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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3 속회지도자 자료
2026-08-19 14:56:56
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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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네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패역한 자녀에게

 

이사야 26:1-27:1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돌아와 돌아와(찬송 525장, 구 315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 봅시다.

 

고집과 소신은 비슷한 것 같지만, 본질이 전혀 다릅니다. 고집이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는 비겁한 자기 확신이라면, 소신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내 자존심마저 기꺼이 내려놓는 거룩한 용기입니다. 과거 유다 백성은 국가적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묻기보다 애굽에 기대는 치명적인 ‘고집’을 부렸습니다. 오늘날 주님은 여전히 고집스런 우리를 향해 얄팍한 자구책을 버리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말씀 앞에서 고집을 꺾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 유일한 길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유다는 강대국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세상 권력의 그늘을 택합니다(1-11절).

1) 하나님이 유다를 ‘패역한 자식들’이라고 꾸짖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1-2절)

여호와께 묻지 않고 자기 계교(계획)를 베풀며,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않고 애굽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예언이 주어진 시기는 앗수르가 아스돗을 점령한 주전 711년과 예루살렘 포위가 이뤄진 주전 701년 사이로 볼 수 있다. 이때 선지자의 예언은 유다가 앗수르 군대를 막으려고 함부로 애굽과 동맹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군사적 안전보장을 추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유다의 외교 사절단이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계획에 따라 행동하는 패역한 자들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강대국을 의존하며 동맹을 맺으려는 것을 강력하게 규탄하신다.

 

2) 애굽을 의지한 유다가 얻게 될 결과는 무엇입니까? (3-5절)

애굽으로부터 도움은커녕 도리어 수치만 당할 것이다.

4절의 고관들과 사신들은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외교 사절단을 의미한다. 이들은 앗수르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서는 애굽의 도움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며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려고 애굽에 내려갔다. 하지만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믿었던 애굽으로부터 수치와 모욕만 당한다. 사실 애굽은 유다를 도울 만한 힘이 없었다. 애굽은 이미 상한 갈대와 같아서 누구를 도울 처지가 못 되었다. 그럼에도 유다는 하나님은 의지하지 않으면서, 도울 힘이 없는 세상 권력 집단을 의지하려 한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권력자를 의지할 때 세상으로부터 도움은커녕 오히려 버림받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한다.

 

3) 패역한 백성이 선견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10-11절)

바른 것을 보이지 말고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하나님을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고 요구한다.

자기 꾀에 빠져 사는 이들은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정작 세상의 작은 위협은 몹시 두려워한다. 그래서 선지자가 이런 패역한 백성의 불신앙을 바로잡으려 하는데 정작 백성은 선지자에게 말씀을 전하지 말라고 강짜를 부린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진실을 정직하게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어려움을 피하려다 정작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만다. 하지만 선지자를 위협하며 예언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도 멈추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의사와 상관없이 엄위하게 선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서 성도는 자기 입맛에 맞는 말씀을 선택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어떤 말씀이든 “아멘!” 하고 순종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나눔 1 유다는 눈앞의 위협(앗수르)을 피하려고 또 다른 세상의 힘(애굽)을 의지했다가 더 큰 수치를 당했습니다. 하나님보다 나를 안전하게 지켜 줄 것 같아 마음에 의지가 되는 ‘나의 애굽’은 무엇인지 나눠 봅시다.

 

나눔 2 내 생각과 반대되는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최근 말씀을 듣거나 묵상할 때, 내 굳은 신념을 건드려 마음이 몹시 아프고 불편했지만, 돌아보면 결국 내 영혼을 살린 ‘진리의 말씀’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2.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한 유다가 쇠락의 길을 걷습니다(12-17절).

1)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듯이 하나님이 유다를 심판하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12-14절)

유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애굽을 의지하며, 허망한(패역한)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유다의 권력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세상의 허망한 걸 붙잡고 의지하려 한다. 이 죄로 인해 그들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마치 잘못 쌓아 불쑥 튀어나온 담벼락이 장마철에 습기가 차서 갑자기 무너지듯이 유다 왕국도 그렇게 한순간에 패망할 것이다. 이것은 엄위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마치 토기장이가 잘못 빚어진 토기를 깨뜨리듯이 하나님께서 유다 왕국을 철저히 심판하실 것이다. 다시 복구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유다는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하나님이 유다를 이처럼 심판하려는 이유는 그들이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2) ‘회개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을 거부한 유다의 결국은 무엇입니까?(15-17절)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여 쇠락의 길을 걷는다.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슈브, 회개) 촉구했지만, 유다 백성은 이 말씀을 거부한다. 그들은 잠잠히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느니 애굽과 연대해서라도 앗수르와 싸울 거라며, 빠른 말을 타고 도망갈지언정 앗수르에게 무릎 꿇지 않겠다고 객기를 부린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준마를 타고 도망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아무리 빠른 말을 타고 도망할지라도 쫓는 자가 더 빨라서 결국 따라잡히고 말 것이다. 17절의 유다의 모습은 참으로 비참하다.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고, 다섯 사람이 꾸짖은즉 모든 사람이 다 도망하여서, 예루살렘에 사람은 없고 깃대만 남게 될 것이다.

 

나눔 3 하나님은 우리가 분주히 움직이며 허망한 것을 의지하기를 멈추고, 주 안에서 ‘잠잠히 신뢰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이번 한 주간, 내 힘으로 해결하려던 분주함을 내려놓고 주께 맡김으로 평안을 누려야 할 영역은 무엇인지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내 계획이 말씀에 비추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즉시 돌이키게 하소서.

