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자료
250720 속회지도자 자료
2025-07-16
신내교회
250720 속회지도자 자료.pdf
7월 셋째 주 그룹큐티나눔
달콤한 것이 쓰라리게 되더라도
요한계시록 10:1-11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찬송 432장, 구 462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은 즐겁습니다. 말씀은 성도에게 구원을 약속하고 소망을 안겨 주며, 성도로 하여금 안식을 꿈꾸게 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우리에게 기쁨만 주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이 요구하는 삶을 견지하고 말씀이 명령하는 사명을 수행하는 것은 고생스럽습니다. 말씀에는 단맛과 쓴맛이 모두 있습니다. 말씀의 사람은 말씀 때문에 즐겁고, 말씀 때문에 괴롭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힘센 천사가 두루마리를 들고 나타납니다(1-7절).
1) 힘센 천사의 손에는 무엇이 들려 있습니까?(1-2절)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
이 두루마리는 아마 5:1에 나왔던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일 것이다. 6장부터 8:5까지는 일곱 개의 인이 어린 양에 의해서 하나씩 떼어질 때마다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묘사했다. 10장에 와서 보니 이제 모든 인은 떼어졌고 펼쳐진 상태다.
2) 하나님의 비밀이 지체되지 않고 이뤄질 때는 언제입니까?(6-7절)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뤄지리라” 하신 일은 일곱째 천사가 나팔 소리를 내는 날이다. 이 장면은 이후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부는 11:15-18로 연결된다. 첫 번째 나팔부터 여섯 번째 나팔까지(8:6-9:21)는 모두 재앙과 심판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부는 장면은 색다르다. 하늘에서의 큰 음성과 하나님 앞에 있던 이십사 장로들이 찬양한다. 이 노래의 주제는 간단명료하다. 하나님의 심판이 신자에게는 상을, 망하는 자들에게는 벌을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비밀에 대한 설명도 가능하다.
나눔 1 힘센 천사의 손에는 봉인이 다 떼어진 두루마리가 펼쳐져 있었고, 그는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최종적인 심판이 지체되지 않고 내려질 것이라고 맹세했습니다. 악이 심판당할 날이 예정되어 있으니, 절대로 악에게 굴복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우리를 압박하는 악과 불의는 무엇입니까?
2. 천사는 요한에게 두루마리를 가지라고 말합니다(8-11절).
1) 요한은 천사에게 받은 작은 두루마리를 어떻게 합니까?(10절)
먹어 버렸다.
요한이 두루마리를 먹는 장면은 분명 에스겔의 이야기를 떠올린다(겔 2:8-3:3).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진정한 선지자가 되었다. 그리고 에스겔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경고 메시지를 전했다. 요한도 에스겔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두루마리에 쓰인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았으나, 두루마리에 인봉되었던 일곱 개의 인이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재앙이 있었다는 점에서 에스겔의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겔 2:10)과 비슷하게 추측해 볼 수 있다.
2) 두루마리를 먹었을 때 그 맛은 어떠했습니까?(10절)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은 후에 배에서는 썼다.
두루마리를 먹은 요한은 그것을 먹는 단계와 이후의 단계로 나눠 설명한다. 이는 천사의 예견과 일치한다. 두루마리가 입에 머물 때는 달게 느껴졌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로서 받아들였을 때의 처음 기분과 느낌을 설명한다. 매우 유쾌하고 즐거운 기분이다. 그러나 곧바로 이런 분위기가 전환된다. 두루마리가 배에 머물 때는 쓰게만 느껴졌다. 여기에서 ‘쓰게 하다’(피크라이노)라는 단어가 비유적으로 사용될 때는 ‘분노하게 하다’라는 의미다. 따라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받아들일 때와 이후의 상황이 달라짐을 보여 준다. 그 두루마리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상을 향한 진노의 메시지이기 때문에, 선지자가 쓴 것을 감당해야 하는 순간이 생긴다. 말씀으로 인해서 즐겁기도 하지만, 때로는 말씀 때문에 괴로움을 견뎌야 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3) 두루마리를 먹은 요한에게 천사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11절)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천사는 요한에게 ‘다시’ 예언할 것을 명령한다. 이것은 앞서 요한이 예언했다는 것을 전제한 말이다. 2-3장에 나오는 것과 같이 먼저 요한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보낸 것을 앞서는 예언으로 여긴다면, 10:11에서 다시 예언하는 대상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으로 언급된다. 여기에서 심판 메시지의 성격으로 미뤄 짐작하건대 예언을 받는 대상은 세상과 연합하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있다. 요한의 메시지는 심판의 대상에게까지 확대된다. 아마 요한의 배에서 말씀이 쓰게 된 것은 이들로 인함일 것이다. 세상과 연합하는 사람들을 향한 분노가 일어났을지 모른다.
나눔 2 하나님의 말씀엔 두 가지 맛이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깨달을 때는 달콤한 즐거움을 맛보지만, 말씀을 실천하려고 하면 어그러진 현실 때문에 쓰라린 고통을 견뎌야 합니다. 내가 맛본 말씀의 단맛과 쓴맛을 이야기해 봅시다.
나눔 3 두루마리를 먹은 요한에게 천사는 “다시 예언해야 한다” 하며 사명을 일러 주었습니다. 말씀에 예고된 구원의 날을 기다릴 뿐만 아니라 불경건한 세상, 고난이 기다리는 세상으로 가서 먹은 말씀을 전파하라는 의미입니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 어떻게 힘쓰고 있는지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말씀대로 살아가기 힘겨울 때가 있을지라도 잘 견디고 이겨 내게 하소서.
공동체 _ 말씀으로 위로받고 소망을 품을 뿐 아니라 함께 말씀을 전파하게 하소서.
250713 속회지도자 자료
2025-07-09
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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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둘째 주 그룹큐티나눔
고난에 무릎 꿇지 말고 서라
요한계시록 7:1-17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환난과 핍박 중에도(찬송 336장, 구 383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요한계시록은 주후 1세기 말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기록되었습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을 ‘우리의 주와 하나님’으로 부르게 하고, 이를 거절한 자들을 잔인하게 처벌했습니다. 재판장에 끌려온 그리스도인들은 황제를 신으로 고백하면 살 수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이를 거절하여 추방당하거나 처형당했습니다. 고난 앞에 무릎 꿇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는 교회의 역사 곳곳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들의 고난과 희생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천사가 하나님의 종들에게 인칠 때까지 재앙이 멈춥니다(1-8절).
1) 땅의 네 모퉁이에 서 있는 네 천사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1절)
바람이 불지 못하게 했다.
1절과 2절 모두 천사가 등장하지만 그들이 하는 역할은 다르다. 1절에 등장한 네 천사는 땅의 사방에 선다. 이 표현은 고대 시대의 우주관을 반영했음은 물론이거니와 아마 땅으로 상징되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네 천사가 땅의 사방에 서 있다는 것은 빠진 곳이 없음을 보여 준다. 바람은 ‘해로운 일’을 의미한다. 2절에 따르면 네 천사는 본래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단지 그 임무를 수행하기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을 뿐이다.
2) 다른 천사(2절)가 나타나 무엇을 하려 합니까?(3절)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려 한다.
다른 천사가 등장한다. 새로 등장한 이 천사는 네 천사에게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 칠 때까지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요청한다. 본문에서 ‘인’을 친다는 것은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하나님)의 이름’을 이마에 기록하는 것과 관련된다(14:1). 그리고 네 천사가 세상(땅과 바다)에 해를 끼칠 때에 그 해로움에서 인 침을 받은 사람들은 제외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인 침을 받은 사람의 수가 144,000명으로 제시된다. 이 수는 12개 지파에서 각기 12,000명씩 모인 값이다. 12×12×1000이라는 점에서 이 숫자는 상징적이다. 아마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을 뜻하는 듯하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위험과 재앙 속에서도 안전하게 보호하신다.
나눔 1 하나님은 자신을 신실하게 믿는 이들의 이마에 인을 치기까지 재앙의 바람을 붙잡아 두십니다. 악인에게 최종 심판을 내리시기 전까지 고난의 현실을 겪어야 하는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인침으로 자기 소유로 확증하십니다. 하나님의 소유로 확정되었다는 사실이 오늘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2. 흰 옷 입은 큰 무리와 모든 천사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합니다(9-17절).
1) 흰 옷 입은 자들은 누구입니까?(14절)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다.
장로는 9절에 등장한 흰옷 입은 자들을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고 설명한다. 이 단락에 대한 해석에는 상이한 견해들이 존재한다. 먼저는 3-8절에 나오는 인 침을 받은 144,000명과 흰옷 입은 자들이 다르다는 입장이다. 인 침을 받은 숫자가 144,000명으로 명확하게 규정되나 흰옷 입은 자들은 능히 셀 수 없다는 점에서, 인 침을 받은 자들이 재앙을 당하지 않도록 인 침을 받았는데 흰옷을 입은 자들은 큰 환난을 경험했다(순교자)는 점에서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비록 표현은 다르나 같은 무리를 묘사했다고 보는 견해다. 이런 견해는 본문의 내용을 객관적인 사실로 규명하려고 하기보다는 전달하려고 하는 의미에 관심을 기울인다. 양쪽 견해가 일리가 있겠지만 요한계시록을 너무 문자적으로 접근할 때 오는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후자의 견해가 그런 점에서 유익하다. 모든 신자는 큰 환난을 경험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인 침이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보여 준다면, 동시에 모든 신자는 애굽에서의 탈출이라는 고난과 환난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께 찬양을 돌릴 수 있음을 보여 준다.
2)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면, 그들은 어떤 혜택을 입습니까?(15-16절)
다시는 주리지 않으며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않는다.
15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다채롭게 묘사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머문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집에 거할 것이다. 이 장막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은 16절을 통해 강화된다.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있는 이들은 굶주리지 않을 것이다. 태양의 열기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해로움도 이 장막을 뚫지 못할 것이다.
3)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과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17절)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어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15-16절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보여 준다면, 17절은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보여 준다. 예수께서는 양 떼를 인도하는 목자가 되어 주실 것이다. 그는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인도는 백성을 위한 위로의 길로 향한다.
