니다. 사실이 아닌 감정에 휘둘리거나,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아로 믿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그들은 큰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가오셔서 말을 거시는데도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디 믿는’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절망에서 벗어나 굳건한 믿음을 지닌 제자로 거듭나도록 인도하십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십니다(13-27절). 1)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16절)? 그들의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이다.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16절)는 구절과 ‘눈이 밝아져서 그를 알아보게 되었다’(31절)는 구절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 본문에서 문학적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즉, 24:13-35 본문의 큰 틀은, ‘눈이 가리어진 제자들이,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눈이 가리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시력이 좋지 않았다고 치부할 수 없다. 영적인 눈이 가려졌기에, 부활하신 주님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정작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말씀은 기억하지 않고 참담한 죽음의 현실만 묵상하느라 제자들은 예수님을 몰라봤다. 2) 두 제자는 예수님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줍니까(17 -27절)? ‘우리가 따르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예수가 살아났다는 소문이 떠돌지만 그를 보지는 못했다.’ 두 제자가 살아계신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예수님의 죽음만을 자세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코믹한 상황이다. 두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 주제가 ‘예수님의 죽음’ 문제였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죽음’ 문제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얼굴에 수색이 가득했다. 그래서 두 제자는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마음이 더 아프고 우울했다. 성도들이 만일 성경을 묵상하고 나누면서도 정작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나눔은 허무할 것이며 우울함만 가중될 것이다. 3) 두 제자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25-27절)?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책망하시면서, 구약성경에 약속된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영광에 이른다는 사실을 가르치신다.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자꾸 예수님의 죽음만을 말하는 게 예수님 입장에서도 듣기 좋을 리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두 제자를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걸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꾸짖으신다. 예수께서 두 제자에게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자기 슬픈 감정에만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성도가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할 때 슬픈 마음으로 인해 공황 상태에 빠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성도는 말씀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를 다시 믿음의 원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은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이 아니라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나눔 1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고난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실의에 빠져서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말씀이 아닌 자기의 선입견으로 메시아를 이해하면 영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우리도 세속적 가치관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시험에 빠진 적은 없는지 나눠봅시다. 2. 두 제자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봅니다(28-35절). 1)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언제입니까(30, 31절)? 예수님이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을 때 예수께서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가 영광에 들어가기 전에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을 구약성경을 통해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면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셨다. 이 장면은 예수께서 오병이어 때 음식을 나누신 장면이나(눅 9:16),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최후의 만찬 때 떡을 떼신 장면과 유사하다(눅 22:19).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풀어주시면서, 그리고 제자들에게 생전 예수님의 익숙한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셨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다. 2) 제자들의 마음은 언제 불타듯이 뜨거워졌습니까(32절)?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주셨을 때 영적인 눈이 열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제자들은 이제 서로 생명과 소망을 이야기한다. 바로 직전까지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차갑게 식어 있었던 그들의 마음이 소망으로 뜨겁게 달궈진 것이다. 이런 일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죽었던 사람의 마음을 다시 회복시켜 영적인 울림이 있게 하는 건 주의 말씀이다. 성령의 인도로 말씀을 묵상할 때 죽었던 마음이 다시 새 소망으로 용솟음칠 수 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을 깨달은 두 제자는 곧바로 무슨 일을 합니까(32-35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전했다. 두 제자의 목적지가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바뀌었다. 엠마오는 낙담하고 절망한 사람이 옛 삶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 시대, 새 역사를 열어나가겠다는 의지를 의미한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맨 먼저 한 일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한 것이었다.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진 그리스도의 제자는 더 이상 사적인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공적인 인생을 위해 자신을 드린다. 나눔 2 예수님이 말씀을 풀어주실 때, 제자들은 고난을 통과한 영광에 눈떴고, 식었던 마음도 다시 뜨거워졌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면서 마음이 벅차오르고 뜨거워진 경험을 나눠봅시다. 나눔 3 눈이 밝아지자 제자들이 맨 먼저 한 일은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기쁜 소식’을 자기만 알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떻게 부활을 증언하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날마다 성경을 묵상하면서 부활하신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게 하소서. 공동체 _ 교회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250420 속회지도자 자료 2025-04-16 신내교회 250420 속회지도자 자료.pdf 4월 셋째 주 그룹큐티나눔 안식 후 첫날, 빈 무덤 누가복음 24:1-12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무덤에 머물러(찬송 160장, 구 150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전도자의 통찰대로 죽음은 모든 노력과 가치를 무(無)로 돌리는, 가장 헛된 일입니다(전 9:1-3).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많은 사람이 죽음을 자기 생의 마지막 상태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기껏 하는 일이 자기 무덤을 크고 화려하게 꾸미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권력자들의 웅장한 무덤 유적들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죽음에 갇혀 있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이 변화를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예수님의 ‘빈 무덤’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안식 후 첫날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1-7절). 1)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간 이유는 무엇입니까(1절; 참조. 막 16:1)?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된 무덤에 갔다. 여인들이 무덤에 간 이유는 향유를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면서 마지막 예(禮)를 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참조. 막 16:1). 여인들이 보인 예의는 ‘산 사람’이 아닌 ‘시신’에 대한 예의다. 하지만 여인들의 이런 정성이 가득한 애도 행위는 사실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향유 바를 시신이 무덤에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생전에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셨다(참조. 눅 24:7; 막 8:31). 안식 후 첫날은 바로 그 약속하신 사흘째 되는 날이다. 그런데 여인들은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한 채 그저 예수님의 시신만 찾아서 돌보려 했다. 2) 여인들이 무덤에서 목격한 것은 무엇입니까(2,3절)? 돌이 옮겨진 것과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 여인들이 시신에 바를 향품을 가지고 밤새 달려왔는데 그들이 발견한 것은 ‘빈 무덤’이었다. 무덤 문을 막고 있던 큰 돌이 이미 굴려진 상태였고 무덤 안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다. 당시 무덤은 주로 석회석 산악 지대에 동굴을 파서 만들어졌다. 동굴 묘 문을 막고 있는 돌은 약 2톤 정도 무게로, 한번 막힌 돌은 경사 홈에 끼어 있기에 이것을 원상태로 돌리려면 성인 남성 20여 명이 함께 힘을 써야 한다. 이 동굴 묘를 로마 군병 16명이 4인 1조가 되어 4교대로 지켰다. 제자들이 로마 군병을 제압하고 큰 돌을 굴려서 묘 문을 연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마태복음 28:2에 의하면 주의 천사가 그 돌을 굴렸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이다. 빈 무덤은 ‘예수 부활’의 기초 증거다. 3) 근심하고 있는 여인들에게 두 사람이 전한 말은 무엇입니까(4-7절)?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안식 후 첫날 여인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었다. 