공동체 _ 세상의 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하며, 잠잠히 기다리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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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누는 질문] 1. 슬로브핫의 딸들처럼 어려운 문제 앞에서 하나님께 솔직히 아뢰었던 경험이 있습니까? 그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2. 슬로브핫의 딸들은 말하기 어려운 시대에도 용기를 냈습니다. 여러분은 용기를 내서 하나님께 순종했던 순간이 있었습니까? 그때 어떤 변화나 은혜가 있었습니까? 3. 하나님은 슬로브핫의 딸들을 통해 새로운 법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이나 우리 선교회를 통해 새롭게 이루기 원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함께 드리는 기도] 사랑의 하나님, 당신의 백성을 새롭게 세우시며 세대마다 약속을 이루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처럼 불평과 두려움 속에 머물지 않고 용기 있게 주님께 나아가게 하옵소서. 주께서 주신 기업을 잃지 않고 우리의 삶이 주님의 공의와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는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61011 속회지도자 자료 2026-10-07 신내교회 261011 속회지도자 자료.pdf 10월 두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게으른 백성의 불의한 열심 사사기 18:1-20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새벽부터 우리(찬송 496장, 구 260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 봅시다. 본래 단 지파는 이스라엘 중서부 해안의 비옥한 땅을 분배받았지만, 아모리 족속에게 쫓기고 블레셋에 밀려 방랑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새 거처를 찾던 그들은 북쪽의 평화로운 성읍 ‘라이스’를 발견하고, 하나님이 주신 험난한 땅을 개척하는 대신 그곳을 빼앗기로 결정합니다. 심지어 원정길에 미가의 집에 들러 신상과 에봇, 제사장을 무력으로 탈취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이루는 일에는 한없이 머뭇거리고 무기력하더니, 탐욕을 채우는 일에는 누구보다 맹렬히 열심을 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사명에 게을렀던 단 지파가 세속적인 욕망 앞에서는 열심을 냅니다(1-10절). 1) 단 지파의 정탐꾼들이 만난 레위 청년은 미가의 집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었습니까?(1-4절) 미가의 집에 고용되어 그의 제사장이 되었다. 사사 시대는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완전히 망가진 사회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미가의 집 사건’이다. 미가라는 사람이 어머니의 돈을 훔쳤다. 그러자 어머니는 도둑을 잡기 위해 “돈을 훔친 자는 여호와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며 저주했다. 아들은 그 저주가 무서워서 자신의 절도 사실을 고백하고 돈을 어머니에게 되돌려준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 돈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린다며 ‘은 신상’을 만든다. 더 기막힌 일은 미가는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봉사할 제사장을 세우면서 혼합주의 제사 시스템을 완성한다. 미가의 집을 위해 봉사할 제사장은 바로 베들레헴 출신 레위인 청년이다. 이스라엘의 성전을 위해 공적으로 복무해야 할 레위인이 생활이 어려워지자, 검은돈에 매수되어 한 집안의 혼합주의 종교 제사장이 되었다. 2) 정탐꾼이 레위 청년(제사장)에게 요청한 것은 무엇입니까?(5절) “하나님께 물어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고 요청한다. 단 지파는 원래 이스라엘 남서부 지방(소라, 에스다올, 욥바 근처)을 기업으로 받았다. 하지만 이곳은 강력한 해양 민족 블레셋이 진 친 곳이어서 단 지파는 쉽사리 점령하지 못했다. 오히려 아모리 족속의 반격으로 단 지파는 기름진 평야 지대에서 척박한 산지로 쫓겨난다. 그래서 단 지파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기 위해 정탐꾼 다섯 명을 세워 파송한다. 이들이 북쪽으로 올라가던 중 에브라임 지역 미가의 집에 들러 유숙하면서 레위 청년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정탐꾼들은 그가 종교인인 것을 알고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지” 묻는다. 마치 점집에 들어가서 무당에게 미래를 묻는 것과 같다. 여호와 신앙은 사라지고 무속 종교만 남았다. 3) 라이스 성읍을 둘러본 정탐꾼들은 단 지파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고합니까?(9-10절) 그 땅은 넓고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으며, 백성은 평안하고 염려 없이 거주하니 올라가서 치자고 보고한다. 정탐꾼의 보고가 마치 무슨 신앙 좋은 사람들의 패기처럼 느껴진다. 과거 출애굽 때 갈렙이 전달한 정탐 보고가 연상된다(참조. 민 13:30). 하지만 단 지파의 정탐꾼 보고와 과거 출애굽 당시 갈렙의 정탐 보고를 감히 비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점령해야 할 대상이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갈렙은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 거인들이 버티는 땅을 차지하자는 것이었고, 단 지파 정탐꾼들은 어떤 성벽도 없고 싸울 능력도 부재한 라이스 지역을 차지하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단 지파의 정탐 보고가 겉보기에는 무슨 대단한 믿음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점령하기 쉬운 땅을 찾았다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우리 힘으로 그 땅을 쉽게 차지할 수 있다는 불신앙을 말한 것이다. 나눔 1 단 지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보다 당장 내게 편하고 이익이 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바쁘고 분주한 일상 속에서 잠시 미루어 두었던 사명을 이어 가기 위해 재정비하고 싶은 삶의 우선순위는 무엇인지 나눠 봅시다. 나눔 2 정탐꾼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자신들이 세워 둔 계획이 성공할지 확인받고 싶어 했습니다. 미리 나만의 답을 정해 놓고 주님의 축복만 구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싶은 내 삶의 계획이나 결정은 무엇인지 나눠 봅시다. 2. 단 지파의 원정대가 가던 길을 멈추고 미가의 집에 들릅니다(11-20절). 1) 라이스를 치기 위해 출발한 단 지파 원정대가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에 머문 이유는 무엇입니까?(13-17절) 미가의 집에 있는 에봇, 드라빔,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을 탈취하기 위해서 단 지파가 라이스를 점령하기 위해 파송한 육백 명의 원정대는 ‘하나님의 신’의 감동이 없는 그저 ‘사람의 군대’였다. 단 지파의 사사 삼손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나귀 턱뼈 하나로 천 명을 죽인 적이 있다. 만일 육백 명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면 그들은 최소 60만의 블레셋을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히 ‘인간의 군대’가 되어 허약한 라이스 사람들의 땅을 점령하러 간다. 그런데 갈 길도 먼 상황에서 일부러 또 미가의 집에 들른다. 이는 아마도 다섯 정탐꾼의 조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집에는 신상, 에봇, 드라빔, 제사장이 있는데 이 모든 혼합주의 종교 시스템을 무력으로 탈취하자는 것이다. 성령이 없는 ‘사람의 군대’가 비신앙적인 일을 위해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2) 처음에는 반발하던 제사장이 스스로 우상을 챙겨 단 지파를 따라나선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19-20절) 한 집안의 제사장이 아니라,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기뻐했기 때문이다. 레위 청년은 애초부터 여호와 신앙 수호에는 관심이 일도 없었던 사람이다. 