나눔 2 지상의 교회, 곧 이 땅에 사는 성도는 큰 환난을 겪습니다. 그럼에도 인내하며 믿음을 지킵니다. 하나님의 소유로 인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겪는 어려움과 슬픔은 무엇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삶의 지향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나눔 3 하나님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고난을 견디고 믿음을 지킨 성도를 영접하시고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시는 날, 성도는 완전한 평화와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그날을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지, 가장 기다려지는 부분은 무엇인지 서로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고통과 환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게 하소서.
공동체 _ 하나님과 어린양이 마련하신 구원과 안식을 함께 소망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50706 속회지도자 자료
2025-07-01
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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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첫째 주 그룹큐티나눔
그때처럼 지금도 살기를
요한계시록 2:1-7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주의 피로 이룬 샘물(찬송 266장, 구 200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로마 제국은 황제 숭배를 강요하며 교회를 압박해 옵니다. 박해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것은 점점 힘들어집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상황에 처한 교회를 위한 책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 너머 그리스도의 통치를 보게 함으로써 믿음을 견지하도록 권면합니다. 소아시아에 보내는 편지로 시작되는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시의적절합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십니다(1-3절).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시는 이는 누구입니까?(1절)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는 장면은 앞서 1:12-16에 묘사되었기에 요한에게 말씀하시는 예수시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1:20에서 일곱 금 촛대는 요한이 편지를 보내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앙겔로이)를 뜻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 ‘사자’(혹은 ‘천사’)를 교회의 지도자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지 모른다. 다만 요한계시록이 이 단어를 계속해서 사용하면서 천상의 존재인 ‘천사’로 소개한다. 그런 점에서 천사(앙겔로이)는 지상의 교회와 천상을 연결하는 고리다. 당시 교회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였을 뿐 건물로서 교회당이 없었던 만큼 교회의 이미지를 요한계시록은 천사의 이미지를 통해 전달한다.
2) 에베소 교회가 행한 수고와 인내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2-3절)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 참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않은 것
에베소 교회가 행한 수고와 인내에 대해서 언급은 되어 있으나, 정작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의 서신들에 나오는 일반적인 교회의 문제들에 대한 대처와 비슷하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교회에는 거짓 교사와 같은 문제의 소지가 있는 이들이 언제나 있었고, 그에 대한 교회의 검증 과정도 있었다. 이런 검증 과정에는 수고와 인내가 동반된다.
나눔 1 주님은 진리를 지키기 위해 분투한 에베소 교회의 수고와 인내를 알고 칭찬하셨습니다. 나와 우리 공동체가 주님을 위해 애쓰는 것, 주님이 보시고 칭찬하실 모습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2.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십니다(4-7절).
1) 에베소 교회가 책망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4절)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다.
‘처음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견이 분분하다. 누군가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아니면 교회 성도 간의 사랑이라고, 혹자는 복음을 전하는 열정이라고 해석한다. 에베소 교회가 거짓 교사와 같은 이들을 철저하게 검증했다는 점에서 누군가를 영접하고 환영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칭찬받던 일이 의도치 않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러한 영향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 성도 간의 사랑, 복음을 전하는 열정 중 무엇인가에 악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특별히 기독교에 대한 박해 상황이라면 다른 사람에 대한 불신과 복음 전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2) 에베소 교회가 잘못된 행위에서 돌이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5절)
처음 행위를 가져야 한다.
잘못을 수정하는 일은 간단하다. 처음과 같이 칭찬받던 일을 지속하면 된다. 다만 문제는 처음 행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를 살펴야 하지만 그 지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개인이든 공동체든 삶(행동)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변질된 이유가 내적인 부분인지, 외적인 부분인지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결국 스스로 변질된 이유를 찾는 과정이다. 이것이 회개의 시작이다.
3) 에베소 교회가 칭찬받은 부분은 무엇입니까?(6절)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한 것
요한계시록은 2:14-15에서 니골라당을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과 연결시켜 설명해 준다. 이런 점에서 니골라당을 혼합종교의 모습을 가졌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러한 추측이 맞는다면 니골라당은 기독교와 로마 종교를 교묘하게 섞어서 신앙을 가르쳤을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우상숭배를 문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신앙이라면 기독교는 박해받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박해를 받은 주요한 이유가 황제 숭배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베소 교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행히 기독교 신앙의 기본기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눔 2 에베소 교회는 훌륭한 공동체였지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려서 불거진 문제가 있다면 서로 나누고, 어떻게 하면 사랑의 행위를 되찾을 수 있을지 이야기해 봅시다.
나눔 3 에베소 교회는 칭찬뿐만 아니라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시정명령도 받았습니다. 사랑의 문제 외에, 우리 공동체가 주님께 칭찬받는 교회가 되기 위해 개선해야 할 점이 있다면 이야기해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잃어버린 신앙의 열정과 기쁨을 다시 경험하게 하소서.
공동체 _ 주님을 사랑하고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50629 속회지도자 자료
2025-06-25
신내교회
250629 속회지도자 자료.pdf
6월 다섯째 주 그룹큐티나눔
레위인의 거룩한 직무
역대상 23:1-32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나 맡은 본분은(찬송 595장, 구 372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이스라엘 가운데 레위 지파는 유일하게 땅을 분배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 되셨습니다. 그들에게만 성막에서 하나님을 위해 전적으로 봉사하는 직무를 맡기신 것입니다. 레위인은 성막을 운반하고 설치하는 일, 성막에서 제사장과 협력하여 제사와 예배 활동을 돕는 일, 성막이 부정해지지 않도록 경비하고 보호하는 일을 전담했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건축하면서 이동식 성막 시대가 끝나고 고정식 성전 시대가 열리면, 레위인들은 이전에 하던 일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새 시대, 새 환경에 맞게 직무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다윗은 레위인을 세 종족으로 구분하여 조직합니다(1-23절).
1) 레위인들은 직무에 따라 어떻게 나뉩니까(4, 5절)?
성전 일을 보살피는 자, 관원과 재판관, 문지기, 찬송하는 자
레위 지파는 크게 1) ‘제사장들’과 2) ‘레위 사람들’로 구분된다(2절). 그리고 ‘레위 사람들’은 다시 네 개의 직무군으로 조직된다(4-5절). 즉 1) 24,000명의 성소 봉사자, 2) 6,000명의 행정·사법 관리, 3) 4,000명의 성전 문지기 4) 4,000명의 찬송하는 음악가다. 역대상 23-27장은 이 네 개의 직무를 맡은 레위인의 주요 가문 명단과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서술하고 있다. 즉 역대상 24:1-31은 성소 봉사자(제사장과 레위인), 25:1-31은 찬송하는 음악가, 26:1-19은 성전 문지기, 26:20-27:34은 성전 밖에서 행정, 사법(재판)적인 일을 담당하는 관리에 관한 내용이다. 성전(건물) 시대가 되면서 레위인의 직무가 종교, 교육, 사법, 행정 다방면에 걸쳐 확대되었다.
2) 다윗은 어떤 족속을 중심으로 레위 지파를 조직합니까(6-23절)?
① 7-11절: 게르손 자손
② 12-20절: 그핫(고핫) 자손
③ 21-23절: 므라리 자손
광야 시대에 게르손 자손은 주로 성막과 장막, 그 덮개, 회막 문장, 뜰의 휘장 및 성막과 단 사면에 있는 뜰의 문장과 줄들을 맡았다(민 3:25-26). 그핫 자손은 증거궤, 진설상, 등잔대, 제단과 성막의 비품들을 보호하고 옮기는 업무를 맡았다(민 3:31). 므라리 자손은 성막의 널판과 기둥, 받침 등 무거운 기물을 옮기는 일을 맡았다(민 3:36-37). 그런데 이동식 성막에서 고정식 성전으로 바뀌면서 이런 직무들은 변화를 맞을 수밖에 없다(26절).
나눔 1 레위 지파는 게르손, 그핫, 므라리 세 족속으로 조직되어 역할을 부여받습니다. 어떤 이는 성전 제사 업무, 어떤 이는 행정과 사법 업무, 또 어떤 이는 찬양대로서 업무를 수행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역할을 분담하고 유기적으로 합력하여 사역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지 서로 나눠봅시다.
2. 다윗이 모세처럼 레위인을 조직하고 그들에게 해야 할 역할을 분담합니다(24-32절).
1) 다윗은 레위 자손의 사역 시작 연령을 몇 세에서 몇 세로 조정합니까(3, 24절)?
30세에서 20세로
역대상 23:3에서 레위 사람이 30세 이상으로 계수된다. 이는 광야 시절 성막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의 연령이 30-50세인 것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참조. 민 4:3, 47). 민수기 8:24에서는 레위인이 25세에 회막에 들어가 봉사할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5년 정도 견습생 기간을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역대상 23:24을 보면 성전에서 섬기는 자들의 연령이 20세로 하향 조정된다. 포로기 이후에는 실제로 성전에서 봉사 업무 연령이 20세로 하향 조정된다(대상 23:24; 대하 31:17; 스 3:8). 포로기를 거치면서 레위인의 수는 줄지만, 성전 및 행정 업무는 더 많아져서 봉사 연령이 20세로 하향 조정된 것으로 보인다.
2) 다윗 왕국 시대에 레위인에게 더 이상 요구되지 않은 업무는 무엇입니까(25, 26절)?
성막과 그 가운데 쓰는 모든 기구를 메는 일
광야 시절 성막은 이동식이기에 레위인이 성물을 멜 필요가 있었지만, 성전이 고정된 이후에는 더 이상 성물을 이동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성물을 메는 업무가 사라진 것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레위인의 해야 할 봉사 업무도 변화가 일어났다.
3) 다윗이 예루살렘 성전 시대에 걸맞게 지정한 레위인의 업무는 무엇입니까(28-32절)?