예수님은 생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겠지만 제3일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안식 후 첫날 여인들은 시신을 찾아 마지막 예를 다하려고 노력할 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부활하신 주님을 찾아야 마땅했다. 주의 천사들은 여인들의 이런 실패를 긍휼히 여기고 다시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성도가 낙담하고 무너졌을 때 다시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말씀 앞에 서는 것이다. 말씀을 기억해야 무너진 신앙이 회복될 수 있다. 나눔 1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참 생명과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이 내 삶에 어떤 변혁을 일으켰고 또 일으키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2. 여인들이 무덤에서 보고 들은 것을 가감 없이 제자들에게 전합니다(8-12절). 1) 여인들이 열한 사도에게 ‘빈 무덤’을 증언한 결정적인 동기는 무엇입니까(8, 9절)? “제 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여인들이 본 것은 ‘빈 무덤’이었으며, 그들이 들은 것은 천사들이 전해준 부활 메시지였다. 그리고 여인들은 생전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고(참조. 눅 9:22; 18:32-33), ‘빈 무덤’은 시신이 사라진 게 아니라 말씀이 성취된 것에 대한 증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인들은 말씀을 기억하며 제자들에게 확신 있게 ‘빈 무덤’(부활)을 증언했다. 2) 사도들은 여인들의 말에 어떻게 반응합니까(11절)? 여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않았다. 사도들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큰 충격을 받아 심신이 허약해져서 헛것을 보고 횡설수설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일단 그들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무덤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베드로 역시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빈 무덤을 확인하게 된다. 당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이어지는 본문(눅 24:13-35)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다만 소망스러운 것은, 인간의 강퍅한 마음을 주님께서 열어주신다는 사실이다(참조. 요 20:27-31). 주님은 말씀과 성령을 통해 이 시대 모든 성도가 믿음으로 부활의 주를 만나게 하신다. 3) 무덤에 달려간 베드로 역시 무엇을 발견합니까(12절)? 세마포만 남은 무덤 무덤 안에 시신은 없고 세마포만 남았다는 건 예수님의 시신이 도난당한 게 아니라는 대표적 증거다. 만일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치려 했다면 세마포에 싸인 시신을 바로 들고 갔을 것이다. 세마포만 남았다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다는 증거다. 초대교회에서 ‘빈 무덤’은 부활의 기초 증거다. 하지만 ‘빈 무덤’만 가지고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한 건 아니다. ‘빈 무덤’보다 더 강력한 부활의 증거는 예수께서 부활의 몸을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신 사실이다(고전 15:3-8). 나눔 2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한 여인들은 빈 무덤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읽어냈습니다. 말씀을 기억하자 눈앞의 현실에 대한 해석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고 삶의 현실과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뀐 경험을 나눠봅시다. 나눔 3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예고와 여인들의 증언을 듣고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씀보다 경험과 현실을 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경험 때문에 믿기 어려웠던 혹은 어려운 말씀이 있으면 나눠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죄와 사망의 그림자에 갇혀 살지 않고 생명의 자유 가운데 살게 하소서. 공동체 _ 부활을 경험한 자의 말과 삶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온 세상에 증언하게 하소서. 250413 속회지도자 자료 2025-04-09 신내교회 250413 속회지도자 자료.pdf 4월 둘째 주 그룹큐티나눔 무슨 권위로 누가복음 20:1-18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내게 있는 모든 것을(찬송 563장, 구 411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향해 종교지도자들은 “네가 무슨 권위로 성전에서 이렇게 하느냐?”라고 따져 묻습니다. 권위의식으로 가득한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그분에게 자격이나 허가 여부를 따져 묻습니다. 예수님의 행보가 자신들의 권위에 위협이 되었기에, 예수님의 손발을 묶고 입을 막으려 한 것입니다. 가짜 권위에 도취되어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까지 멸시하는 그들은 곧 하나님께 심판받을 것입니다. 참된 권위에 의해 거짓된 권위는 쇠망하고 맙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 삼습니다(1-8절). 1)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뭐라고 질문합니까(1, 2절)?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말하라.”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은 성전과 산헤드린 공회의 종교지도자들이다. 대제사장은 원래 유대 사회에서 한 명이어야 정상인데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로 지칭되고 있다. 그 이유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안나스(장인)와 가야바(사위)가 모두 대제사장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안나스는 주후 6년에 수리아 총독 퀴리니우스(구레뇨)에 의해 임명되었다. 하지만 주후 16년에 유대 총독 그라투스에 의해 폐위되고 대신에 그의 사위인 가야바가 대제사장직을 승계하게 된다. 율법에 따르면 대제사장은 아론의 자손 중에서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가 기름부음을 받아 세워져야 하며 그 직은 종신직이다. 이런 율법 기준에 의하면 이들은 모두 정통성을 갖지 못한 자들로서 자격도, 권위도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런 무자격자들이 성전의 참 주인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 삼고 있다. 이것은 거의 코미디에 가까운 일이다. 2) 예수님의 반문에 종교지도자들이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3-7절)?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났다고 하면 “왜 믿지 않았느냐?”라는 말을 들을 것이고, “사람으로부터 났다”라고 하면 백성에게 돌로 맞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인은 세례 요한을 존경하며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라고 생각했다(참조. 눅 1:76).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반대하고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대놓고 말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걸 인정하면, ‘그러면 왜 믿지 않았느냐?’라는 타박을 받을 것이며, 사람으로부터 난 권위라고 말하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는 백성들로부터 돌을 맞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믿음도, 양심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도 없었다. 나눔 1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에게서 권위를 부여받았다고 자부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며 자기 잇속만 차리는 부류였습니다. 이는 그들의 대답인 “알지 못하노라”에서 드러났습니다. 나의 지위나 명예, 소유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은 없었는지 나눠봅시다. 2. 포도원 농부들이 주인의 소유를 차지하기 위해 끔찍한 일을 저지릅니다(9-18절). 1) 주인이 포도원 소출을 받기 위해 보낸 종들과 아들에게 농부들은 어떤 일을 저지릅니까(9-15절)? 종들을 몹시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으며, 포도원을 아예 차지하려고 아들을 포도원 바깥으로 내쫓아서 죽였다. 당시 갈릴리 같은 경우 이방인 소유의 땅이 많이 있었다. 땅 주인은 그 땅을 그 지역 소작인에게 맡기고 자기 고향(타국)으로 돌아가 지내는 경우가 흔했다. 그런데 땅 주인이 자손도, 유언도 남기지 않고 사망한 경우, 그 땅을 첫 번째 차지한 사람에게 넘어가는 경우가 있었다. 예수께서 이런 당시 관습에 비추어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기득권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구약의 선지자들, 신약의 세례 요한)을 죽였을 뿐 아니라, 이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까지 죽이려 한다. 유대 지도자들은 눈엣가시 같은 예수님을 죽이고 성전 기득권을 보전하려 한 것이다. 예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이 비유는 현실이 된다. 2) 결국 포도원 주인이 내린 특단의 조치는 무엇입니까(16절)? 포도원으로 와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다. 포도원 즉 이스라엘 백성이 진멸될 거라는 말씀은 주후 70년 예루살렘 패망으로 1차 성취된다. 하지만 이 말씀은 단지 예루살렘 패망만을 염두에 둔 예언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최후의 심판을 실행하실 때, 모든 악한 자들이 멸망할 것까지도 말씀하신 거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긍휼에 풍성하셔서 백성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죄가 세상에 관영할 때 하나님은 철저하고 완벽한 심판을 실행하신다. 그때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자는 한 사람도 없다. 3)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한다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17, 18절)?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시 118:22)라는 말씀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며, 그 돌이 사람을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시편 118:22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수 있다. 이는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할 테지만 예수님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로 승귀하실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기초로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가 만들어질 것이다. 더 이상 혈통이 좌우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믿음이 하늘 백성 유무를 판가름하는 새로운 기준이 되어 성전 공동체(교회)가 건축될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참된 권위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는데 무자격, 무권위 지도자들이 몇 푼어치도 안 되는 세속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그를 배척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심판의 돌이 그들 위에 떨어지게 될 것이고,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나눔 2 농부들이 주인의 종들과 아들을 핍박하며 포도원의 주인이 되려 한 것처럼, 종교지도자들은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서 하나님 백성의 주인이 되려 했습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며 돌려드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돌려드릴지 이야기해봅시다. 