그는 경제적으로 궁핍하여 고향을 떠나 방랑하는 나그네였으며, 그에게 높은 연봉을 주며 우리 집의 제사장이 되어 달라는 말에 일말의 가책 없이 ‘오케이’ 한 사람이다. 처음부터 돈 많이 주는 곳으로 정체성도, 소속도 바꿀 수 있는 자였기에, 한 집안의 제사장이 아니라 한 지파의 제사장으로 섬기라는 솔깃한 제안에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여호와 신앙도, 최소한의 신의도,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도 사라진 ‘세속 사회’로 변질되었다. 나눔 3 레위 청년 제사장은 ‘한 지파의 제사장’이라는 더 큰 권력에 현혹되고 맙니다. 세상의 화려한 조건이나 달콤한 이익의 유혹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내가 묵묵히 지켜 내야 할 ‘참된 믿음의 자리’(소명)는 어디인지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신앙을 개인의 사적 유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지 않게 하소서. 공동체 _ 사람이 중심이 된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된 거룩한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 261004 속회지도자 자료 2026-09-30 신내교회 261004 속회지도자 자료.pdf 10월 첫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심히 목마른 삼손 사사기 15:1-20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목마른 내 영혼(찬송 309장, 구 409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 봅시다. 삼손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로 부름받았으나, 그 거룩한 소명에 걸맞지 않은 본능과 감정에 이끌려 살았습니다. 그는 나실인의 규례를 어기고 부정한 짐승의 사체를 만졌으며,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았고, 분노를 절제하지 못해 사람을 죽였습니다. 삼손은 사랑에, 복수심에, 마실 물 한 모금에 목마른 지극히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토록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사람마저도 거룩한 주권 아래 두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삼손은 거룩한 사명보다 개인적인 분노와 복수심에 이끌려 행동합니다(1-8절). 1) 삼손이 블레셋 백성을 죽이려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3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그의 친구에게 주어 버렸기 때문이다. 삼손의 장인은 궁색한 변명을 하면서 동생이 더 예쁘니 그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며 삼손을 설득한다. 하지만 삼손은 아내와 이혼한 게 아니라며 이 불의한 일에 복수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삼손이 사사의 사명에 충실해서 블레셋을 징벌하겠다고 말한 게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복수심에 휘둘려 말한 것이다. 내기에 지고 배신감에 화가 나서 30명을 죽인 그가 이제는 아내를 탈취당했다며 더 큰 복수를 꿈꾸고 있다. 삼손은 지극히 개인적인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 행동하는데 역설적으로 하나님은 이것까지 역이용하셔서 뜻을 이루신다. 2) 분노한 삼손은 어떤 일을 벌입니까?(4-8절)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 꼬리에 횃불을 달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밭과 포도원, 감람나무를 불태우고 일부 사람들을 죽였다. 여우를 300마리나 잡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삼손은 그 여우들을 한 쌍씩 꼬리를 묶고 꼬리 사이에 홰를 달아서 불을 붙였다. 그러자 150쌍의 여우가 횃불을 달고 사방으로 날뛰었다. 그래서 결국 블레셋 마을의 곡식단과 포도원과 감람원을 다 불태웠다. 블레셋 백성의 삶의 터전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블레셋 백성은 복수심에 불타서 삼손의 장인과 삼손의 아내를 불태워 죽였다. 삼손은 이것을 보고 다시 더 크게 분노하며 블레셋 백성 다수를 죽이고, 에담 바위에 숨었다. 하지만 이것은 싸움의 서막일 뿐 이제 더 큰 전쟁이 남아 있다. 삼손은 처음에 개인적인 일탈과 사적 복수심으로 작은 싸움을 시작했지만, 하나님은 이 일로 결국 거룩한 전쟁이 일어나게 하셨다. 나눔 1 삼손은 하나님께 엄청난 힘을 받았지만, 사명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본능을 채우는 데 그 힘을 남용했습니다. 주께서 내게 맡기신 소중한 은사와 자원(시간, 물질, 재능 등)을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만족을 위해 이기적으로 사용한 적은 없습니까? 2. 삼손이 한계 속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은혜의 샘을 터뜨려 주십니다(9-20절). 1)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삼손에게 전쟁의 책임을 묻자, 삼손은 뭐라고 대답합니까?(11절)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유다 백성이 블레셋과 ‘거룩한 전쟁’을 할 절호의 기회가 발생했는데도 역설적으로 삼손에게 “왜 네가 경거망동하여 우리가 원치 않은 전쟁에 연루되게 하였는가?”라며 따져 묻는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가 블레셋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나?”라며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11a절). 이스라엘이 ‘거룩한 전쟁’을 수행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라는 정체성 자체를 포기한 거다. 삼손 역시 “내가 처음부터 블레셋과 전쟁하려 한 게 아니라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해서 복수하려다가 상황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궁색하게 변명한다(11b절). 공동체는 ‘거룩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비겁하게 행동하고, 지도자(사사) 삼손 역시 거룩한 ‘나실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망나니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하나님은 이 상황들을 역전시켜 결국 이스라엘 전체가 거룩한 전쟁에 직면하게 하신다. 2) 삼손이 결박되어 블레셋 사람에게 인도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14절)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되어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졌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에게 결박된 게 아니라 자기 동족에게 결박되어 블레셋 백성에게 인계되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전쟁의 부담을 지기 싫다며 동족의 생명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 공의와 정의가 사라진 사사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불의한 상황에 개입하신다. 성령이 임하여 삼손을 결박한 줄이 불탄 삼과 같이 풀어지게 하신다(14절). 국가는 국민을 보호할 책임을 포기하고, 지도자는 무능하게 손과 발이 묶인 상태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은 계속해서 불의한 ‘비정상 상황’을 정의의 ‘정상 상황’으로 바꾸신다. 3) 나귀의 새 턱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인 삼손은 승리 직후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습니까? (18절)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목마름의 고통을 호소한다. 삼손은 이제까지 자잘하게 사적 복수를 위해 동네 싸움을 했는데 이번에는 홀로 블레셋 군대를 대적하는 전쟁을 한다. 삼손은 나귀의 새 턱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인다. 이는 단지 블레셋을 향한 사적 복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면케 한 ‘거룩한 전쟁’을 수행한 것이다. 그리고 큰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삼손은 극심한 갈증으로 죽겠다며 난리를 친다. 