① 28절: 아론의 자손(제사장)을 도와 성전에서 섬기는 일
② 29절: 하나님께 바치는 떡을 굽고 반죽하는 일, 저울질하고 자로 재는 일
③ 30절: 아침과 저녁마다 여호와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
④ 31절: 절기에 여호와께 번제 드리는 일
⑤ 32절: 회막의 직무, 성소의 직무, 제사장을 도와 성전에서 수종드는 일
레위인의 직무가 성막 시대에는 성물을 관리하고 이동하는 업무에서, 성전 시대에는 제사장들을 도와 성전과 뜰과 골방에서 섬기는 일, 모든 성물을 정결하게 하는 일, 진설병을 굽는 일, 여호와께 찬송하는 일 및 성전에서 수종드는 일로 그 중심과 방향이 바뀌게 된다. 시대가 변해도 성전의 존재 이유는 변함이 없지만, 성전 봉사의 형식과 제도는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예배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정신과 원리는 변함이 없지만, 그 시대와 문화에 따라 예배의 형식과 틀은 바뀔 수 있다.
나눔 2 다윗은 봉사 인원을 확보하기 위해 레위인의 봉사 시작 연령을 30세에서 20세로 낮추고, 성전에서 할 업무를 새롭게 지정합니다. 우리 공동체의 조직과 직무 중에 본질과 정신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시대와 상황에 맞게 달라져야 할 것은 없는지 생각해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나에게 맡겨진 하나님 나라 사역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게 하소서.
공동체 _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데 최적의 체계를 갖추게 하소서.
250622 속회지도자 자료
2025-06-18
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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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넷째 주 그룹큐티나눔
영원한 언약
역대상 17:1-15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내 주의 나라와(찬송 208장, 구 246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다윗은 편안한 집에 거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장막 아래 있다는 사실이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모든 힘을 다해 하나님의 집을 짓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이런 생각에 제동을 거시고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어떤 건물이나 장소에 예속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으로 자유로우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그분의 선하신 뜻에 따라 다윗의 자손을 통해 그의 나라를 영원히 보존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영원한 언약을 따라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다윗은 선한 마음으로 성전 건축을 계획했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1-6절).
1) 언약궤가 성전(건물)이 아닌 성막(텐트)에 있다는 사실로 다윗이 괴로워하자, 나단은 어떻게 조언합니까(1, 2절)?
“하나님이 왕과 함께하시니, 왕은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소서.”
역대상 17장의 병행 본문인 사무엘하 7:1에는,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라는 내용이 부가되어 있다. 사무엘하 7:1에 의하면 다윗이 성전을 짓고 싶은 마음이 들 때는, 어느 정도 주변 대적을 다 물리쳤을 때며, 왕궁을 짓고 편히 거할 때다. 그러므로 다윗이 성전을 짓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다윗의 이런 생각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도 다윗의 생각을 흡족하게 여기며 왕이 생각한 대로 진행하면 좋겠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나단이 한 가지 실수한 게 있다. 그것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는 일이라도 하나님께 여쭤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단은 선지자로서 하나님께 여쭤보지도 않고 바로 다윗의 생각에 동조했다.
2) 다윗이나 나단의 예상과 달리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3-6절)?
백향목 집이 필요 없다고 하시며 성전을 건축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나단은 다윗의 계획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되어 하나님께 여쭙지도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먼저 나단에게 말씀하신다. 이는 다윗 왕의 성전 건축 계획에 급히 제동을 걸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매우 단호하게 성전 건축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은 출애굽 이후 사사 시대에 이르기까지 장막(텐트) 가운데 거하시는 것에 불평한 적이 없고, 또한 성전을 건축해 달라고 요구한 적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건 하나님은 건물이나 텐트에 갇혀 거주의 제약을 받는 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성막이든, 성전이든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을 다 담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건물이 아닌 텐트에 임재하는 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눔 1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해 보이는 일이라도 지레짐작하지 말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여쭤봐야 합니다. 어떻게 주님의 뜻을 묻고 발견하고 있는지 서로 나눠봅시다.
2.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집을 지어주십니다(7-15절).
1)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건축하려는 다윗에게 도리어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하십니까(7-10절)?
다윗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정착하여 다시는 옮겨 다닐 필요가 없게 하며, 모든 대적이 굴복하게 하고, 다윗을 위해 한 왕조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건축의 주체에 대한 관점을 바꾸신다. 이제까지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시각을 180도 바꾸신다.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집을 지어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을 목동 시절에 불러서 양 떼가 아닌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주권자)로 세우셨다. 그리고 다윗이 어디로 가든 대적을 이기게 하셨다. 그리고 장차 다윗 왕조를 더욱 견고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집을 건축한다는 시각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집을 지어주신다는 관점으로 바꾸신다. 하나님 나라 역사는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이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 하나님의 집(성전)을 건축하게 하십니까(11, 12절)?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 중 하나를 세워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게 하신다.
다윗의 집을 먼저 건축하신 후, 하나님의 집은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건축되게 하신다. 다윗의 아들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 것이며, 하나님은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성전이 단지 하나님의 물리적 거주 공간이 아니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대적을 이기신 후에 백성들에게 참된 평화의 공간을 선물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간 다윗을 승리의 도구로 사용하셨다면, 장차 솔로몬은 참된 평화를 누릴 왕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참 성전으로 오셔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신 후에,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선물하셨다.
3) 하나님은 다윗에게 어떤 언약을 주십니까(13,14절)?
하나님이 ‘다윗의 아들’의 아버지가 되고,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언약이다.
사무엘하 7:11-14은 나단 신탁 또는 다윗 언약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이 말씀은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 언약만큼 중요한 본문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의 자손을 통해 그의 나라를 영원하게 하실 계획이기 때문이다. 다윗의 자손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며, 하나님은 그를 통해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가 영원하게 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가 되었을 때 성전이 다 무너졌을지라도 다윗 언약만큼은 살아남게 된다. 그래서 포로기 이후 백성들은 다윗의 자손 중 한 분 메시아가 오셔서 그의 나라를 온전히 회복하실 것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된다. 예수님은 바로 그 ‘다윗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셨다(마 1:1).
나눔 2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으려 했지만, 도리어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왕조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할 때에도,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훨씬 더 큰 열정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내가 드린 사랑보다 훨씬 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적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나눔 3 하나님이 다윗의 후손을 통해 하나님의 집과 나라를 세우겠다는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모신 성전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하나님을 위한 성전으로 어떻게 지어져가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나의 열정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주의 일을 감당하게 하소서.
공동체 _ 예수를 믿는 신앙 고백을 기초로 성전 공동체를 건축하게 하소서.
250615 속회지도자 자료
2025-06-11
신내교회
250615 속회지도자 자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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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52pixel, 세로 329pixel" src="file:///C:\Users\illae\AppData\Local\Temp\tmpEC36.jpg" style="width:98ptpx; height:92ptpx" /> 6월 셋째 주 그룹큐티나눔
언약궤를 맞는 자세
역대상 15:1-29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면류관 벗어서(찬송 25장, 구 25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회적 신분과 체면을 위해 자기감정을 표출하지 않고 절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체면치레를 예배에 적용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심을 다해 예배할 분이기 때문입니다.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던 날, 온 백성과 왕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미갈은 이런 왕의 모습을 체통을 지키지 못한 미숙한 행위로 보았습니다. 다윗도 하나님 앞에서는 왕이 아니라, 백성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언약궤 이송을 앞두고, 다윗은 이전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1-15절).
1) 레위인만 언약궤를 메게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2절; 참조. 민 4:15)?
하나님이 레위인(고핫 자손)만 언약궤를 멜 수 있도록 율법에 규정하셨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중심적인 나라가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선한 사업이 1차 시도 때 실패하고 만다. 그 이유는 다윗이 언약궤 이전을 율법 규례에 따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참조. 13절). 다윗은 2차 시도를 하면서 율법 규례대로 레위 지파 중에서 그핫 자손이 언약궤를 직접 메게 한다. 이것은 민수기 4:15의 말씀을 준수한 것이다. 아무리 선한 목표라 할지라도 그 과정이 잘못되었다면 즉시 중지하고 처음부터 다시 바르게 시작해야 한다.
2) 언약궤를 메는 레위인은 자기 몸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12, 14절)?
성결하게 해야 한다.
다윗왕 때에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은 그핫 자손의 담당했지만, 나중에 솔로몬 성전이 건축된 후에는 제사장이 언약궤를 지성소 안으로 메어서 안치한다(대하 5:7). 그런데 다윗은 언약궤를 메는 레위인은 물론 제사장들까지 다 불러서 그들 모두 몸을 정결하게 하도록 한다. 몸을 정결하게 하는 건 물로 깨끗이 씻는 것뿐 아니라 성관계를 맺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참조. 출 19:14-15). 출애굽 언약 백성이 시내산에서 처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처럼, 다윗은 모든 백성이 몸을 정결하게 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맞게 한다.
3) 다윗이 이전에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다가 실패한 이유는 무엇입니까(13절)?
율법의 규례를 어기고 레위인이 언약궤를 메지 않고 수레에 실어 옮겼기 때문이다.
1차 시도 때 다윗은 율법의 규례가 아닌 세속적인 방법을 썼다. 다윗은 새 수레를 준비했다. ‘새 수레’를 준비했다는 것은 다윗의 정성이 지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윗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정성껏 언약궤를 이전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정성이 많이 들어간 일이라 할지라도 말씀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사무엘상 6:7-8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때 ‘새 수레’를 사용했다. 하나님은 다윗이 이방 방식이 아닌 율법에 근거해서 하나님 나라 사역을 하기 원하신다.
나눔 1 아무리 선한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는다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 맡기신 하나님의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 일을 어떤 과정과 방식으로 이루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나눔 2 언약궤를 옮기는 일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접촉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메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 몸을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성결하게 해야 하는지 나눠봅시다.
2. 모두 하나님을 높여 찬양할 때 미갈이 냉소적으로 바라봅니다(16-29절).
1) 다윗은 레위 지파 지도자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립니까(16절)?
“레위인 중에 노래하는 자, 악기를 다루는 자를 세워 즐거운 소리를 크게 내라.”