나눔 3 포도원을 악한 농부들에게서 되찾는 주인처럼, 예수님은 악한 지도자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의 손아귀에서 자기 백성을 되찾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일을 어떻게 이루고 계시는지, 이 일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탐욕 때문에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거나 하나님의 것을 차지하지 않게 하소서. 공동체 _ 하나님의 것을 사유화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하소서. 250406 속회지도자 자료 2025-04-02 신내교회 250406 속회지도자 자료.pdf 4월 첫째 주 그룹큐티나눔 인자가 온 이유 누가복음 19:1-10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예수 앞에 나오면(찬송 287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색안경을 끼고 사람을 대하면 안경 색깔에 따라 사람이 달리 보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선입견과 편견을 지닌 채 사람을 대한다면 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인으로 낙인찍은 한 사람이 있습니다. 세리장 삭개오입니다. 사람들은 주위의 이목 때문에 삭개오와 접촉하는 것 자체를 꺼립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람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으시고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와 교제를 나누시고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약한 자를 품으시는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삭개오 앞에 방해물이 놓여 있습니다(1-4절). 1) 삭개오는 사회적으로 어떤 사람입니까(1, 2절)? 세리장이고 부자다. 1세기 당시 세리는 로마 정부를 대신해서 세금을 징수하던 자들이다. 세리장(헬, 아르키텔로네스)은 다른 세리들을 관리하는 좀 더 큰 권한을 가진 세리다. 보통 세리들은 로마 정부에서 요구하는 금액보다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해서 잉여금을 착복하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동포의 고혈을 짜내어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세리들을 경멸했다. 유대인은 그런 세리들을 죄인 취급하고, 부정하게 여기며, 함께 어울리지 않았다. 삭개오는 사회적으로 로마 권력을 등에 업고 부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유대인에게 무시와 조롱을 받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2)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은 삭개오 앞에 놓인 방해물은 무엇입니까(3절)? 작은 키(신체적 장벽)와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사회적 장벽)다. 삭개오는 두 가지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삭개오는 키가 작아서(육체적) 수많은 무리를 헤치고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었다. 둘째로 삭개오는 유대인으로부터 경멸을 받는 대상이었기에 그 눈총을(사회적) 피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게 쉽지 않았다. 삭개오는 신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큰 장애가 있어서 예수님을 만나는 게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런 육체적, 정서적, 사회적 장애는 삭개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사람에게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핑계가 될 수는 없다. 3) 방해물 앞에서 삭개오가 취한 행동은 무엇입니까(4절)? 앞으로 달려가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 삭개오는 비록 육체적, 사회적 장애를 안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만나보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걸 바라보는 것 정도였다. 돌무화과나무(헬, 쉬코모레아)는 ‘무화과’(헬, 쉬콘)와 ‘뽕나무’(헬, 모론)를 합친 합성어다. 돌무화과나무는 약 2m 정도 크기여서 성인이 충분히 올라갈 수 있는 나무였다. 돌무화과나무 열매는 무화과 열매에 비해 품질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1년에 여섯 번 정도 열매가 맺혀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식량으로 활용되었다. 돈 걱정 없이 풍요를 누리며 살던 부자 삭개오가 가난한 자들이 주로 찾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 앉는 모습이 역설적이다. 나눔 1 삭개오는 자신의 체면을 개의치 않고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만으로 여러 방해물을 뛰어넘으려 애썼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방해물은 무엇입니까? 그 방해물 앞에서 내가 취한 행동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예수님이 삭개오와 함께 그의 집에 들어가십니다(5-10절). 1)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을 본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수군거립니까(7절)?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예수께서 적극적으로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집에 들어가신 것은 매우 파격적인 행보였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은 세리를 창기와 같은 부류로 취급하며 죄인 취급했기 때문이다. 유대 사회에서 죄인(헬, 하마르톨로스)은 부정한 존재였기에 유대인은 정결법에 따라 세리 같은 죄인들과는 접촉하지도, 함께 식사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예수께서 정결법의 금기를 깨며 세리의 집에 들어가 어울리신 것이다. 그러니 유대 사회가 술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2)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8절)? 자신의 소유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누군가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배로 갚기로 한다. 누가복음 18:9-14에 의하면, 바리새인은 스스로 의인인 체하지만 세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한다. 마찬가지로 세리인 삭개오 역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며 회개한다. 그의 회개는 단지 입술만의 죄 자백이 아니다. 그는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줄 것이며 속여 빼앗은 게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한다(참조. 출 22:1; 삼하 12:6). 그가 전 재산을 처분하지 않은 건, 자기 몫으로 일부 남겨놓으려는 게 아니라 피해자들에게 보상할 몫을 남기기 위해서다. 삭개오는 진짜 회개를 시작했다. 3)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10절)? 삭개오와 같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삭개오를 죄인 취급하며 한 형제라는 걸 인정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삭개오를 구원하심으로써 그를 다시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의 형제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인자(예수님의 자기 칭호)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고 선언하신다. 예수님은 율법의 한계를 극복하신 것이다. 율법은 누가 죄인인지를 밝히는 데 주력하지만, 예수님은 죄인을 찾아서 정결케 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는 일에 집중하신다. 나눔 2 삭개오의 회개는 말의 회개가 아니라 삶의 회개였습니다. 단지 죄를 자백한 게 아니라 이전의 잘못을 청산하고 의롭게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회개에 걸맞게 변화된, 혹은 변화되어야 할 나의 삶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나눔 3 예수님은 삭개오를 ‘세리’도 ‘부자’도 ‘죄인’도 아닌, 그저 ‘잃어버린 자’로 여기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찾아야 할 ‘잃어버린 자’는 누구인지, 그들을 어떻게 ‘찾아 구원할’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외적인 방해물을 탓하지 말고 적극적인 자세로 주를 찾게 하소서. 공동체 _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웃과 교회에서 소원해진 지체를 살피게 하소서. 250330 속회지도자 자료 2025-03-27 신내교회 250330 속회지도자 자료.pdf 3월 다섯째 주 그룹큐티나눔 은혜가 못마땅한가? 누가복음 15:11-32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양 아흔아홉 마리는(찬송 297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하시며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못마땅하게 여깁니다(15:1,2). 하나님의 은혜는 의로운 자기들의 것이지 죄인들의 것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리 없고 그렇게 하셔서도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예수님이 그리스도일 리 없다고 단정 짓습니다. 하지만 특정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에서 배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독점하려는 태도는 하나님이 보실 때 합당할까요?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예수님이 아들을 다시 찾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11-24절). 1)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받은 분깃을 어떻게 했습니까(13절)?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탕진했다. 통상 유산(분깃)은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야 받을 수 있다. 둘째 아들의 요구는 무례한 것이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들어준다. 둘째 아들은 재산을 현물로 바꾸어 다른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다. 누가복음 15:1부터 시작된 ‘잃어버린’ 이야기가 여기서도 이어진다. 둘째 아들이 자신의 분깃을 탕진했는데 여기서 잃어버린 것은 재산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다. 2) 둘째 아들은 어떤 마음으로 아버지를 다시 찾아갔습니까(18, 19, 21절)? 죄를 지은 자신에게 아들의 자격이 없으니, 품꾼으로 여겨달라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재산을 탕진한 둘째 아들은 자신이 거주하던 지역의 흉년으로 인해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돼지 치는 일을 했지만 굶기 일쑤였다. 결국 돼지의 먹이라도 먹으려 했으나 그것도 부족하긴 마찬가지였다. 본문에는 나오지 않으나 아들이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먼 나라’는 이방 땅을 의미한다.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여기는 유대 문화에서 볼 때 그가 선택한 직업은 부정한 일이다. 심지어 동물의 먹이를 먹으려 했다면 밑바닥까지 내려간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어버린 아들이 최악의 상황에 가서야 비로소 잘못을 뉘우친다. 아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품꾼이 되기를 자처하며 아버지를 찾아간다. 3) 아버지는 돌아온 둘째 아들을 어떻게 맞이합니까(20, 22-24절)? 