혼자 천 명을 상대했으니 그 갈증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사사의 품격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천 명을 죽이는 괴력을 가진 사내지만 한 그릇 물이 없어 죽겠다고 투정하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어린아이도 달래며 물을 먹이시고 다시 회복시키신다. 나눔 2 하나님은 감정과 복수심으로 움직이는 삼손의 충동적인 행동마저도 블레셋을 징벌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실수나 연약함을 도리어 선으로 바꾸어 주신 은혜의 경험을 나눠 봅시다. 나눔 3 삼손이 물 한 모금에 무너져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엔학고레’(부르짖는 자의 샘)를 터뜨려 주셨습니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갈증 앞에서 주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며 간절히 부르짖을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겸손히 나의 결핍과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게 하소서. 공동체 _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은사와 재능을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위해 사용하게 하소서. 260920 속회지도자 자료 2026-09-19 신내교회 260920 속회지도자 자료.pdf 9월 세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백만 대군을 상대할 손 사사기 7:1-14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주 믿는 사람 일어나(찬송 357장, 구 397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 봅시다. 2차 세계대전 초, 프랑스 ㅤ디케르크 해변에 고립된 연합군에게는 짙은 절망뿐이었습니다. 군 수뇌부조차 전원 구조는 불가능하다며 포기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계산이 끝난 바로 그 지점에서 생각지도 못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독일군의 진격이 돌연 멈췄고, 거대한 군함 대신 수백 척의 작은 어선과 유람선들이 바다를 메웠으며, 때마침 짙은 안개가 피어올라 적의 눈을 가려 주었습니다. 결국 33만 명이 넘는 군인들이 기적처럼 살아 돌아왔습니다. 우리에게도 계획이 무너지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 것은 벼랑 끝에 몰린 것 같은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이 온전히 일하기 시작하시는 ‘기적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하나님이 이스라엘 군대의 수를 과감히 줄이십니다(1-8절). 1) 처음 미디안과의 전쟁을 위해 동원된 이스라엘 군대는 몇 명이었습니까?(3절) 2만2000명이 돌아가고 남은 자가 1만 명이니, 처음에는 총 3만2000명이었다. 처음에 모인 이스라엘 군대는 총 3만 2천 명이었다. 하나님께서 이 숫자를 두고 “백성이 너무 많다”고 하셨기에, 문맥만 보면 이스라엘의 전력이 매우 우세한 상황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이 상대해야 할 미디안 연합군의 규모는 무려 13만 5천 명에 달했다(삿 8:10). 객관적인 군사력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적군의 사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절대적인 수적 열세다. 이렇듯 인간의 계산으로는 이길 수 없는 전력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인원이 너무 많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진단은, 이 전쟁이 ‘군대의 규모’가 아니라 오직 ‘여호와를 향한 절대적 신뢰’로 치러야 하는 영적 전쟁임을 역설한다. 2) 하나님이 군대의 수가 많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2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병력의 차이가 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군사학적으로 보면 기습이나 탁월한 지형지물 이용, 전술적 정예화를 통해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완전히 제로인 싸움은 아니다. 전쟁사에는 이 정도의 수적 열세를 천재적인 전략으로 극복한 사례가 종종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경계하신 지점이 바로 여기다. 만약 이 인원으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대신 기드온의 탁월한 리더십이나 자신들의 용맹함을 앞세워 “내 손이 나를 구원했다”며 교만의 덫에 빠질 것이 뻔했다. 하나님은 인간이 승리의 공식을 자기 분깃으로 챙길 실낱같은 가능성마저 지워 버리길 원하셨다. 3)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선택하여 구원의 도구로 삼으신 군대는 총 몇 명입니까?(7절) 300명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남은 1만 명의 병사들을 물가로 인도하신 뒤, 독특한 방식으로 그들을 시험하신다. 물가에서 무릎을 꿇고 입을 직접 댄 자가 9,700명이었고, 손으로 물을 움켜 입에 대고 핥아 먹은 자는 고작 300명이었다. 흔히 이 300명을 주변을 살피며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은 ‘준비된 정예병’으로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짜 의도는 군사들의 전술적 자질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저 인간이 자만할 수 없는 극단적으로 ‘적은 쪽’을 선택하셨을 뿐이다. 만약 300명의 뛰어난 자질 때문에 승리했다고 믿는다면, 이스라엘은 또다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인간의 능력을 자랑했을 것이다. 13만 5천 명의 미디안 대군 앞에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300명은 군사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숫자’에 불과하며, 바로 그 절대적 무력함의 자리가 오직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만이 홀로 빛나는 구원의 무대가 될 것이다. 나눔 1 우리의 두려움과 과시욕이 담긴 ‘많음’을 비워 낼 때, 하나님이 비로소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포장을 걷어 내고 주님 앞에 정직하게 내려놓아야 할 영적 허영심이나 계산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승리의 확신을 안겨 주십니다(9-14절). 1) 기드온이 목격한 미디안 연합군의 규모는 어떠했습니까?(12절) 골짜기에 누운 백성이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 수는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았다. 기드온은 부하 부라와 함께 미디안 진영을 한밤중에 정탐한다. 골짜기 아래를 내려다본 기드온의 눈에 들어온 적군의 규모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대군이었다. 성경은 이를 ‘메뚜기 떼’와 ‘해변의 모래’로 묘사한다. 고대 근동에서 메뚜기 떼는 한 지역의 모든 식물을 단숨에 초토화하는 공포의 대상이었기에, 대규모 군대의 파괴적인 세력을 나타내는 가장 완벽한 메타포였다. 여기에 당대 최고의 기동력을 자랑하던 낙타 부대까지 모래알처럼 깔린 모습을 보았을 때, 기드온의 심장은 얼어붙었을 것이다. 고작 300명의 군사로 상대해야 할 13만 5천 명의 위용은 사명감마저 삼켜 버릴 만큼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거대한 현실 앞에서 한없이 주눅 드는 기드온의 모습은 거친 세상 속에서 매일 믿음의 싸움을 건너며 흔들리는 오늘날 우리 모두의 연약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2)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을 무너뜨리는 꿈’을 미디안 군사는 어떻게 해석합니까?(14절) 이는 기드온의 칼이며,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주신 것이라고 해몽한다. 보리떡은 고대 근동에서 가난한 농민들이나 먹던 보잘것없는 양식을 상징한다. 해변의 모래알 같은 미디안 대군에 비하면, 기드온과 그의 300명 군대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하는 초라한 ‘보리떡 한 덩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적군의 꿈속에서 굴러온 보리떡 한 덩이가 미디안의 거대한 장막을 단숨에 쳐부순다. 