다윗의 위대한 공적 중 하나가 바로 레위인 중에서 찬양으로 봉사할 자들을 따로 세워 찬양대를 조직했다는 점이다. 다윗은 실제로 찬양시를 직접 지어 부르기도 했다. 다윗은 먼저 왕으로서 찬양의 본을 보일 뿐 아니라, 레위인 중에서 전문 찬양대(악기와 목소리)를 조직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했다(참조. 대상 16:4-8).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백성이 보여야 할 마땅한 태도는 경배와 찬양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도 찬양하지 않는 것은 불신앙이다.
2) 언약궤가 이동할 때 레위인, 백성, 다윗은 무엇을 하며 이동합니까(27-29절; 참조. 삼하 6:14)?
그나냐를 비롯한 노래하는 레위인이 앞장서고, 백성은 크게 부르며 악기를 연주했고, 다윗은 힘을 다해 춤을 추었다.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자 왕, 지도자, 백성 가릴 것 없이 모든 이들이 기뻐하며 춤을 추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지위고하 막론하고 모든 이들이 예외 없이 경배자로 선 것이다. 다윗이 이렇게 기뻐하며 춤을 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왕으로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다윗은 비록 이스라엘의 왕이지만 언약궤가 입성하자 하나님 앞에 한낱 백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춤으로 표현했다. 그러므로 다윗과 백성이 춤을 춘 건 단순히 감정적으로 흥분되어 자아도취 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임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경배의 모습이었다.
3) 사울의 딸 미갈은 다윗이 춤추는 것을 보며 어떤 마음을 품습니까(29절)?
마음에 업신여겼다.
왕이 온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하며 춤을 출 때 미갈은 이를 천박한 일이라며 업신여겼다. 미갈은 언약궤가 들어올 때 찬양하는 예배 공동체에 섞이기보다는 홀로 떨어져 방관적인 비판자가 되었다. 미갈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거다. 다윗은 그런 미갈에게 “나는 백성 앞에서 춤을 춘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춘 것이다”라고 말한다(참조. 삼하 6:20-23). 그리고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교만을 떠는 자는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나눔 3 왕도, 백성도 한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유독 미갈만 이 상황을 냉소적으로 바라봅니다. 체면을 우선시하느라 춤추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을 도무지 공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예배하는 마음을 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하나님이 맡기신 거룩한 사역을 거룩한 방식으로 이루게 하소서.
공동체 _ 교회가 한마음이 되어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250608 속회지도자 자료
2025-06-04
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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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둘째 주 그룹큐티나눔
언약 자손
역대상 3:1-4:43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찬송 559장, 구 305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도 하나님의 약속은 역사 속에서 변함없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통해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오셨습니다. 곧 아브라함, 유다, 다윗, 솔로몬, 스룹바벨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언약 자손의 계보를 통해 이뤄지는 하나님 나라의 구속사입니다. 언약 자손인 우리 역시, 오늘도 세상 가운데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신실하게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이 약속이 실재가 되게 하는 통로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유다 지파의 언약 자손 계보는 포로기 이후에도 지속됩니다(3장).
1) 다윗의 아들 중에 누가 왕위를 이어받습니까(3:5; 참조. 왕상 1:33-35)?
솔로몬
‘밧수아’는 ‘바트(딸)+수아’의 합성어다. 즉 ‘밧수아’는 ‘수아의 딸’이라는 의미다. 창세기 38:2에 의하면 밧수아는 가나안 여인으로서 유다의 아내다(참조. 대상 2:3). 그런데 역대상 3:5의 ‘밧수아’는 밧세바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공교롭게도 다윗의 아내 밧세바 역시 ‘수아의 딸’로 칭해진 것이다. 그리고 솔로몬은 ‘수아의 딸’의 아들로 소개된다. 역대상은 솔로몬이 언약 자손으로 역사에 등장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낳고(마 1:3),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마 1:6). 베레스, 솔로몬, 모두 인간적인 족보로 보면 비천한 소생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언약 계보의 자손으로 편입시킨다. 언약 자손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 수 있다.
2) 여고냐의 자손 중에서 누가 포로 귀환 공동체의 지도자가 됩니까(3:19; 참조. 스 3:8)?
스룹바벨
역대상 3:17-19을 보면, 스룹바벨은 여고냐(여호야긴)의 손자다. 여고냐의 아들이 브다야이고, 브다야의 아들이 스룹바벨이다. 예루살렘 패망과 함께 최후를 맞은 유다의 마지막 왕은 시드기야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법적으로 유다의 마지막 왕을 여고냐(여호야긴)로 기억한다. 왜냐하면 그는 예루살렘이 패망하기 이전에 바벨론 포로가 되었고, 포로가 된 지 37년이 지난 후에는 풀려나서 왕의 지위를 회복했기 때문이다(왕하 25:27-30). 사실 시드기야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서 버티다가 예루살렘 패망과 함께 사라졌지만, 여고냐는 바벨론 포로가 되어서도 ‘소망의 씨’가 된다. 그리고 그 씨가 싹이 나서, 그의 손자 스룹바벨이 지도자가 되어 유대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킨다. 스룹바벨은 유다의 총독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성전 재건에 앞장선다. 그래서 학개와 스가랴 같은 선지자는 스룹바벨에게 메시아적 영광을 부여한다(슥 3:8; 6:12-13; 학 2:21-23).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스룹바벨의 메시아적 이상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언약 자손으로 오셨다(마 1:12, 16).
나눔 1 비록 여고냐(여호야긴)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지만,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잇는 마지막 왕입니다. 그의 후손인 스룹바벨(참조. 스 3:2, 8)은 백성이 유배지에서 돌아올 때 지도자(총독)가 됩니다. 시대는 변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없이 성취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 속에서 변함없이 이뤄가시는 약속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은 백성의 결핍과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4장).
1) ‘고통’이라는 이름을 안고 태어난 야베스는 어떤 기도를 드립니까(4:9, 10)?
“나에게 복을 주시어 지역을 넓혀 주시고 나를 도우사 환란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소서.”
야베스는 그의 어머니가 난산 끝에 낳은 아들이다. 그래서 ‘오체브’(‘고통’)에서 ‘야베스’(히. ‘야베츠’)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야베스는 태어날 때부터 고통이라는 이름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야베스는 이런 자신의 이름을 한탄하지 않고 하나님께 “내 지경을 넓혀 주시고, 나를 도우사 환난에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적극적으로 기도한다. 야베스의 기도는 축복을 받기 위해 정형화된 기도문이 아니다. 역대기 저자는 포로기 이후 좁아진 땅에서 살아가는 유다 백성이 열악한 현실에 한탄하지 말고 야베스처럼 신실하게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주려 하고 있다.
2) 하나님은 야베스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십니까(4:10)?
야베스가 간구하는 것을 허락하신다.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야베스는 숙명론에 빠져 자기 이름만 한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어려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은 그런 야베스의 적극적인 기도를 받으시고 그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야베스의 기도가 축복을 받기 위한 주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야베스의 기도는 우리가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함부로 절망하지 말고,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을 붙들라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3) 유다 지파 영역 안에서 비좁게 살던 시므온 지파 일부는 어떤 행동을 합니까(4:39-43)?
시므온 지파 일부가 ‘그돌’과 ‘세일산’을 새로 개척하여 이주한다.
시므온 지파는 가나안 정복 전쟁 후 땅을 분배받을 때 유다 지파 경내에서 땅을 분배받았다(참고. 수 19:1-9). 즉 시므온 지파 사방이 유다 지파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서 시므온 지파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유다 지파로 흡수 병합된다. 그런데 38-43절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도 시므온 지파 일부 사람들이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면서 생명력 있게 시므온 지파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특수 사례를 보여준다. 이런 시므온 지파의 적극적인 개척 역사를 역대기가 강조한 이유는 포로에서 돌아온 언약 자손이 열악한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다시 일어나도록 권면하기 위해서다.
나눔 2 야베스는 ‘고통’이라는 자기 이름에 매이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인생을 새롭게 개척해나갑니다. 혹시 운명처럼 체념하며 받아들이는 나의 매임은 무엇입니까? 낙망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간구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나눠봅시다.
나눔 3 시므온 지파는 애초에 유다 지파 영역 안에서 땅을 분배받았기에, 대부분의 백성이 유다 지파로 흡수됩니다. 그런데 일부는 새로운 지역을 개척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이어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새롭게 개척해야 할 비전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고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게 하소서.
공동체 _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기도하며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게 하소서.
250601 속회지도자 자료
2025-05-28
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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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첫째 주 그룹큐티나눔
배우고 본 바를 행하라
빌립보서 4:1-9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찬송 455장, 구 507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최고의 가르침은 삶으로 진리를 증명해 보이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이의 모범적인 삶보다 더 좋은 교본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 “너희가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말합니다(빌 3:17; 4:9). 바울은 가슴으로 교회를 품고 사랑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으로 세워지길 바랍니다. 특히 교회 동역자 간에 작은 이견으로 갈등하지 않고 화해하며 한마음으로 연합하길 부탁합니다. 공동체가 하나 되어 참된 진리 안에 거할 때 성도는 참된 평강을 누립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바울은 지체들이 사랑으로 하나 되길 바라며 권면합니다(1-3절).
1) 바울이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권면한 것은 무엇입니까(2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바울이 빌립보 성에 처음 들어갔을 때 ‘유대인 회당’이 없어서(유대인 남자 10명이 없다는 반증), 기도처를 찾기 위해 성문 밖 강가로 나갔다(참조. 행 16:11-15). 그곳에서 바울은 한 무리의 여인들을 만나 복음을 전했는데 그중에는 두아디라 시의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도 있었다. 아마도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이때 만난 여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바울은 그 여인들을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이들’이라고 칭찬한다. 하지만 어떤 영문인지 그들 사이에 불화와 갈등이 생겼다. 바울은 이미 빌립보서 2:1-5에서 교회가 분열하거나 당파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권면한 바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당부한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에 서로 의견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주 안에서 한마음을 품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바울은 ‘멍에를 같이한 (동역)자’에게 무엇을 부탁합니까(3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유오디아와 순두게)이 같은 마음을 품도록 도우라.”