여전히 사랑하는 아들로 맞이하고, 그의 돌아옴을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환대한다.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긴다. 그렇게 이전에 그가 누렸던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킨다. 분명 둘째 아들의 반성을 들었을 터이지만, 지난날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다. 오로지 잃었던 아들을 도로 찾았음에 기뻐한다. 나눔 1 잘못을 저질렀으나 회개하며 돌아온 아들을 환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이미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어떤 모습으로 만났는지 서로 나눠봅시다. 2. 첫째 아들은 돌아온 동생을 환대하는 아버지에게 분노를 느낍니다(25-32절). 1) 첫째 아들은 무엇을 하다가 집에 돌아왔습니까(25절)? 밭에서 일하다 돌아왔다. 첫째 아들은 밭에서 돌아왔다. 그가 얼마나 넓은 땅을 가졌는지 알 수 없다. 여러 명의 하인이 존재한 것으로 봐서 분명 부요한 집안이었을 것이다. 첫째 아들은 둘째 아들이 없는 동안은 물론 그 이전부터 부모를 섬기며 전반적인 농사일을 담당했을 것이라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2) 첫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화난 이유는 무엇입니까(29, 30절)?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성실하게 섬겼음에도 자신을 위해서는 작은 잔치라도 열어주지 않았는데, 아버지의 살림을 낭비한 둘째를 위해서 큰 잔치를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첫째 아들은 오랜 시간 동안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을 책임졌다. 반면 동생은 집안을 돌보기는커녕 아버지에게서 받은 유산을 모두 탕진했다. 자신은 성실함과 책임감이 있는 반듯한 사람이라면, 동생은 무례하고 낭비벽이 심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허랑방탕한 동생이 돌아오자 다시 지위를 회복시키고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 잔치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3)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무엇이라고 설명합니까(31, 32절)?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그러나 네 동생은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 때문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당대 문화에서 첫째 아들(장자)은 다른 아들보다 두 배 많은 재산을 유산으로 받았다. 더 많은 재산을 받는 것은 집안을 책임지고 가업을 이어가야 한다는 의무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첫째 아들은 누구보다 아버지의 사랑과 혜택을 더 많이 누린다. 잃어버린 아들의 이야기 역시 하나의 비유다. 15:1-2을 놓고 보면 첫째 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이들을, 둘째 아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의미한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흉보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관한 이야기다. 더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옹졸한 이들을 향한 안타까움이다. 세리와 죄인들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진 첫째 아들과 같은 이들을 향한 책망이다. 나눔 2 이 비유는 세리와 죄인을 무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15:1,2). 은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삐딱한 시선과 우월의식을 나무라신 것입니다. 마땅히 품어야 할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삐딱한 마음을 품은 적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나눔 3 아버지의 마지막 말에는 첫째 아들을 향한 당부가 숨겨져 있습니다. “내 것은 다 네 것이다. 네 동생은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 내가 다시 얻은 네 동생도 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으로 여기는 자들까지도 넓은 마음으로 품어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대상은 누구인지,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이야기해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더 크고 넓은 마음으로 연약한 이들을 품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공동체 _ 시기와 비방을 버리고 함께 기쁨을 노래하는 성숙한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50323 속회지도자 자료 2025-03-19 신내교회 250323 속회지도자 자료.pdf 3월 넷째 주 그룹큐티나눔 회개, 변화의 시작 누가복음 13:1-21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찬송 289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눅 6:41)고 질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훈수 두기는 쉬워도, 자신의 흠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할수록 이런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런 사람을 향하여 예수님은 새로운 열매 맺는 삶, 즉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예수님이 목숨을 잃은 이들을 흉보는 사람들을 책망하십니다(1-9절). 1) 예수님이 흉보는 사람들을 나무라시며, 반복하여 강조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3, 5절)?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몇 사람이 예수님께로 와서 빌라도에 의해서 죽은 갈릴리 사람들을 흉봤다. 그들이 흉본 일은 총독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어버린 일과 관련 있어 보이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본문의 아이러니는 사람들을 죽인 빌라도를 욕하는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흉본다는 점이다. 신명기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은 율법을 지키는 의로운 자에게는 복을 내리시지만, 악한 자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분이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빌라도에 의해 죽게 된 이들 역시 그들의 죄 때문에 죽은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예수님도 각 사람이 자신의 죄로 인해 재앙을 맞이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신 듯하다. 그런 점에서 재앙이 닥치기 전에 회개할 것을 강조하신다. 2) 무화과나무 비유에서 주인이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찍어버리려 할 때, 포도원 지기가 한 말은 무엇입니까(8, 9절)?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포도원 주인은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즉시 잘라버리려 하지만, 포도원지기는 열매 맺을 기회 주기를 요청한다. 이 비유는 앞의 문맥, 즉 1-5절의 내용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한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아직 회개하지 않은 이들을 비유한다. 포도원지기는 아마 예수님을 비유하는 듯하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더 주시려 한다. 왜냐하면 찍혀버릴 재앙이 임하기 전에 회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 회개는 열매 맺는 것과 연결된다. 나눔 1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같은 우리에게 기회를 더 줘야 한다고 하나님께 호소하시는 중보자입니다. 은혜로 주어진 이 시간에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십니다(10-21절). 1) 회당장은 왜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는 것에 화를 냈습니까(14절)? 병 고치는 일은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에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문에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으나 아마 회당장은 안식일과 관련된 계명(출 20:8-10; 신 5:12-14)에 따라서 예수님의 행동을 판단했을 것이다. 유대교의 안식일 전통에 따르면 생명이 위급한 경우에는 생명을 구하는 일이 허용된다. 하지만 생명이 위급하지 않은 경우라면 어떤 노동도 하지 말라는 법을 지켜야 한다. 회당장은 이러한 안식일 전통의 기준에 의해서 귀신 들린 여인이 안타까울지언정 생명이 급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을 비판한 것이다. 2) 예수님은 왜 회당장을 외식하는 자로 여기셨습니까(15절)? 가축이 안식일에도 물을 먹을 수 있도록 풀어 놓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논의가 나타나지 않는다. 유대인의 율법 해석 전통을 담은 미쉬나는 안식일에 사람이 동물을 돕는 것을 금지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볼 수 있다. 가축은 사람이 키우는 동물이기에 반드시 사람이 먹이를 줘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안식일 규정에 따르면 노동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안식일 전날 가축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외양간의 문을 잠그지 않고 ‘풀어 놓음’으로써 가축 스스로 먹이를 찾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이처럼 자신들의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율법의 빈자리를 잘 찾아 이용한다. 그러면서도 귀신에게 매인 사람을 ‘풀어주는’ 일에는 안식일 규정을 운운하며 인색하게 굴었으니, 예수님은 회당장을 외식하는 자로 여기셨을 것이다. 3)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무엇에 비유하셨습니까(19, 21절)? 새들이 깃들일 만큼 자라는 겨자씨 한 알, 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하는 누룩 누가복음 13:1-21까지 여러 가지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이 이야기들을 연결하여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는 경고의 이야기(1-5절)는 회개라는 열매 맺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바람을 담은 것(6-9절)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마주하는 회당장 같은 대부분의 유대인은 율법에 대한 전통에 매여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이다(10-17절). 말씀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삶의 변화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원하신 회개다. 예수님은 율법이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신다. 비록 가장 작은 겨자씨지만 새들이 머물고 둥지를 틀 수 있는 나무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다른 누군가를 향해 긍휼과 은혜를 베풀고 그들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얼마 안 되는 누룩이지만 가루 서 말(약 54리터)을 부풀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비록 얼마 안 되는 제자로도 넓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말씀에 따라 삶이 변화된다면 회개의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나눔 2 회당장조차 안식일 규정에 담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율법은 사람을 옭아매는 줄이 아니라, 위험한 곳을 안전하게 지나도록 돕는 줄입니다. 