더 놀라운 것은 적들의 입술을 통해 이 승리가 확언된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기드온이 가장 두려워하던 ‘적들의 목소리’를 역설적인 위로의 통로로 삼으셨다. 13만 5천 명 대 300명이라는 절망적인 수치 앞에서 얼어붙어 있던 기드온에게, 이 전쟁의 승패가 이미 하나님의 주권 아래 결정되었음을 보여 주는 가장 완벽한 동기부여이자 세밀한 배려다. 나눔 2 내 삶이 보잘것없는 보리떡 한 덩어리 같을지라도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현실을 바꾸는 도구가 됩니다. 막막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반전을 기대하며 기도로 맡겨 드릴 제목은 무엇입니까? 나눔 3 군인 300명만 남기신 하나님은 이 전쟁의 참된 주인이 누구인지 선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내 생각과 전혀 다른 방향일지라도 주님의 선하심을 확신하며 오늘 내가 기쁘게 순종해야 할 자리는 어디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내 힘과 숫자를 의지하려는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의 손만 바라보는 용기를 주소서. 공동체 _ ‘많음’과 ‘크기’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시고, 내려놔야 할 것과 붙잡아야 할 것을 아는 지혜로운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60913 속회지도자 자료 2026-09-07 신내교회 260913 속회지도자 자료.pdf 9월 두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망설이는 발걸음, 달아나는 영광 사사기 4:1-10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십자가 군병들아(찬송 352장, 구 390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 봅시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젊은 나폴레옹’ 맥클렐런은 화려한 명성과 달리, 전장에서 소극적인 대처와 망설임으로 일관하여 번번이 승기를 놓쳤습니다. 결국 링컨 대통령은 그를 경질하고, 거침없이 전진하는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을 그 자리에 앉혔습니다. 이 과감한 결단은 기나긴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적 전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중함을 가장한 두려움과 망설임이 우리 내면에 숨어들 때, 하나님이 예비하신 승리의 기회는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명의 자리에서 우리는 계속 주저하고 있을 것인지, 아니면 믿음으로 과감히 도약할 것인지 결단해야 합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야빈의 학대가 극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드보라를 사사로 세우십니다(1-5절). 1) 가나안 왕 야빈은 이스라엘 백성을 ‘무엇’으로 ‘얼마 동안’ 괴롭혔습니까?(3절) 철 병거 구백 대로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철제 무기가 보편적으로 도입된 시기는 다윗과 솔로몬 왕정 이후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 군대의 주력 무기는 여전히 청동 재질에 머물러 있었다. 반면 이들을 대적하는 가나안 왕 야빈은 무려 ‘철 병거 900대’라는 시대를 앞서간 최첨단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대 최고의 대제국이었던 이집트가 보유한 전차가 약 2,000대 수준이었음을 감안할 때, 가나안의 한 지역 왕에 불과했던 야빈이 900대의 철 병거를 굴렸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압도적인 규모다. 청동 곤봉과 칼을 든 이스라엘과 철갑을 두른 전차 부대의 대결은 처음부터 인간의 계산으로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절대적 격차였다. 야빈은 이 압도적인 기술과 무력을 앞세워 이스라엘을 20년 동안이나 잔인하게 짓밟고 학대했다. 2) 야빈의 학대가 극심하던 상황에서 누가 사사가 되었습니까?(4절) 랍비돗의 아내인 여선지자 드보라 강력한 철 병거를 앞세운 야빈의 군대를 물리치려면, 상식적으로 그보다 더 압도적인 군사력이나 카리스마를 지닌 용맹한 장수가 나서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우신 사람은 놀랍게도 ‘랍비돗의 아내이자 여선지자인 드보라’였다. 철저한 남성 중심 사회였던 고대 근동의 시대적 배경이나 군사적 스펙으로만 본다면, 그녀는 야빈의 전차 부대를 상대하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연약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의 계산과 상식을 철저히 뛰어넘는다. 하나님은 불가능해 보이는 조건 속에서 오히려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선명하게 드러내신다. 900대의 철 병거라는 거대한 무기 앞에 연약한 여인을 지도자로 세우신 이 파격적인 부르심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인간의 무력이나 스펙에 있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권능에 달려 있음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가장 눈부시고 ‘하나님다운’ 선택이다. 나눔 1 하나님은 크고 강한 것을 주목하는 세상의 기준을 뒤집고 여성 드보라를 세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내 자격이나 연약함 때문에 주저할 때, 뜻밖의 자리로 불러 사명을 맡기신 하나님의 선택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2. 바락이 출전을 망설이는 사이, 그가 얻을 영광이 다른 이에게로 돌아갑니다(6-10절). 1) 군대 지휘관으로 발탁된 바락이 출전을 망설이며 드보라에게 제시한 조건은 무엇입니까?(8절)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이스라엘의 군대 지휘관으로 선택된 바락은 야빈이 가진 900대의 철 병거라는 압도적인 무력 앞에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그는 출전을 주저하며 드보라의 동행을 절대적인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군대 지휘관으로서의 당당함이 결여되었거나, 패전의 책임을 선지자에게 전가하려는 유약한 계산으로 봐야 할 것이다. 물론 바락의 행동에 대한 다른 견해도 있다. ‘드보라’는 본래 ‘벌’(bee)을 뜻하지만, 그 자음의 뿌리는 ‘말씀’ 혹은 ‘말하다’를 의미하는 ‘다바르’와 긴밀히 연결된다. 이 언어유희를 해석에 적용해 본다면, 바락의 조건은 “나는 하나님의 ‘말씀’(드보라)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철저한 신앙적 의지로 해석할 수도 있다. 바락의 모습을 해석하는 유일한 정답은 없다. 다만 이어지는 내용은 바락을 긍정적으로만 보게 하지는 않는다. 2) 바락에게 동행을 약속하면서도 드보라는 그가 어떻게 될 거라고 일러 줍니까?(9절)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할 것이며, 여호와께서 적장 시스라를 한 여인의 손에 파실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전쟁에서 군대 장관 바락이 보여 준 주저함과 온전치 못한 신뢰는 결국 ‘영광의 박탈’이라는 뼈아픈 결과로 이어진다. 드보라는 바락의 동행 요청을 수락하면서도, 전쟁의 가장 빛나는 전과인 적장 시스라를 처단하는 명예는 바락이 아닌 ‘한 여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기묘한 예언은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을 통해 성취된다. 패전 후 도망쳐 숨어든 시스라를 안심시킨 뒤, 그가 잠든 사이 장막 말뚝을 관통시켜 죽인 인물이 바로 ‘헤벨의 아내 야엘’이다. 이 사건은 철저한 남성 중심 사회였던 고대 근동에서 늘 남편에게 종속된 채 이름 없이 살아가던 ‘누군가의 아내’들을 하나님의 구원 무대 전면에 주역으로 등장시킨다. 철 병거 900대라는 압도적인 문명의 힘을 과시하던 대장군 시스라는 이스라엘의 대군이 아니라, 정규 군사 훈련조차 받지 않은 한 평범한 여인의 손에 무참히 꺾였다. 하나님은 이처럼 가장 낮고 무력해 보이는 이들을 선택하심으로써, 세상의 힘을 자랑하는 자들을 가장 부끄럽게 만드시고 오직 여호와만이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사람들의 가슴에 아로새기신다. 