‘멍에를 같이한 자’는 헬라어로 ‘쉬쥐고스’이다. ‘쉬쥐고스’는 ‘참된 동료, 멍에를 함께 지는 사람, 활동의 부담을 나누는 동료’라는 의미가 있다. ‘쉬쥐고스’를 인명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이 이름이 성경에 밝혀져 있지는 않다. 그래서 ‘멍에를 같이한 자’를 일반 명사로 이해하고 바울의 믿을 만한 동역자로 보는 게 적절해 보인다. 공동체 안에 갈등이 생길 때 그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할 동역자가 필요하다. 좋은 중재자가 있다면 공동체 내의 갈등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공동체를 더 굳건히 세울 수 있다. 바울은 둘 사이를 지혜롭게 중재할 신실한 동역자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화평케 하는 사명’을 맡겼다.
나눔 1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영문인지 긴장 관계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다시 한마음이 되어 관계를 회복하도록 중재합니다. 공동체에 생긴 오해와 갈등을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해봅시다.
2. 바울은 교회 공동체가 주의하고 실천해야 할 일을 가르칩니다(4-9절).
1) 바울이 반복해서 권면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유독 ‘기쁨’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빌 1:18; 2:17, 18, 28; 3:1; 4:4, 10). 바울은 심지어 자신에게 불이익을 줄 목적으로 복음 전도에 더 열을 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기쁨을 잃지 않았다(1:18).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 나라가 발전하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마지막 자신의 목숨까지 순교의 제물이 될지라도 기뻐하겠다고 한다(2:17). 바울은 주 안에서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렸기에 공동체 구성원들에게도 기뻐하라고 권면할 수 있었다. 역설적으로 감옥 안에 있는 바울이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며 위로한다. 참된 기쁨은 환경에 영향받지 않는다. 주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고 기뻐할 수 있으며, 그 기쁨 바이러스를 주위에 전염시킬 수 있다.
2) 염려가 생길 때 기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6, 7절)?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염려’가 아예 없을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권면했다(참조. 마 6:25-34).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염려에 너무 사로잡혀 믿음까지 포기한다면 그것은 정말 큰 문제다. 그리스도인이 염려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의 처음과 끝은 ‘감사’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며 감사해야 하고, 확신을 가지고 감사로 간구해야 한다. 주님은 그런 기도의 사람을 평강으로 지키실 것이다.
3) 빌립보 교회가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① 생각해야 할 것(8절):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받을 만한 것, 칭찬받을 만한 것, 덕스러운 것
② 실천해야 할 것(9절): 바울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하늘 시민’이라는 걸 이미 말한 바 있다(빌 3:20). 그러므로 하늘 백성은 세상 사람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정직하고, 경건하며, 공정하고, 정결하며, 사랑받고, 칭찬받으며, 덕스러운 일을 생각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은 이미 바울로부터 보고 배운 것들이다. 바울은 배우고 익힌 그것들을 삶 속에서 실천하라고 권면한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성경적 세계관을 수립하고, 그 세계관에 따라 경건한 삶을 살아가야 할 존재다.
나눔 2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염려와 근심이 늘어납니다. 기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여서 그의 생각과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지금 근심하고 염려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기도를 통해 평안을 누린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나눔 3 그리스도인은 항상 진리를 사모하고 경건한 삶을 유지하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칭찬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을 위해 생각하고 배우고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요즘 나의 경건 생활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늘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여 주 안에서 참된 기쁨과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공동체 _ 지체들과 작은 이견으로 갈등하지 말고 서로 이해하며 하나 되게 하소서.
250525 속회지도자 자료
2025-05-22
신내교회
250525 속회지도자 자료.pdf
5월 넷째 주 그룹큐티나눔
생명을 구하는 조서
에스더 8:1-17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너 시험을 당해(찬송 342장, 구 395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유다인을 모두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던 하만이 죽고 그의 가문도 멸망했습니다. 에스더가 하만의 집을 차지하고, 모르드개는 하만이 하던 역할을 대신하게 됩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해결된 것 같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멈추지 않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에스더가 왕에게 유다인을 죽이라는 조서를 철회해달라고 간청합니다(1-8절).
1) 하만이 죽은 뒤, 아하수에로왕은 모르드개에게 무엇을 맡깁니까(2절)?
하만에게서 거둔 왕의 반지
하만은 모르드개에 대한 앙심을 갚고자 왕에게 거짓으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않는 민족을 처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왕은 하만을 신뢰하여 그에게 왕의 반지를 빼주었다(3:8-10). 고대 세계에서 왕의 반지는 도장 역할을 했다. 반지는 음각 또는 양각의 방식으로 왕의 권위를 표현하는 내용으로 조각되었다. 따라서 왕의 반지를 받아 든 하만은 유다인 학살을 조장하는 조서를 쓰고 왕의 반지로 도장을 찍었다. 그랬던 왕의 반지가 이제는 모르드개에게 왔다. 자신을 죽이고 유다인을 학살하려던 반지를 모르드개는 과연 어떻게 사용할까?
2) 에스더가 왕에게 유다인을 처형하라는 조서를 철회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왕은 무엇이라 대답합니까(8절)?
“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칠지어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음이니라.”
왕은 자기 반지로 인 친 조서를 누구도 철회할 수 없다고 못 박듯이 말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이전의 조서를 취소하겠다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지만 왕은 이를 거절한다. 왕의 권위 문제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왕후 와스디의 문제가 거론되었을 때도 ‘조서를 내리되 바사와 메대의 법률에 기록하여 변개함이 없게 하라’(1:19)고 언급했던 것으로 봐서 한번 내려진 조서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엄격함이 담겨 있다. 그러나 왕의 명령은 단호하면서도 동시에 모호하다. 하만이 쓴 조서를 철회할 수는 없지만 하만이 한 행동에 대해서 이제는 더 이상 동의하지 않는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모르드개가 왕의 반지로 새로운 조서를 쓸 수도 있다고 암시를 준 것이다.
나눔 1 하만은 죽었지만 그가 작성한 유다인 학살 조서는 아직 효력이 남아 있습니다. 에스더는 남아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멈추지 않습니다. 여기서 멈출 수 없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완성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2. 모르드개는 유다인 스스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새로운 조서를 씁니다(9-17절).
1) 모르드개가 새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친 조서에서 유다인은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누구를 공격할 수 있습니까(11절)?
각 지방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유다인을 치려 하는 자들과 그들의 처자(가족)
모르드개는 하만의 조서를 무력화하는 새로운 조서를 만든다. 이 조서의 핵심은 하만의 조서에 따라서 유다인을 학살하려는 이들에 맞서서 유다인 스스로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을 구하라는 것이다. 하만의 조서가 1월에 먼저 전국에 알려졌다. 조서에 적혀 있는, 유다인을 학살할 수 있는 날은 12월 13일 하루였다. 이것으로 유다인에 대한 학살은 예고되었다. 살해의 위협 속에서 시한부 인생처럼 12월 13일을 무기력하게 기다려야 했다. 그런 점에서 모르드개의 조서는 유다인에게 사는 방법을 만들어준 것이다(3월 23일). 유다인은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에게 대항할 수 있다. 학살하려는 자들과 그들의 가족에게까지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2) 유다인에게 조서의 내용이 허락된 날은 언제입니까(12절)?
아달월(십이월) 십삼일 하루 동안
12월 13일은 하만이 유다인을 죽이라고 명령했던 날이다. 즉 모르드개는 유다인을 학살할 수 있는 날에만 방어하고 대항할 수 있도록 조서를 쓴 것이다. 9:13-15에 따르면 왕이 에스더에게 호의를 베풀어 유다인을 학살하려는 자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기간을 하루 더 연장받게 된다. 다만 수산에 사는 유다인에 한정된다. 하지만 모르드개가 처음 조서에 명시한 날짜는 12월 13일 하루였다. 자신들을 향한 학살이 예고된 날이었다. 처음부터 그 이상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3) 모르드개는 왕 앞에 다시 설 때 무슨 옷을 입습니까(15절)?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었다.
모르드개는 이제 애통하며 입었던 베옷(4:1)을 벗고 고귀한 옷을 입었다. 애통의 옷이 기쁨의 옷으로 변화된 것이다. 모르드개가 입은 푸르고 흰 조복, 자색 가는 베 겉옷을 통해 그의 지위가 더 높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금관은 왕의 호의일 뿐 그가 왕이 된 것은 아니다. 삶이 역전되었다. 단순히 모르드개의 삶만 역전된 것이 아니다. 모든 유다인의 삶이 역전되었다. 물론 이 역전의 배경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우리는 안다.
나눔 2 하만이 꾸미고 많은 사람이 동조한 유다인 멸절 계획이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우연의 연속 같고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업적처럼 보이지만, 배후에는 유다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나를 위기에서 건지신 하나님, 나의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신 하나님을 나눠봅시다.
나눔 3 곤고와 애통을 상징하는 굵은 베옷을 입고 대성통곡하던 모르드개(4:1)가 이제는 고귀한 사람만 입을 수 있는 자색의 가는 베옷을 입었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된 것입니다(9:22). 하나님이 슬픔의 옷을 기쁨의 옷으로 바꿔주신 일이 있다면, 혹은 그런 일을 지금 간구하고 있다면 서로 이야기해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슬픔의 날이 기쁨의 날이 되기까지 하루하루 기도하고 견디며, 용기를 잃지 않게 하소서.
공동체 _ 생명을 구하는 일에 함께 힘을 모으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50518 속회지도자 자료
2025-05-14
신내교회
250518 속회지도자 자료.pdf
5월 셋째 주 그룹큐티나눔
스스로 입은 베옷
에스더 4:1-17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내 맘이 낙심되며(찬송 300장, 구 406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왕의 총애를 받는 하만은 모르드개뿐 아니라 온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유다인을 죽이려 합니다. 왕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하만은 왕의 이름으로 아달월 십삼일에 모든 유다인을 죽이라는 조서를 작성합니다(3:10-14). 사비를 들여서라도 이 일을 꼭 이루려 합니다(3:9). 그가 작성한 조서 내용이 유다인들에게 알려지자, 모두 근심에 싸입니다(3:15).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모르드개가 굵은 베옷을 입고 대궐 문 앞에 있다는 소식을 왕비 에스더가 듣습니다(1-9절).