회개가 잘못된 것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이라면, 말씀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것도 회개의 일부입니다. 말씀을 오해하다가 바르게 이해한 경험이 있습니까? 나눔 3 말씀을 바르게 알면 삶이 변합니다. 그 변화는 비록 작을지라도, 작은 겨자씨가 나무로 자라고 적은 누룩이 서 말의 가루를 전부 부풀게 하듯이,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 일을 소망하며 지금 만들 수 있는 일상의 변화는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을 더욱 알고, 생각과 삶까지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공동체 _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해석하여 사람을 옥죄기보다 안식을 주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50316 속회지도자 자료 2025-03-12 신내교회 250316 속회지도자 자료.pdf 3월 셋째 주 그룹큐티나눔 행동하는 사랑 누가복음 10:25-42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찬송 218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누구나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좀 더 훌륭하게 보이도록 포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포장하려 한 말이 도리어 자신의 부족함이나 편협함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율법교사가 그러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율법에 합당한 자인지 증명하려 시작한 말이 결국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율법교사가 예수님과 율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25-28절). 1) 영생을 얻는 율법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27절)?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율법교사는 예수님에게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한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질문으로 대답을 갈음한다. ‘율법에는 어떻게 기록되었는가?’라는 질문은 율법을 다루는 율법교사에게는 매우 적절한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은 율법의 가짓수를 총 613개로 생각한다. 그 수많은 율법 중에서 영생을 얻는 것과 관련된 율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율법교사는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신명기 6:5과 레위기 19:18을 결합한 것이다. 이 대답은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십계명의 문장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다. 어쩌면 율법교사는 ‘율법의 지향점이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통해 이 대답을 도출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도 ‘너의 대답이 옳다’고 인정하신다. 2) 율법의 가르침에 대하여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28절)?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분명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대답이 ‘옳고 바른 대답’이라고 여기셨다. 그러나 그의 대답과 삶의 모습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신 듯하다. 이어지는 “이를 행해라”라는 명령 때문에 과연 율법교사는 어떤 삶을 살았을지 궁금해진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보게 된다. 하지만 정작 율법교사는 그런 예수님의 뉘앙스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마 자신은 모든 정답을 알고 있다는 자만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눔 1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대답이 율법의 정수라는 점에서 옳다고 인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차이를 언급하시며 ‘이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라’고 강조하십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그에게 답하십니다(29-37절). 1) 율법교사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잘 지킨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한 질문은 무엇입니까(29절)?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한 것이 틀림없다. 오히려 자신의 선행을 드러낼 기회로 여긴 듯하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라는 문장이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율법교사가 자신이 얼마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대화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한다. 이 뜬금없는 질문이 누가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목축업을 주로 하던 시대에 이웃은 ‘동료’를 의미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인 친족 혹은 친구가 이웃이었다. 농경사회에 와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사용되었다. 특별히 유대인은 정결법에 따라서 부정하게 여기는 이들과는 함께 일하거나 근처에서 살지 않았다. 따라서 신약 시대를 살던 율법교사에게 이웃이란, 정결한 유대인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이웃’의 의미를 달리 보여준다. 2) 예수님의 비유에서 ‘이웃을 사랑한 사람’은 누구입니까(36, 37절)?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몇 사람이 등장한다. 강도 만난 어떤 사람,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이 중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분명 유대인이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과 같은 민족이지만,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이방 민족과 혼혈된 역사가 있는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불분명한 것은 강도 만난 어떤 사람이다. 그가 어느 민족인지, 어느 종족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일 뿐이다.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이고, 고난 가운데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이 생각한 이웃의 범주를 바꾸신다. 어려움에 처한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어려움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돕는 자가 이웃이며, 그런 자세가 율법이 말하는 사랑의 핵심이라고 전한다. 율법교사가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규정하려 했다면, 예수님은 ‘나는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줄 것인가’를 중요하게 다룬다. 나눔 2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율법교사는 사랑해야 할 이웃의 범위를 한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웃의 범주를 제한하지 말고, 민족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 자비(긍휼)를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이웃 사랑’임을 강조하십니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내가 먼저 이웃이 되어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3. 마르다는 자신을 돕지 않는 동생 마리아가 못마땅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42절)?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마르다가 예수님을 위해 봉사와 헌신을 다하는 인물이라면, 오히려 마리아는 혼자 분주한 언니를 돕지 않는 얌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동생 마리아를 두둔하신다. 이 단락 역시 앞에 나오는 이야기와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이 좋다. 완벽하진 않으나 마르다는 제사장 그리고 레위인과 평행을 이루고, 마리아는 사마리아인과 평행을 이룬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신들의 소임을 위한 정결에만 신경을 썼다면, 마르다는 예수님을 초대한 장본인으로서 잔칫상에만 신경을 쓴다는 점에서 통한다. 반면 사마리아인이 여행 중이라 해도 불쌍한 사람을 보고서는 그에게 집중했듯이, 마리아는 언니와 마찬가지로 손님을 초대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 집중했다는 점에서 통한다. 예수님은 마르다를 책망하지 않으신다. 다만 마리아의 자세를 더 높게 여기셨을 뿐이다. 나눔 3 제사장과 레위인이 하나님께 드릴 제사에 집중한다는 핑계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웃 사랑’을 놓쳤듯이, 마르다는 예수님께 드릴 ‘많은 음식’에 집중하느라 정작 예수님을 놓쳤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오롯이 ‘예수님’에게 집중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은 있으나 정작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말씀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는 대로 살게 하소서. 공동체 _ 모이는 예배에 힘쓰는 만큼, 일상으로 흩어졌을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게 하소서. 250309 속회지도자 자료 2025-03-06 신내교회 250309 속회지도자 자료.pdf 3월 둘째 주 그룹큐티나눔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 나라 누가복음 9:1-17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찬송 560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에서 소외된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을 돌봤습니다. 한국 선교 초기에도 선교사들은 빈자와 병자, 고아들을 돌봤고, 여성의 교육과 권리 증진을 위해 실제적인 사역을 펼쳤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과 관념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 땅에서 구현되고 실현되어 왔습니다. 이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예수님과 제자들에 관한 소식을 듣고 헤롯이 당황합니다(1-9절). 1) 제자들은 찾아간 마을마다 어떤 일을 했습니까(6절)?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의 병을 고쳤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신 이유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 병든 사람을 고치기 위해서다. 제자들은 이에 걸맞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했고, 사람들의 질병을 고쳤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과 질병을 고치는 것에는 특별한 관련이 있다. 복음서는 병 고침(축귀)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를 통해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의 사건을 중요하게 다룬다.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신 사건을 이사야서의 성취라는 측면에서 다뤘다(눅 4:16-21). 