나눔 2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도 귀하지만, 막막할 때마다 주님보다 사람이 먼저 떠오른다면 내 신앙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사람의 조언을 구하기에 앞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고백하며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나눔 3 드보라는 겁먹은 바락을 비난하기보다 그의 요청대로 기꺼이 전장까지 동행하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번 한 주간 곁에서 묵묵히 주님의 위로와 사랑을 전하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고 그를 어떻게 섬길지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세상의 철 병거를 겁내지 않고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며 믿음으로 전진하게 하소서. 공동체 _ 연약하여 망설이는 지체에게 기꺼이 곁을 내어주며 함께 사명의 길을 걷는 따뜻한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60906 속회지도자 자료 2026-09-04 신내교회 260906 속회지도자 자료.pdf 9월 첫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듣지 않아 흘리는 눈물 사사기 2:1-10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어려운 일 당할 때(찬송 543장, 구 342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 봅시다. 1980년대 범죄의 온상이던 뉴욕 지하철이 평화를 되찾은 비결은 거창한 소탕 작전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지하철의 낙서를 지우고 쓰레기를 치우는 등, 작은 질서를 바로잡은 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작은 변화로 불과 석 달 만에 경범죄가 줄어들었고, 수년 만에 강력범죄까지 급감했습니다.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하면 공동체 전체가 무너진다는 ‘깨진 유리창 법칙’은 신앙생활에도 동일하게 작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주민과 언약을 맺고 이방 제단을 조금 남겨 둔 일을 고작 몇 가지 약속을 어긴 ‘작은 틈’이라고 여겼을 테지만 하나님은 그 사소한 타협이 결국 공동체의 거룩함을 송두리째 붕괴시키는 치명적인 균열이 될 것임을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책망 앞에 뒤늦은 후회의 눈물을 흘립니다(1-5절). 1) 하나님이 가나안 땅의 주민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두 가지 명령은 무엇입니까?(2절)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셨다. 고대 근동에서 다른 민족과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단순한 정치·경제적 동맹을 넘어, 서로가 믿는 신을 동등하게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종교적 결합을 내포했다. 모든 신을 포용하는 다신교 가치관의 가나안 족속에게 여호와는 ‘수많은 신 중 하나’로 쉽게 흡수될 수 있었지만, 오직 유일신만을 섬겨야 하는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타협은 신앙의 근간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치명적인 독약이었다. 세상과 적당히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려는 이 작은 타협의 틈새는, 결국 훗날 이스라엘 민족이 ‘혼합종교’의 늪에 빠져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비극적인 영적 부패의 씨앗이 되었다. 제단을 헐어 버리지 않은 방관이 결국 전체를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된 것이다. 2) 하나님의 책망과 경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4-5절) 소리 높여 울면서 그곳의 이름을 ‘보김’(우는 자들)이라 하였으며, 거기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의 준엄한 책망 앞에 이스라엘 백성은 깊은 두려움을 느끼며 소리 높여 울었다. 온 회중이 통곡하며 그곳을 ‘보김’(우는 자들)이라 부르고 제사까지 드린 이 장면은 얼핏 철저한 영적 각성과 회개의 순간처럼 보인다. 그 순간 그들이 흘린 눈물과 지난날의 불순종에 대한 후회만큼은 결코 거짓이 없는 진실한 감정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사사기의 역사 속에서 곧바로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출현하는 비극을 목도할 때, 우리는 이 눈물의 실체를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감정적인 눈물과 일시적인 종교 행위는 그 자체로 미래를 뒤바꾸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 참된 회개는 북받쳤던 감정이 가라앉은 후, 삶의 자리로 돌아가 어제와 다른 선택을 내리며 하루하루를 돌이키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완성된다. 보김의 통곡은 뜨거웠으나 일상의 순종으로 이어지지 못한 감정적 후회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 준다. 나눔 1 삶의 철저한 돌이킴이 결여된 후회와 눈물로는 영적인 무너짐을 막지 못합니다. 내 삶에서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해 뒤늦은 후회를 남긴 ‘나만의 보김’은 무엇이었는지 나눠 봅시다. 2. 이전의 세대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다른 세대’가 일어납니다(6-10절). 1)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섬겼습니까?(7절)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이다. 보김에서의 눈물이 아무리 진심이었을지라도, 축적된 불순종의 결과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결국 여호수아와 그 시대에 하나님의 크신 일을 목도했던 거목 같은 장로들이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지자, 이스라엘의 영적 울타리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 같은 영적 세대교체의 실패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부모의 탁월한 영성과 헌신적인 신앙의 삶이 자녀의 구원과 신앙을 자동으로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은 혈통이나 환경으로 물려받는 자산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과 각 개인 사이에 일어나는 일대일의 인격적 만남에서 출발한다. 부모 세대가 자녀를 위해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의 터전을 닦아 주는 데만 치중할 때, 역설적으로 그 풍요는 하나님을 가리는 장막이 되기 쉽다. 역경 없는 안일함은 자녀들을 하나님을 단지 자신의 성공 도구로 이용하려는 기복신앙의 늪에 빠뜨리며, 결국 영적 감각을 마비시키는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늘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2) 여호수아의 세대가 지나고 나타난 새로운 세대의 비극적인 실상은 무엇입니까?(10절)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했다.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고 할 때, ‘알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야다’이다. 이 단어는 단순히 머리로 정보를 이해하는 지식적 습득을 넘어, 관계 속에서 직접 겪고 부딪치며 체화하는 ‘경험적 앎’을 뜻한다. 즉, 새로운 세대가 하나님을 몰랐다는 것은 여호와라는 신에 대한 종교적 정보나 역사적 사실을 전혀 듣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은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지식적 데이터는 가지고 있었으나, 정작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한 ‘자기만의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사람은 인생의 중대한 선택이나 위기에 직면했을 때, 머리로 아는 지식보다 가슴으로 겪어 낸 경험적 확신에 의존해 결정을 내린다. 새로운 세대에게는 이 직접적인 경험이 없었기에, 삶의 작은 흔들림 앞에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가나안의 풍요와 가치관에 쉽게 휩쓸려 가고 말았다. 지식이 신앙으로 도약하지 못한 자리에 남은 것은 결국 비극적인 영적 표류다. 나눔 2 타인의 신앙에 의존하는 ‘빌려 온 믿음’은 영적 지도자가 사라지거나 환경이 바뀌면 쉽게 흔들립니다. 다른 사람의 열심에 편승하지 않고 주님과 나만의 인격적인 사귐을 누리는 경건의 자리는 어디인지 나눠 봅시다. 