1)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도착하자, 유다인들은 어떤 행동을 합니까(3절)?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했다.
하만은 모르드개에 대한 앙심으로 모든 유대인을 학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왕이 승인했고, 그 계획이 담긴 조서가 페르시아의 각 지방까지 도달했다. 유대인을 죽이려는 날이 아직 많이 남았음에도 조서의 내용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날을 위하여 준비하게 하라’(3:14)는 요청은 분명 유다인을 학살하려는 사람들에게 한 말이지만, 유다인도 그날을 위하여 준비한다. 각 지방에 있는 유다인들은 자신들에게 예정된 이 엄청난 폭력에 크게 애통하기 시작했다. 유다인의 문화에서 애통은 금식과 굵은 베 옷 입기 그리고 재를 머리에 뿌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모르드개도 동일하게 애통하기 시작했다. 단지 그가 궁궐 문 앞에서 애통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2)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알려준 것은 무엇입니까(7, 8절)?
모르드개가 당한 일,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기 위해서 왕의 금고에 바치기로 한 은의 정확한 액수,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 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
모르드개가 궁궐 문 앞에서 애통한다는 소문은 곧 왕비 에스더에게까지 전해졌다. 애통을 상징하는 베옷을 입고는 궁궐에 들어갈 수 없었다. 분명 모르드개는 왕실에서 일하는 관직을 받았던 것 같다(2:19). 그가 어떤 관직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베옷을 벗으면 궁궐 안으로 들어가서 왕에게 호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왜 애통한 것인지는 알지 못하나 그가 궁궐에 들어오는 것이 더 좋을 거로 생각하고 옷을 보내 모르드개가 복귀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제안을 거절하며 자신과 모든 지방의 유다인이 베옷을 입고 애통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모르드개에 대한 하만의 앙심은 이제 한 민족에 대한 혐오와 증오로 뒤바뀌었다. 한 민족을 학살하기 위해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혐오와 폭력을 조장해서 온 세상을 두려움으로 만든 하만의 무서운 광기를 알려준다. 과연 이런 광기를 누가 멈출 수 있을까? 이 광기를 승인해 준 왕이 자신의 명령을 쉽게 거두어들일 수 있을 것인가.
나눔 1 에스더는 유다인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모드르개와 유다인들이 베옷을 입고 애통하는 이유를 자세히 알지 못한 채, 옷을 보내어 달래려 했습니다. 타인의 위기와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적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모르드개는 에스더가 동족을 위하여 왕께 간구하기를 바랍니다(10-17절).
1) 에스더가 왕을 찾아가기를 두려워한 이유는 무엇입니까(11절)?
왕의 부름 없이 마음대로 찾아가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왕이 금규를 내밀면 살 수 있지만, 에스더는 이미 삼십 일 동안 왕의 부름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우리는 이미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왕후 와스디가 폐위되었음을 안다(1장). 이는 에스더도 아는 사실이다. 자신이 그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가 되었기 때문이다. 왕의 명령을 어기는 행동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에스더는 알고 있다.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왕을 찾아가는 것은 황실의 법에서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심지어 왕은 에스더를 찾지 않은 지 한 달이나 되었다. 에스더 입장에서 왕을 찾아갔을 때 왕이 자신을 반가워할지, 노여워할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2) 모르드개가 이때를 위한 하나님의 포석일 수 있다고 말한 사건은 무엇입니까(14절)?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
자신의 상황이 녹록지 않음을 토로하는 에스더에게 오히려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상황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라고 일깨운다. 전국의 수많은 처녀 중에서 왕후가 되는 것이 녹록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에스더가 왕후가 되었던 사건에 대한 의미를 찾아가는 순간이다.
3) 에스더는 무엇을 결단합니까(16절)?
“이렇게(밤낮 삼 일)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모드르개의 따끔한 충고가 에스더를 움직였다. 에스더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관여하신 이유를 찾게 되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놓인 상황이 쉽지 않은 건 사실이다. 에스더는 도움을 요청한다. 자신을 위해 모든 이들이 함께 금식하며 기도해 달라 말한다. 일반적인 금식은 낮에만 시행되지만, 에스더는 밤과 낮을 포함한 삼 일을 금식하며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한다. 그만큼 이것이 중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인의 목숨뿐 아니라 모든 이들의 목숨이 함께 걸려 있는 문제기 때문이다.
나눔 2 에스더는 동족에게 비극이 닥칠 것을 안 후에도 왕에게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왕의 총애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칫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모르드개는 이 순간을 위해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리라 믿습니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를 알면서도 여러 염려 때문에 주저한 적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나눔 3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말대로 왕께 나아가기로 결단합니다.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라, 두려운 마음을 기도와 근신을 통해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지금 믿음으로 결단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서로 이야기하고, 두려운 마음을 떨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다른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긍휼과 인애의 마음을 품게 하소서.
공동체 _ 공동체의 문제를 책임자들에게만 돌리지 않고, 함께 고민하며 답을 찾는 데 동참하게 하소서.
250511 속회지도자 자료
2025-05-07
신내교회
250511 속회지도자 자료.pdf
5월 둘째 주 그룹큐티나눔
불의가 정의를 삼키더라도
시편 119:97-112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너 근심 걱정 말아라(찬송 382장, 구 432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희망도 전혀 보이지 않는 암흑과 같은 순간 말입니다. 시편 119편의 시인도 그런 때를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는 짙은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발견합니다. 그는 빛을 깨닫는 이 명철함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백합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명철을 얻었다고 고백합니다(97-104절).
1) 시인은 자신의 명철함이 누구보다 낫다고 여깁니까(99, 100절)?
시인의 모든 스승, 노인
시인이 살던 당시에는 스승이나 노인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시인은 지혜로운 사람보다 자신이 더 뛰어난 명철을 지녔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 말씀의 뛰어남을 보여주려는 시인의 의도가 있을 뿐 그가 오만방자한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명철이란 바른 행위와 악한 행위를 구분하는 것이다.
2) 시인이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게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101, 104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시인이 명철하게 되어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다 보니 악한 길로 가지 않게 되었다고 여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응당 악한 길로 향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수록 가지 말아야 할 길(삶의 행동들)이 더욱 분명해진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과 우상을 숭배하는 길을 구분하여 보여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은 이웃을 사랑하는 길,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향해 긍휼의 마음을 품는 길과 연결되지만, 우상을 숭배하는 길은 자신을 사랑하는 길,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폭행하는 길과 연결된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이며, 이 세상에서 정의가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 이해되었다. 이렇듯 내면화한 말씀은 나침반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어느 길이 하나님을 향한 길인지, 악한 길인지 알려준다.
나눔 1 시인은 하나님 말씀으로 인하여 명철해졌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명철은 성공하고 부유하게 되는 것과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모든 악한 길, 모든 거짓 행위를 싫어하고 거부할 수 있는 올곧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심어준 명철함은 무엇입니까?
2. 시인은 어두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이 길을 비추는 빛임을 노래합니다(105-112절).
1)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엇으로 비유합니까(105절)?
등, 빛
빛은 어둠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시인은 어두운 밤길에 등불을 켜서 길을 환하게 밝히고서야 길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두운 곳을 환히 비춰주는 빛, 등불에 비유한다.
2)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는 시인은 지금 어떤 상황 가운데 있습니까(107, 109절)?
고난, 위기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등불과 빛에 비유한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이 매우 심하다고 토로하고, 생명이 항상 위기 속에 있다고 여긴다. 물론 우리는 시인이 처한 고난과 위기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의 이야기로 읽어내기 쉽다. 시인이 가야 하는 길에는 악인들이 쳐놓은 올무가 있다. 그러나 그 올무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살얼음을 걷는 심정으로 한 발 한 발 내디딜 수밖에 없다. 자칫하면 올무에 걸릴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살아간다. 불의가 정의를 삼키는 세상 속을 살아가는 고통이 있다. 그래서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빛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발 앞을 비춰주는 등불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등불이 있어야 올무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3) 시인은 주의 증거들로 무엇을 삼습니까(111절)?
▶자신의 기업(유산)
‘증거’로 번역된 이 단어(히. 에두트)는 명령으로 내린 법(법령, 법률)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이 단어가 주로 사용된 것은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두 돌판(증거판), 그 돌판을 넣은 언약궤(증거궤) 그리고 그 언약궤가 놓인 성막(증거의 장막)이라는 표현들이다. 따라서 증거라는 말을 십계명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증거로서 십계명과 같은 법을 자신의 기업, 즉 유산으로 여기겠다고 다짐한다. 기업이라는 단어(히. 나할)는 소유를 분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주로 땅을 나눠주는 것과 연결되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겠다고 말한다. 불의가 정의를 삼키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다는 것은 고난과 위기를 자초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다르게 생각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때 비로소 고난과 위기가 더 멀어질 것이라고 여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쓸모없다고 여기는 이가 있다면 시인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어보자. 불의가 정의를 삼킨다면 지금 당장은 세상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나 정의 곧 빛 되신 말씀은 그 속에서 빛을 내 불의를 태워버릴 것이다.
나눔 2 시인은 하나님 말씀을 빛을 밝히는 등불로 비유합니다. 이 빛은 짙은 어둠 속에서도 무엇이 불의인지를 보여줍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준, 내게 빛과 같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나눔 3 시인은 악인들이 쳐놓은 덫 앞에 있습니다. 자칫하면 깊은 구렁 속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시인은 감춰진 구렁을 환하게 보여줄 말씀에 의존할 뿐입니다. 그것이 가장 현명한 자세입니다. 고난과 위기에서 나를 건져준 말씀은 무엇입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하나님 말씀으로 내가 걸어야 하는 길을 더 환하게, 더 분명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공동체 _ 절망의 구렁에 빠진 이들에게 말씀의 빛이 닿게 하옵소서.