예수님이 오신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기 위해서,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시대를 전파하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셨던 이유와 같이, 오늘날 우리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보여줘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치유 사역을 하자는 말로 오해하진 말자. 2) 세례(침례) 요한이 살아났다는 소문에 헤롯이 두려워한 이유는 무엇입니까(7, 9절)? 자신이 세례 요한을 죽였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은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면서도,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세례 요한을 죽였던 사건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누가복음은 헤롯이 자신이 죽였던 세례 요한이 마치 살아난 듯한 착각에 빠져 두려워했다는 점을 담백하게 보여줄 뿐이다. 헤롯이 어쩔 수 없이 세례 요한을 죽였다는 변명은 누가복음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헤롯은 백성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을 수 있는 폭군에 불과하다. 헤롯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왕권을 사용한다(눅 3:19-20). 결코 백성을 위한 힘이 아니다. 그런 통치자가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은 다른 의미에서 가난한 사람이고, 포로 된 사람이고, 눈먼 사람이고, 눌린 사람이 된다. 나눔 1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어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의 삶을 회복시키라고 하신 데 반해, 헤롯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살아나지만, 헤롯의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참된 면모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 예수님이 빈 들에서 무리를 먹이십니다(10-17절). 1) 예수님은 해가 저물 때까지 무엇을 하셨습니까(11절)? 무리를 영접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라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언제나 손수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셨다. 본문은 이 점을 계속 반복해서 강조한다. 사람들을 먹이신 사건도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한다. 단지 병든 사람이 주린 사람으로 바뀔 뿐이다. 2) 날이 저물자, 제자들이 무리를 돌려보내려 한 까닭은 무엇입니까(12절)? 그들이 있는 곳은 빈 들이고, 큰 무리를 먹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날이 저물어가는 것을 보며, 예수님께 사람들을 사람이 거주하는 곳으로 보내자고 말했다. 이유는 매우 단순하고 분명하다. 그들이 있던 장소가 빈 들, 즉 사람이 사는 마을이 아니기에 음식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0절에 따르면 예수님과 일행은 벳새다라는 도시 인근의 들판에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멀지 않은 벳새다에 가면 충분히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벳새다는 ‘사냥꾼의 집’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볼 때, 먹을 것을 구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곳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의 의견은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기를 원하셨을 뿐이다. 3) 무리를 돌려보내려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13절)?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의 말씀은 여러모로 합리적이지 않고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가난하고 그들을 찾아온 사람들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다. 고작 몇 명이 나눠 먹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다. 자세히 따져본다면 이후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 오천 명에게 먹을 것을 준 분은 예수님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는 일을 예수께서 손수 하셨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예수님의 전유물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이처럼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줘야 하는 사람도 제자여야 한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제자의 자세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물질이 많아야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질이 적은 가운데서도 누군가를 돕는 것이 제자의 자세임을 가르치신다. 적은 물질을 드리는 이는 제자겠지만, 그 물질을 풍성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작은 일이라도 세상 사람들을 살리는 데 동참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이뤄진다. 나눔 2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말로만 전파하지 않으시고 연약한 자를 고치고 빈 들에서 무리를 먹임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에서 시작되지만, 말씀에만 머물지 않고 역동적으로 드러납니다. 실현되길 기다리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까? 나눔 3 예수님은 빈 들에서 제자들이 별 기대 없이 꺼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 나라는 이렇듯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와 우리에게 있는, 사람을 살리는 ‘떡과 물고기’는 무엇입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작고 미약한 일이라도 말씀대로 실천하면서 사람을 살리는 데 동참하게 하소서. 공동체 _ 지체들의 섬김과 헌신을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이어주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50302 속회지도자 자료 2025-02-27 신내교회 250302 속회지도자 자료.pdf 3월 첫째 주 그룹큐티나눔 착한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들 누가복음 8:1-15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내 죄 속해 주신 주께(찬송 215장, 구 354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부유하다고 해서 저절로 넉넉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재물에 더 집착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평생 고단하게 모은 전 재산을 자신보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내놓는 분들도 있습니다. 결국 베푸는 삶은 소유의 정도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자각과 결단이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여기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예수님과 제자들의 순회 전도사역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1-3절)?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다른 여러 여자 누가복음은 마가복음, 마태복음과는 다르게 예수님과 제자들을 지원했던 여인들을 주목한다. 유대인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 들린 여인이라는 점에서 그녀를 부정하게 여겼을 것이다. 헤롯 왕정을 못마땅하게 여긴 바리새파 사람들은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여인들을 부정하게 여기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후 그녀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후원하는 여자 제자들이 되었다. 그녀들은 훗날 예수님의 무덤을 제일 먼저 찾아간 용기 있고 헌신된 제자들이다(눅 24:10). 나눔 1 예수님을 섬긴 여인 중에는 사람들이 부정하게 여긴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부정하게 여기지 않으셨기에, 그는 예수님을 섬기는 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내게도 은혜를 받은 경험이 섬김과 봉사로 이어진 적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4- 15절). 1) 비유에서 씨는 어디에 떨어졌습니까(5-8절)? 길가, 바위, 가시떨기, 좋은 땅 예수님은 자주 비유로 무엇인가를 말씀하셨다. 대체로 비유는 비유를 언급한 사건과 관련하여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혹여 농부의 농사 방법을 문제 삼지는 말아야 한다. 현대의 농사법과 고대의 농사법에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비유는 농사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는 서로 다른 상황에 떨어진 씨앗을 보여주려 한다. 씨앗이 떨어진 상황들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 2) 씨가 떨어진 장소는 각각 어떤 상황을 의미합니까(12-15절)? ① 길가: 말씀을 들었을 때 마귀가 그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는 것 ② 바위: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으나 시련을 당하면 배반하는 것 ③ 가시떨기: 말씀을 들었으나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것 ④ 좋은 땅: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것 각 장소는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이 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을 비유로 보여준다. 비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삶의 문제 앞에서 말씀으로 열매 맺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점을 반영한다. 그러나 비유에는 너무 쉽게 말씀을 잊는 것, 시련 앞에서 말씀을 버리는 것, 삶의 여러 고민으로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두드러진다. 동시에 어려움을 이겨내고 결실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쩌면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같은 여인들이 그런 표본일지도 모른다. 분명 그녀들의 삶에도 길가, 바위, 가시떨기는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어려웠던 삶의 문제들을 좋은 거름으로 바꿨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다. 삶의 문제로 인해 열매 맺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환경의 탓으로만 돌릴 것인가? 오히려 비유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라고, 인내를 가지고 열매를 맺으라고 격려한다. 나눔 2 씨(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가 뿌려졌다고 해서 저절로 열매가 맺는 것은 아닙니다. 마귀의 시험, 시련, 이생의 염려나 재물과 향락의 유혹이 열매 맺는 삶을 억누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실천하고 말씀대로 살아내기 어려웠던 경험을 나눠봅시다. 나눔 3 괴로운 삶이 모두 길가, 바위, 가시떨기 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삶의 어려움과 고단함이 밑거름이 되어 좋은 땅이 되기도 합니다. 오히려 어려운 상황에서 말씀의 은혜를 경험하고 섬김의 열매를 맺은 경험을 나눠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잘 견디며 말씀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소서. 