나눔 3 부모 세대가 신앙 전수를 멈출 때 우리의 소중한 자녀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세대’로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주님을 직접 만나 믿음의 세대로 굳건히 서도록, 오늘 내가 보여 주어야 할 모범은 무엇인지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가볍게 여긴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되새기며, 매 순간 순종하게 하소서. 공동체 _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말씀으로 믿음의 세대를 키우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60830 속회지도자 자료 2026-08-26 신내교회 260830 속회지도자 자료.pdf 8월 다섯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위협에 맞서는 기도 이사야 37:1-20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찬송 95장, 구 82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 봅시다. 믿음의 진가는 평안할 때가 아니라, 폭풍우가 몰아칠 때 드러납니다. 아버지 아하스는 위기 앞에서 눈에 보이는 강대국 앗수르를 의지했지만, 아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그는 자신의 능력이나 외교력이 아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유일한 소망으로 삼습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세상의 위협 앞에서 우리가 펼쳐 놓아야 할 것은 절망의 편지가 아니라, 간절한 기도의 제목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위기의 순간, 히스기야는 그 문제를 하나님께 아룁니다(1-7절). 1) 랍사게의 오만한 망언을 들은 히스기야는 어떻게 행동합니까?(1-4절)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갔으며, 이사야에게 기도를 요청했다. 시리아(아람)-에브라임 동맹군이 반앗수르 전선을 형성하면서 남유다를 위협할 때(주전 735-732년) 남유다의 아하스 왕과 유다 백성의 마음은 마치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7:2) 흔들렸다. 이때 이사야 선지자가 나서서 시리아-에브라임 동맹군은 결국 패할 것이기에 유다가 외세를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권면했다. 하지만 유다 백성은 이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앗수르를 의지하며 살 궁리를 찾았다. 앗수르의 참전으로 시리아는 멸망하고 북이스라엘 역시 치명타를 입게 된다. 유다 입장에서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구원을 받은 것처럼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건 도둑고양이 한 마리 집에서 내쫓겠다고 집 안에 호랑이를 불러들인 격이나 마찬가지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주전 722년) 이제 남유다까지 집어삼키려 하기 때문이다. 이사야 37장의 배경은 주전 701년 산헤립이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상황이다. 히스기야는 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놀랍게도 아버지 아하스와는 다르게 신앙의 길을 걷는다. 그는 먼저 이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고 선지자에게 중보 기도를 요청하는 동시에 그와 신하들이 모두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다. 2) 낙심한 히스기야에게 이사야가 전한 하나님의 위로와 약속은 무엇입니까?(5-7절) 앗수르 왕의 종들이 하나님을 능욕한 말로 인해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으며, 하나님이 그를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여 칼에 죽게 하실 것이라 약속하셨다. 전황으로만 보면 예루살렘성은 오늘 함락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하나 빼놓고 주변 모든 나라와 성읍이 앗수르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마치 섬처럼 홀로 남았다. 주변 나라/성읍의 군사 원조나 물자 지원 없이 유다가 홀로 버텨야 했다. 앗수르는 사방으로 예루살렘을 포위하면서 고도의 심리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전의(戰意) 자체를 꺾으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영이 앗수르 왕에게 들어가서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것이며, 왕은 소문을 듣고 급히 고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을 거라는 거다. 이 예언의 말씀은 실제 역사 속에서 성취된다. 나눔 1 히스기야는 조롱 섞인 위협을 듣자마자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최근 내가 마주한 문제 앞에서, 나의 첫 반응은 ‘염려와 하소연’이었는지, 아니면 ‘주님 앞에서의 엎드림’이었는지 나눠 봅시다. 2. 끈질긴 위협 앞에서 히스기야는 다시 기도의 무릎을 꿇습니다(8-20절). 1) 앗수르 왕 산헤립이 히스기야에게 보낸 편지의 핵심 내용은 무엇입니까?(9-13절)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의 손에 넘기지 않으신다는 말에 속지 말라는 것, 열방의 신들이 그 백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산헤립이 라기스와 예루살렘 사이 립나 성을 공격하고 있을 때, 구스(현 북 수단과 에티오피아) 왕 디르하가가 군사를 일으켜 출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당시 구스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이집트 제25왕조, ‘검은 파라오 시대’를 열었다. 구스 왕 디르하가는 이집트 25왕조의 네 번째 파라오다. 즉 구스 왕 디르하가는 단지 구스 군대만이 아니라 구스-이집트 연합군을 이끌고 출정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산헤립은 마음이 조급해져서 히스기야에게 편지를 쓴다. 산헤립이 처음에는 백성들에게 히스기야 왕을 믿지 말라고 위협하더니(사 36장), 이제는 여호와는 앗수르를 이길 수 없는 무능력한 신이라며 신성모독적인 편지를 쓴다(사 37장). 2) 산헤립의 편지를 받은 히스기야는 어떻게 행동합니까?(14-15절) 그 편지를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가서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 놓고 기도했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으로부터 신성모독적인 편지를 받고 그 편지를 그대로 성전에 가지고 올라가 여호와 앞에 펴 놓는다.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한다. 히스기야가 그의 아버지 아하스와 다른 점은 당면한 문제를 하나님 앞에 아뢴다는 것이다. 히스기야는 자기 힘이나 외세의 원조가 아닌 하나님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한다. 신앙의 진정성은 위기 시에 드러난다. 3) 히스기야가 궁극적으로 간청한 것은 무엇입니까? (20절)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이사야 37장에서 산헤립의 신성 모독적 발언과 히스기야의 경건한 태도가 대조된다. 앗수르 산헤립왕의 교만이 하늘을 찌른다. 편지에 의하면 앗수르가 점령하지 못한 나라가 없으며, 세상 모든 나라의 신들이 앗수르의 공격 앞에 무력하게 무너졌다. 여호와도 그런 무능력한 잡신 중 하나라는 것이다. 히스기야는 경건한 자로서 이 신성모독적 발언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영적인 의분을 내며 이 신성모독적 편지 자체를 하나님께 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친히 치시고 그의 손으로부터 유다를 구원해 주시길 간구한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치시고 열방의 어떤 신보다 더 위대한 참 신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나타내 주시기를 간구한다. 나눔 2 산헤립의 편지처럼 우리 주변은 ‘하나님을 믿어도 소용없다’는 속삭임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내 마음을 더 지배하며 신앙을 흔들어 놓는 ‘세상의 위협적인 소리’는 무엇입니까? 나눔 3 히스기야는 개인의 안위보다 하나님의 명예가 훼손되는 것을 더 아파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나의 기도가 내 문제 해결에만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 위해 새롭게 결단하며 간구할 기도 제목은 무엇인지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제일 먼저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을 주소서. 