250504 속회지도자 자료
2025-04-30
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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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첫째 주 그룹큐티나눔
삶의 무게 중심을 말씀으로
시편 119:1-16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주님 가신 길을 따라(찬송 448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건물이 빼곡한 도시를 벗어나 탁 트인 들판을 걸으면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넓은 들판에도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조성된 길이 있지만, 가끔은 다듬어진 길을 벗어나는 일도 색다른 즐거움을 줍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시편 119편은 사람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이가 그 길로 걷지 않더라도 시인은 적어도 자신만은 그 길을 벗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의 복됨을 노래합니다(1-8절).
1) 시인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1- 3절)?
행위가 온전한 사람,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사람,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는 사람,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사람, 불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 주의 도를 행하는 사람
보편적으로 유대인은 율법에 근거하여 재물, 장수, 명예 등을 복으로 인식하는 경향성이 있다. <욥기>에 나오는 욥의 친구들은 이런 경향성을 대표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시편 119편의 시인은 다르다. 오히려 행위의 주체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행동하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으로 본다. 소위 ‘복을 받는다’는 개념보다는 율법의 주체인 그 사람이 ‘복되다’고 생각한다. 시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할 수 있는 ‘복’과 그 말씀을 살았을 때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다. 하나님의 길(도)을 잘 걷는 것, 그 자체가 복이라는 시인의 이야기는 일반적인 가치에서 본다면 분명 새롭다.
2) 시인은 누가 율례를 지키고 모든 계명에 주의하며, 의로운 판단을 배우길 원하고 있습니까(5-8절)?
시인 자신
시인은 스스로 복된 사람이 되고자 열망한다. 그러기 위해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준수해야 할 ‘말씀’(법도), 걸어가야 할 ‘길’을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말씀(계명)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고자 한다. 맹목적인 찬양이 아닌 올바른 지성으로 하나님을 칭송하고자 노력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한다면 응당 하나님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고 여긴다. 결국 말씀은 준수하지 못하므로 복된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시인에게 긍정적으로 변하여 동기부여가 된다.
나눔 1 시인은 자신이 ‘어떤 복’을 받을지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무엇을 해야 ‘복된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짜 복된 사람,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런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노래합니다(9-16절).
1) 시인은 무엇으로 사람의 행실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9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준수하다’라는 의미로서 ‘지키다’(히. 샤마르)라는 표현이 본문에서 여러 번 강조 되었다(4, 5, 8, 9절).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무엇으로부터 ‘보호하다’라는 의미로 ‘지키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보호하겠다’ 하면서 오히려 그 말씀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는 것이 곧,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시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결정이다.
2) 시인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다짐합니까(11절)?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마음에 두기로 다짐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었다고 말한다. 이때 ‘마음’(히. 레브)은 감각적이거나 감정적인 측면보다는 의지적이고, 이성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단어다. 따라서 시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둔다는 것은 말씀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의지적으로 결정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모든 물체는 무게 중심이 안정적일 때 넘어지지 않고 바르게 선다. 반면 사람은 무게 중심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순간순간 자세가 달라질 때마다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여기에 또 다른 무게 중심이 필요하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변화무쌍하다. 따라서 말씀에 비추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의지적으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무게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3) 시인은 하나님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무엇에 주의합니까(15절)?
주(하나님)의 길들
시인은 1-16절에서 ‘길’과 ‘걸음’이라는 유사한 이미지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사람이 다니는 용도로서의 ‘길’(3, 5, 14절)은 벗어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4절에서 복 있는 자가 ‘주의 도(길)를 행하는(걷는) 것’이 마땅하다고 노래하는 이유다. 5절에서 시인을 향해 하나님이 정해주신 ‘길’ 역시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이다. 14절에서 시인이 말하는 하나님의 증거(법률)들의 도(길) 역시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의미한다. 이처럼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 존재한다는 것과는 별개로 개인이 그 길을 바르게 걷고 있는지(발걸음)는 다른 문제다. 시인이 고민하는 것은 자신의 발걸음이 그 길에 일치하는지다. 9절에서 시인은 “무엇으로 행실(발걸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기로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시인은 15절에서 ‘주의 길들’, 즉 하나님이 먼저 밟으신 그 발걸음들을 주목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청하신 말씀(길)은 이전부터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신 일들(발걸음)에 기초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먼저 길을 만드시고 그 길을 걸어가신 하나님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의 발걸음에 맞춰서 그 길을 걸어야 한다.
나눔 2 무게 중심을 잘 잡으면 어떤 자세에서도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함으로 삶의 무게 중심을 잡으려 합니다. 지난 한 주간 삶의 무게 중심이 되어준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이야기해봅시다.
나눔 3 시인은 사람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하나님이 먼저 걸어가셨음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걸어야 하는 이 길 위에서 하나님의 발자국을 발견한 적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여 삶의 문제 앞에서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공동체 _ 말씀의 길을 걷는 모든 이와 함께 행하게 하소서.
250427 속회지도자 자료
2025-04-23
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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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넷째 주 그룹큐티나눔
더디 믿는 자들이여
누가복음 24:13-35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찬송 95장, 구 82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마음이 극심하게 무너지면 인지력도 떨어지고 현실감각도 둔해집니다. 사실이 아닌 감정에 휘둘리거나,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아로 믿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그들은 큰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가오셔서 말을 거시는데도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디 믿는’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절망에서 벗어나 굳건한 믿음을 지닌 제자로 거듭나도록 인도하십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십니다(13-27절).
1)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16절)?
그들의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이다.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16절)는 구절과 ‘눈이 밝아져서 그를 알아보게 되었다’(31절)는 구절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 본문에서 문학적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즉, 24:13-35 본문의 큰 틀은, ‘눈이 가리어진 제자들이,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눈이 가리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시력이 좋지 않았다고 치부할 수 없다. 영적인 눈이 가려졌기에, 부활하신 주님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정작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말씀은 기억하지 않고 참담한 죽음의 현실만 묵상하느라 제자들은 예수님을 몰라봤다.
2) 두 제자는 예수님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줍니까(17 -27절)?
‘우리가 따르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예수가 살아났다는 소문이 떠돌지만 그를 보지는 못했다.’
두 제자가 살아계신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예수님의 죽음만을 자세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코믹한 상황이다. 두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 주제가 ‘예수님의 죽음’ 문제였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죽음’ 문제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얼굴에 수색이 가득했다. 그래서 두 제자는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마음이 더 아프고 우울했다. 성도들이 만일 성경을 묵상하고 나누면서도 정작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나눔은 허무할 것이며 우울함만 가중될 것이다.
3) 두 제자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25-27절)?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책망하시면서, 구약성경에 약속된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영광에 이른다는 사실을 가르치신다.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자꾸 예수님의 죽음만을 말하는 게 예수님 입장에서도 듣기 좋을 리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두 제자를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걸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꾸짖으신다. 예수께서 두 제자에게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자기 슬픈 감정에만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성도가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할 때 슬픈 마음으로 인해 공황 상태에 빠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성도는 말씀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를 다시 믿음의 원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은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이 아니라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나눔 1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고난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실의에 빠져서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말씀이 아닌 자기의 선입견으로 메시아를 이해하면 영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우리도 세속적 가치관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시험에 빠진 적은 없는지 나눠봅시다.
2. 두 제자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봅니다(28-35절).
1)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언제입니까(30, 31절)?
예수님이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을 때
예수께서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가 영광에 들어가기 전에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을 구약성경을 통해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면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셨다. 이 장면은 예수께서 오병이어 때 음식을 나누신 장면이나(눅 9:16),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최후의 만찬 때 떡을 떼신 장면과 유사하다(눅 22:19).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풀어주시면서, 그리고 제자들에게 생전 예수님의 익숙한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셨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다.
2) 제자들의 마음은 언제 불타듯이 뜨거워졌습니까(32절)?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주셨을 때
영적인 눈이 열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제자들은 이제 서로 생명과 소망을 이야기한다. 바로 직전까지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차갑게 식어 있었던 그들의 마음이 소망으로 뜨겁게 달궈진 것이다. 이런 일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죽었던 사람의 마음을 다시 회복시켜 영적인 울림이 있게 하는 건 주의 말씀이다. 성령의 인도로 말씀을 묵상할 때 죽었던 마음이 다시 새 소망으로 용솟음칠 수 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을 깨달은 두 제자는 곧바로 무슨 일을 합니까(32-35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전했다.
두 제자의 목적지가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바뀌었다. 엠마오는 낙담하고 절망한 사람이 옛 삶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 시대, 새 역사를 열어나가겠다는 의지를 의미한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맨 먼저 한 일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한 것이었다.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진 그리스도의 제자는 더 이상 사적인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공적인 인생을 위해 자신을 드린다.
나눔 2 예수님이 말씀을 풀어주실 때, 제자들은 고난을 통과한 영광에 눈떴고, 식었던 마음도 다시 뜨거워졌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면서 마음이 벅차오르고 뜨거워진 경험을 나눠봅시다.
나눔 3 눈이 밝아지자 제자들이 맨 먼저 한 일은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기쁜 소식’을 자기만 알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떻게 부활을 증언하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날마다 성경을 묵상하면서 부활하신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게 하소서.
공동체 _ 교회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250420 속회지도자 자료
2025-04-16
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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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셋째 주 그룹큐티나눔
안식 후 첫날, 빈 무덤
누가복음 24:1-12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무덤에 머물러(찬송 160장, 구 150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전도자의 통찰대로 죽음은 모든 노력과 가치를 무(無)로 돌리는, 가장 헛된 일입니다(전 9:1-3).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많은 사람이 죽음을 자기 생의 마지막 상태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기껏 하는 일이 자기 무덤을 크고 화려하게 꾸미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권력자들의 웅장한 무덤 유적들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죽음에 갇혀 있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이 변화를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예수님의 ‘빈 무덤’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안식 후 첫날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1-7절).
1)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간 이유는 무엇입니까(1절; 참조. 막 16:1)?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된 무덤에 갔다. 여인들이 무덤에 간 이유는 향유를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면서 마지막 예(禮)를 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참조. 막 16:1). 여인들이 보인 예의는 ‘산 사람’이 아닌 ‘시신’에 대한 예의다. 하지만 여인들의 이런 정성이 가득한 애도 행위는 사실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향유 바를 시신이 무덤에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생전에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셨다(참조. 눅 24:7; 막 8:31). 안식 후 첫날은 바로 그 약속하신 사흘째 되는 날이다. 그런데 여인들은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한 채 그저 예수님의 시신만 찾아서 돌보려 했다.