공동체 _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지체와 이웃을 섬기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50223 속회지도자 자료 2025-02-19 신내교회 250223 속회지도자 자료.pdf 2월 넷째 주 그룹큐티나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누가복음 5:27-39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나의 영원하신 기업(찬송 435장, 구 492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대개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가 높고 교양을 갖춘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지만,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도 이런 기준으로 사람을 대하신다면 우리 중 누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품어주셨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열린 마음으로 포용하시고 그들에게도 말씀을 들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증인인 교회가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스승이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예수님은 세리 레위의 집에 들어가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십니다(27-32절). 1) 예수님이 세관에 있는 세리 레위를 부르시자 레위는 어떻게 반응합니까(28, 29절)? ① 28절: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② 29절: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벌였다. 1세기 당시 세리들은 로마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과정에서 부당하게 높은 세금을 부과하기도 하였고, 중간에 횡령하여 사익을 취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은 세리를 도둑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는 세리 레위를 사랑스럽게 부르신다. 예수님의 부름에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가 즉각적으로 순종하며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기 집을 오픈하며 예수님을 환대한다.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소개는 오직 누가복음에만 등장한다. 누가복음은 레위의 즉각적인 순종과 헌신을 강조하면서, 자격 없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제자 공동체에 합류하게 된 것을 강조하고 있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비방한 예수님의 행동은 무엇입니까(30절)?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비방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부정하게 생각했다. 당시 유대인은 이방인이나 죄인은 부정하다고 생각해서 함께 식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비방하는 일을 서슴없이 하신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정죄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과 교제하신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구약의 정태적 정결법을 역동적 거룩법으로 바꾸신다. 즉 예수님은 구별과 분리를 통해 정결을 추구하신 게 아니라, 오히려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시면서 적극적으로 그 사람을 거룩한 백성으로 바꿔내신다. 3)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비방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답하십니까(31, 32절)? 건강한 자가 아닌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의사의 존재 목적이 병든 자의 병을 고치는 데 있듯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죄인을 정결케 하여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죄인을 단순히 옹호하려는 게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고 구원을 선물하려 하신 것이다. 만일 의사가 환자를 보고 부정하다며 접촉을 꺼린다면 그 환자를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사람들을 부정하다며 피하신다면 이 땅의 죄인들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정한 자들을 직접 찾아가셔서 그들을 만지고 고치신 것이다. 나눔 1 세리 레위는 예수님의 부름에 지체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반응하였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걸 내려놓고 예수님을 좇았고 자기 집을 개방하여 예수님을 환대했습니다. 예수님에게 보여드린 나의 ‘내려놓음’과 ‘환대’는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나눔 2 예수님은 죄인을 정죄하고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혹시 우리가 죄인이라고 정죄하며 가까이하기를 주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복음으로 포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이야기해봅시다. 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33-39절). 1)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33, 34절)?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이 있을 때 금식할 수 없듯이, 신랑 되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기에 금식할 필요가 없다. 금식은 회개할 때, 또는 국가적 재난 앞에 슬퍼할 때 하는 것이다(참조. 레 16:29-31; 23:27; 슥 7:3,5; 8:19). 하지만 바리새인은 그들이 만든 표준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금식을 강요했다. 이에 예수님은 마치 신랑이 신부를 맞으면서 혼인 잔치가 시작되듯이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 잔치가 시작되었으니, 지금은 금식하며 슬퍼할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고 백성이 그 기쁨의 잔치를 누려야 할 때에, 여전히 금식하며 슬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 아니라 반율법적인 행동이다. 2)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37, 38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가죽이 터져서 새 포도주마저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새 포도주가 발효되고 팽창하면서 옛 가죽 부대를 터지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것은 상식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기에 그에 걸맞게 신앙의 전통도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여전히 바리새인과 유대인은 율법주의에 빠져 ‘묵은 포도주가 좋다’며 새 것을 거부한다(39절). 예수님께서 율법을 성취하실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는데, 메시아이신 예수님 앞에서 여전히 율법을 강조하며 그를 배척하는 것은 새 포도주를 옛 부대에 넣으려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이런 편향된 율법주의 전통은 메시아를 배척하는 수단일 뿐이다. 나눔 3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은 새 포도주처럼 생명력이 있고 역동적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죽은 전통에 맞지 않다며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해 새 부대가 필요하듯이, 복음을 받아들이려면 새로운 시각이 필요합니다. 변혁하는 복음의 능력에 맞게 고치거나 버려야 할 묵은 통념은 무엇입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저와 같은 죄인을 불러주신 주님을 온 마음으로 영접하며 따르겠습니다. 공동체 _ 교회가 경직된 태도를 버리고 약동하는 복음을 따라 날마다 새로워지게 하소서. 250216 속회지도자 자료 2025-02-12 신내교회 250216 속회지도자 자료.pdf 2월 셋째 주 그룹큐티나눔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누가복음 2:1-20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기쁘다 구주 오셨네(찬송 115장, 구 115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세상에는 좋은 소식이 참 많습니다. 자녀가 태어나는 것이나 승진하는 것도 좋은 소식이고, 목표한 일을 성취하는 것도 좋은 소식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정말 좋은 소식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참 왕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죄와 사망의 어두운 권세를 몰아내시고 생명의 빛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늘의 평화가 이 땅에서 실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베들레헴, 다윗의 동네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전달됩니다(1-14절). 1)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간 이유는 무엇입니까(1-5절)? 로마 황제의 명령에 따라 호적을 등록하러 올라갔다. 가이사 아구스도(Gaius Octavius Thurinus, BC 31-AD 14)는 로마 제국에 의해 수립된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전 세계에 구현하려 한 최초의 황제다. 누가복음은 이런 배경에서 예수께서 가져오는 평화(Pax Christi)를 말하고 있다(눅 2:14). 즉 ‘로마의 평화’와 ‘예수의 평화’를 대조시킴으로써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를 말하려 한다. 그러므로 요셉과 마리아는 로마 황제의 명에 의해 호적하러 베들레헴에 갔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다윗의 자손이 태어날 것에 대한 예언을 성취하러 베들레헴에 간 것이다(참조. 삼상 16:1-13; 미 5:2-5). 로마가 세계를 정복하고 평화를 주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를 통해 조용히 하나님의 평화를 준비하고 계신다.. 2)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해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무엇입니까(10, 11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사가 목자에게 전해준 ‘좋은 소식’(유앙겔리온, 복음)은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신다’는 것이다. 즉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베들레헴에 태어날 거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무엘하 7:12-13; 미가 5:2-5; 이사야 11:1-2, 10; 에스겔 34:23-25; 37:24-28 등 구약 성경에서 이미 예언된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다는 걸 선언한 것이다. 예수님이 참된 메시아이며 오직 그를 통해 구원이 이뤄진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3) 수많은 천군 천사가 찬양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13, 14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 중에 평화로다”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로다”라는 천사의 찬양은, 로마 황제가 세계를 힘으로 정복해서 만든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즉 천사의 찬양은 힘의 통치를 자랑하는 로마 제국에, 진정한 사랑의 평화가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특권층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즉 죄인과 이방인도 예수를 믿음으로 차별 없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나눔 1 요셉은 황제의 명령 때문에 호적을 등록하러 베들레헴으로 갔지만, 사실 그 걸음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메시아이자 진정한 왕의 출생을 준비하는 걸음이었습니다(참조. 