2) 여인들이 무덤에서 목격한 것은 무엇입니까(2,3절)?
돌이 옮겨진 것과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
여인들이 시신에 바를 향품을 가지고 밤새 달려왔는데 그들이 발견한 것은 ‘빈 무덤’이었다. 무덤 문을 막고 있던 큰 돌이 이미 굴려진 상태였고 무덤 안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다. 당시 무덤은 주로 석회석 산악 지대에 동굴을 파서 만들어졌다. 동굴 묘 문을 막고 있는 돌은 약 2톤 정도 무게로, 한번 막힌 돌은 경사 홈에 끼어 있기에 이것을 원상태로 돌리려면 성인 남성 20여 명이 함께 힘을 써야 한다. 이 동굴 묘를 로마 군병 16명이 4인 1조가 되어 4교대로 지켰다. 제자들이 로마 군병을 제압하고 큰 돌을 굴려서 묘 문을 연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마태복음 28:2에 의하면 주의 천사가 그 돌을 굴렸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이다. 빈 무덤은 ‘예수 부활’의 기초 증거다.
3) 근심하고 있는 여인들에게 두 사람이 전한 말은 무엇입니까(4-7절)?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안식 후 첫날 여인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었다. 예수님은 생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겠지만 제3일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안식 후 첫날 여인들은 시신을 찾아 마지막 예를 다하려고 노력할 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부활하신 주님을 찾아야 마땅했다. 주의 천사들은 여인들의 이런 실패를 긍휼히 여기고 다시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성도가 낙담하고 무너졌을 때 다시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말씀 앞에 서는 것이다. 말씀을 기억해야 무너진 신앙이 회복될 수 있다.
나눔 1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참 생명과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이 내 삶에 어떤 변혁을 일으켰고 또 일으키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2. 여인들이 무덤에서 보고 들은 것을 가감 없이 제자들에게 전합니다(8-12절).
1) 여인들이 열한 사도에게 ‘빈 무덤’을 증언한 결정적인 동기는 무엇입니까(8, 9절)?
“제 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여인들이 본 것은 ‘빈 무덤’이었으며, 그들이 들은 것은 천사들이 전해준 부활 메시지였다. 그리고 여인들은 생전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고(참조. 눅 9:22; 18:32-33), ‘빈 무덤’은 시신이 사라진 게 아니라 말씀이 성취된 것에 대한 증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인들은 말씀을 기억하며 제자들에게 확신 있게 ‘빈 무덤’(부활)을 증언했다.
2) 사도들은 여인들의 말에 어떻게 반응합니까(11절)?
여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않았다.
사도들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큰 충격을 받아 심신이 허약해져서 헛것을 보고 횡설수설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일단 그들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무덤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베드로 역시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빈 무덤을 확인하게 된다. 당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이어지는 본문(눅 24:13-35)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다만 소망스러운 것은, 인간의 강퍅한 마음을 주님께서 열어주신다는 사실이다(참조. 요 20:27-31). 주님은 말씀과 성령을 통해 이 시대 모든 성도가 믿음으로 부활의 주를 만나게 하신다.
3) 무덤에 달려간 베드로 역시 무엇을 발견합니까(12절)?
세마포만 남은 무덤
무덤 안에 시신은 없고 세마포만 남았다는 건 예수님의 시신이 도난당한 게 아니라는 대표적 증거다. 만일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치려 했다면 세마포에 싸인 시신을 바로 들고 갔을 것이다. 세마포만 남았다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다는 증거다. 초대교회에서 ‘빈 무덤’은 부활의 기초 증거다. 하지만 ‘빈 무덤’만 가지고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한 건 아니다. ‘빈 무덤’보다 더 강력한 부활의 증거는 예수께서 부활의 몸을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신 사실이다(고전 15:3-8).
나눔 2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한 여인들은 빈 무덤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읽어냈습니다. 말씀을 기억하자 눈앞의 현실에 대한 해석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고 삶의 현실과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뀐 경험을 나눠봅시다.
나눔 3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예고와 여인들의 증언을 듣고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씀보다 경험과 현실을 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경험 때문에 믿기 어려웠던 혹은 어려운 말씀이 있으면 나눠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죄와 사망의 그림자에 갇혀 살지 않고 생명의 자유 가운데 살게 하소서.
공동체 _ 부활을 경험한 자의 말과 삶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온 세상에 증언하게 하소서.
250413 속회지도자 자료
2025-04-09
신내교회
250413 속회지도자 자료.pdf
4월 둘째 주 그룹큐티나눔
무슨 권위로
누가복음 20:1-18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내게 있는 모든 것을(찬송 563장, 구 411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향해 종교지도자들은 “네가 무슨 권위로 성전에서 이렇게 하느냐?”라고 따져 묻습니다. 권위의식으로 가득한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그분에게 자격이나 허가 여부를 따져 묻습니다. 예수님의 행보가 자신들의 권위에 위협이 되었기에, 예수님의 손발을 묶고 입을 막으려 한 것입니다. 가짜 권위에 도취되어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까지 멸시하는 그들은 곧 하나님께 심판받을 것입니다. 참된 권위에 의해 거짓된 권위는 쇠망하고 맙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 삼습니다(1-8절).
1)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뭐라고 질문합니까(1, 2절)?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말하라.”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은 성전과 산헤드린 공회의 종교지도자들이다. 대제사장은 원래 유대 사회에서 한 명이어야 정상인데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로 지칭되고 있다. 그 이유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안나스(장인)와 가야바(사위)가 모두 대제사장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안나스는 주후 6년에 수리아 총독 퀴리니우스(구레뇨)에 의해 임명되었다. 하지만 주후 16년에 유대 총독 그라투스에 의해 폐위되고 대신에 그의 사위인 가야바가 대제사장직을 승계하게 된다. 율법에 따르면 대제사장은 아론의 자손 중에서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가 기름부음을 받아 세워져야 하며 그 직은 종신직이다. 이런 율법 기준에 의하면 이들은 모두 정통성을 갖지 못한 자들로서 자격도, 권위도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런 무자격자들이 성전의 참 주인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 삼고 있다. 이것은 거의 코미디에 가까운 일이다.
2) 예수님의 반문에 종교지도자들이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3-7절)?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났다고 하면 “왜 믿지 않았느냐?”라는 말을 들을 것이고, “사람으로부터 났다”라고 하면 백성에게 돌로 맞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인은 세례 요한을 존경하며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라고 생각했다(참조. 눅 1:76).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반대하고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대놓고 말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걸 인정하면, ‘그러면 왜 믿지 않았느냐?’라는 타박을 받을 것이며, 사람으로부터 난 권위라고 말하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는 백성들로부터 돌을 맞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믿음도, 양심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도 없었다.
나눔 1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에게서 권위를 부여받았다고 자부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며 자기 잇속만 차리는 부류였습니다. 이는 그들의 대답인 “알지 못하노라”에서 드러났습니다. 나의 지위나 명예, 소유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은 없었는지 나눠봅시다.
2. 포도원 농부들이 주인의 소유를 차지하기 위해 끔찍한 일을 저지릅니다(9-18절).
1) 주인이 포도원 소출을 받기 위해 보낸 종들과 아들에게 농부들은 어떤 일을 저지릅니까(9-15절)?
종들을 몹시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으며, 포도원을 아예 차지하려고 아들을 포도원 바깥으로 내쫓아서 죽였다.
당시 갈릴리 같은 경우 이방인 소유의 땅이 많이 있었다. 땅 주인은 그 땅을 그 지역 소작인에게 맡기고 자기 고향(타국)으로 돌아가 지내는 경우가 흔했다. 그런데 땅 주인이 자손도, 유언도 남기지 않고 사망한 경우, 그 땅을 첫 번째 차지한 사람에게 넘어가는 경우가 있었다. 예수께서 이런 당시 관습에 비추어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기득권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구약의 선지자들, 신약의 세례 요한)을 죽였을 뿐 아니라, 이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까지 죽이려 한다. 유대 지도자들은 눈엣가시 같은 예수님을 죽이고 성전 기득권을 보전하려 한 것이다. 예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이 비유는 현실이 된다.
2) 결국 포도원 주인이 내린 특단의 조치는 무엇입니까(16절)?
포도원으로 와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다.
포도원 즉 이스라엘 백성이 진멸될 거라는 말씀은 주후 70년 예루살렘 패망으로 1차 성취된다. 하지만 이 말씀은 단지 예루살렘 패망만을 염두에 둔 예언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최후의 심판을 실행하실 때, 모든 악한 자들이 멸망할 것까지도 말씀하신 거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긍휼에 풍성하셔서 백성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죄가 세상에 관영할 때 하나님은 철저하고 완벽한 심판을 실행하신다. 그때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자는 한 사람도 없다.
3)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한다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17, 18절)?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시 118:22)라는 말씀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며, 그 돌이 사람을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시편 118:22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수 있다. 이는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할 테지만 예수님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로 승귀하실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기초로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가 만들어질 것이다. 더 이상 혈통이 좌우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믿음이 하늘 백성 유무를 판가름하는 새로운 기준이 되어 성전 공동체(교회)가 건축될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참된 권위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는데 무자격, 무권위 지도자들이 몇 푼어치도 안 되는 세속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그를 배척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심판의 돌이 그들 위에 떨어지게 될 것이고,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나눔 2 농부들이 주인의 종들과 아들을 핍박하며 포도원의 주인이 되려 한 것처럼, 종교지도자들은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서 하나님 백성의 주인이 되려 했습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며 돌려드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돌려드릴지 이야기해봅시다.
나눔 3 포도원을 악한 농부들에게서 되찾는 주인처럼, 예수님은 악한 지도자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의 손아귀에서 자기 백성을 되찾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일을 어떻게 이루고 계시는지, 이 일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탐욕 때문에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거나 하나님의 것을 차지하지 않게 하소서.
공동체 _ 하나님의 것을 사유화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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