미 5:2). 로마 황제로 대표되는 인간 권력자가 아닌 예수님이 진정한 통치자라는 사실이 내게 좋은 소식인 이유를 이야기해봅시다. 나눔 2 예수님은 로마 황제의 영광과 다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로마의 평화와 다른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이루러 오셨습니다. 내가 복음 덕분에 깨닫게 된 하나님의 영광과 누리게 된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그것이 세속의 영광이나 평화와는 어떻게 다른지도 이야기해봅시다. 2. 목자들은 천사들이 들려준 말을 확인하러 갑니다(15-20절). 1)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들은 목자들은 어떻게 행동합니까(15-17절)? 목자들은 즉각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이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했다. 목자는 고대 팔레스타인의 일반적 직업 가운데 하나다. 목자는 양떼나 소떼를 소유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목자들은 밤낮으로 양떼들과 함께 머물면서, 양떼에게 먹을 것과 마실 물을 주고, 도적이나 짐승으로부터 보호했다. 이런 평범한 신분의 목자들에게 복음이 처음 전달된 것이다. 그리고 그 목자들에게 이 복음을 베들레헴에 가서 전달하라고 부탁한다. 목자들은 이 말씀에 즉각 순종한다. 목자들은 천사들이 전해준 말을 온전히 신뢰했다. 그들은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자 경배하고 천사들이 전해준 메시지를 마리아와 요셉에게 전달한다. 복음을 받은 자는 그 은혜의 복음을 나눌 책임이 있다. 2) 목자로부터 ‘좋은 소식’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18, 19절)? 사람들이 다 놀라며 기이히 여겼고,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왜냐하면 이 아이가 메시아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목자가 전해준 말을 마음에 새기고 생각했다. 사실 요셉과 마리아가 목자들보다 먼저 예수 탄생 예언을 받았었다. 마리아가 아직 남자를 알지 못했을 때, ‘성령으로 잉태할 것이며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을 들었고(눅 1:35), 요셉 역시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고 조용히 끊으려 할 때 천사로부터 ‘이는 성령을 통해 이뤄진 일이며 그가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말씀을 들었다(마 1:20-23). 그래서 요셉 부부가 목자로부터 좋은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주신 말씀을 묵상하면서 동시에 장차 이뤄질 구원의 역사를 소망한 것이다. 나눔 3 목자들은 보고 들은 걸 정확하게 전달하고 이 모든 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나는 내가 받은 복음을 누구에게, 어떻게 전하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그리고 복음을 들은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기도합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복음을 풍성히 누리게 하소서. 공동체 _ 죄와 사망으로 어두운 이 시대에 교회가 복음의 빛을 비출 수 있게 하소서. 250209 속회지도자 자료 2025-02-05 신내교회 250209 속회지도자 자료.pdf 2월 둘째 주 그룹큐티나눔 섬길 자를 택하라 여호수아 24:1-18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아 하나님의 은혜로(찬송 310장, 구 410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 때문에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기도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도 가나안 땅에 들어오고 나서 다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만 섬길 것인지, 아니면 풍요를 약속하는 가나안 우상을 섬길 것인지 결단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어려운 결정이 아닙니다. 그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기억한다면 말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이스라엘의 태생부터 성장 과정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1-13절). 1)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다른 신을 섬길 때 하나님은 어떤 일을 시작하셨습니까(2, 3절)? 아브라함을 강(유프라테스) 저쪽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셨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명령한 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세겜 지역, 그리심산과 에발산에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선포한다(신 27:1-26; 수 8:30-35). 그리고 여호수아 24장에서 다시 세겜 언약을 선포한다. 세겜 언약이 시내산/모압 언약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언약들은 아브라함 언약에 기초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여호수아 24장 초두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이방신을 섬기던 곳)에서 부르신 사건이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건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백성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일관성 있게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계승되고 있는지를 세겜 언약이 잘 보여주고 있다. 2)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5-7절)? 애굽에 재앙을 내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그곳에서 건져내셨다. 여호수아 24장에서 세겜 언약을 선포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백성을 은혜로 부르시고 돌보셨는가를 역사적 사실을 통해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난받을 때 그의 백성을 잊고 계셨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여전히 기억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애굽에 재앙을 내리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홍해로 인도하시고 그의 백성은 구원하시되 애굽 백성은 바다로 이끌어 수장시켰다. 세겜 언약은 바로 하나님의 이 구원 역사, 즉 출애굽 은혜에 기초해서 세워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바다에서 건지신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서도 구원하시며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다는 걸 알 수 있다. 3) 가나안 족속이 이스라엘과 싸우려 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11, 12절)? 가나안 족속을 이스라엘 손에 넘겨주시고, 왕벌을 보내어 아모리 족속 두 왕을 쫓아내셨다. 하나님께서 왕벌을 보내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겠다는 약속은 출애굽기 23:28, 신명기 7:20에 기록되어 있다. 여호수아 24:12은 하나님의 이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증명해 보인다. 일반적으로 왕벌은 팔레스타인에 서식하는 말벌(Vespa orientalis)로서 서양의 벌보다 훨씬 더 호전적이며 한번 침에 쏘이면 사람의 신경이 마비될 정도다. 여호수아서에서 왕벌은 가나안 땅에 이미 살고 있던 족속들을 쫓아내는 하나님의 심판 도구에 대한 상징이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이스라엘 백성의 능력이 출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왕벌’(심판의 능력)의 은혜가 컸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 나눔 1 아브라함이 유프라테스강을 건널 때, 또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와 요단강을 건널 때,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강을 건너게 하는 은혜’는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릴 수 없습니다(14-18절). 1)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강력히 촉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14, 15절)? “여호와를 섬길지, 이방신을 섬길지 양자택일하라.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겠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고 이제는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결단하도록 촉구한다. 즉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고자 결단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 때 가능하다. 여호수아는 먼저 자신이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선언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백성들도 하나님만 섬기도록 도전하는 것이다.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특별한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은혜로 돌보고 백성은 마땅히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단하고 그 언약에 책임지며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2) 이스라엘 백성이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16-18절)?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도전에 힘입어 그들도 역시 여호수아처럼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말한다. 백성이 여호수아의 설교에 설득이 된 것이다. 즉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는지를 역사적 사실을 통해 설교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설교를 듣고 초월하신 참 신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인정하며 그 하나님만 섬기기로 마음을 결정한 것이다. 즉 백성들은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말씀이 없다면 신앙의 고백도 생길 수 없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바르게 전달될 때 참된 신앙 고백도 나올 수 있다. 나눔 2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우상을 섬깁니다. 따라서 우리 삶은 언제나 하나님을 섬기느냐, 아니면 우상을 섬기느냐 하는 선택의 연속입니다.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섰던 경험을 나눠보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 이야기해봅시다. 나눔 3 지난날에 하나님이 보이신 은혜와 능력을 기억해야 지금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 내가 새로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눠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않게 하소서. 공동체 _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의로운 길을 선택할 수 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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