공동체 _ 세상의 조롱 앞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선포하며, 주의 영광만을 구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60823 속회지도자 자료 2026-08-19 신내교회 260823 속회지도자 자료.pdf 8월 네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패역한 자녀에게 이사야 26:1-27:1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돌아와 돌아와(찬송 525장, 구 315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 봅시다. 고집과 소신은 비슷한 것 같지만, 본질이 전혀 다릅니다. 고집이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는 비겁한 자기 확신이라면, 소신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내 자존심마저 기꺼이 내려놓는 거룩한 용기입니다. 과거 유다 백성은 국가적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묻기보다 애굽에 기대는 치명적인 ‘고집’을 부렸습니다. 오늘날 주님은 여전히 고집스런 우리를 향해 얄팍한 자구책을 버리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말씀 앞에서 고집을 꺾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 유일한 길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유다는 강대국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세상 권력의 그늘을 택합니다(1-11절). 1) 하나님이 유다를 ‘패역한 자식들’이라고 꾸짖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1-2절) 여호와께 묻지 않고 자기 계교(계획)를 베풀며,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않고 애굽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예언이 주어진 시기는 앗수르가 아스돗을 점령한 주전 711년과 예루살렘 포위가 이뤄진 주전 701년 사이로 볼 수 있다. 이때 선지자의 예언은 유다가 앗수르 군대를 막으려고 함부로 애굽과 동맹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군사적 안전보장을 추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유다의 외교 사절단이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계획에 따라 행동하는 패역한 자들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강대국을 의존하며 동맹을 맺으려는 것을 강력하게 규탄하신다. 2) 애굽을 의지한 유다가 얻게 될 결과는 무엇입니까? (3-5절) 애굽으로부터 도움은커녕 도리어 수치만 당할 것이다. 4절의 고관들과 사신들은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외교 사절단을 의미한다. 이들은 앗수르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서는 애굽의 도움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며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려고 애굽에 내려갔다. 하지만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믿었던 애굽으로부터 수치와 모욕만 당한다. 사실 애굽은 유다를 도울 만한 힘이 없었다. 애굽은 이미 상한 갈대와 같아서 누구를 도울 처지가 못 되었다. 그럼에도 유다는 하나님은 의지하지 않으면서, 도울 힘이 없는 세상 권력 집단을 의지하려 한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권력자를 의지할 때 세상으로부터 도움은커녕 오히려 버림받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한다. 3) 패역한 백성이 선견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10-11절) 바른 것을 보이지 말고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하나님을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고 요구한다. 자기 꾀에 빠져 사는 이들은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정작 세상의 작은 위협은 몹시 두려워한다. 그래서 선지자가 이런 패역한 백성의 불신앙을 바로잡으려 하는데 정작 백성은 선지자에게 말씀을 전하지 말라고 강짜를 부린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진실을 정직하게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어려움을 피하려다 정작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만다. 하지만 선지자를 위협하며 예언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도 멈추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의사와 상관없이 엄위하게 선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서 성도는 자기 입맛에 맞는 말씀을 선택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어떤 말씀이든 “아멘!” 하고 순종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나눔 1 유다는 눈앞의 위협(앗수르)을 피하려고 또 다른 세상의 힘(애굽)을 의지했다가 더 큰 수치를 당했습니다. 하나님보다 나를 안전하게 지켜 줄 것 같아 마음에 의지가 되는 ‘나의 애굽’은 무엇인지 나눠 봅시다. 나눔 2 내 생각과 반대되는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최근 말씀을 듣거나 묵상할 때, 내 굳은 신념을 건드려 마음이 몹시 아프고 불편했지만, 돌아보면 결국 내 영혼을 살린 ‘진리의 말씀’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2.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한 유다가 쇠락의 길을 걷습니다(12-17절). 1)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듯이 하나님이 유다를 심판하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12-14절) 유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애굽을 의지하며, 허망한(패역한)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유다의 권력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세상의 허망한 걸 붙잡고 의지하려 한다. 이 죄로 인해 그들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마치 잘못 쌓아 불쑥 튀어나온 담벼락이 장마철에 습기가 차서 갑자기 무너지듯이 유다 왕국도 그렇게 한순간에 패망할 것이다. 이것은 엄위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마치 토기장이가 잘못 빚어진 토기를 깨뜨리듯이 하나님께서 유다 왕국을 철저히 심판하실 것이다. 다시 복구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유다는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하나님이 유다를 이처럼 심판하려는 이유는 그들이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2) ‘회개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을 거부한 유다의 결국은 무엇입니까?(15-17절)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여 쇠락의 길을 걷는다.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슈브, 회개) 촉구했지만, 유다 백성은 이 말씀을 거부한다. 그들은 잠잠히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느니 애굽과 연대해서라도 앗수르와 싸울 거라며, 빠른 말을 타고 도망갈지언정 앗수르에게 무릎 꿇지 않겠다고 객기를 부린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준마를 타고 도망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아무리 빠른 말을 타고 도망할지라도 쫓는 자가 더 빨라서 결국 따라잡히고 말 것이다. 17절의 유다의 모습은 참으로 비참하다.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고, 다섯 사람이 꾸짖은즉 모든 사람이 다 도망하여서, 예루살렘에 사람은 없고 깃대만 남게 될 것이다. 나눔 3 하나님은 우리가 분주히 움직이며 허망한 것을 의지하기를 멈추고, 주 안에서 ‘잠잠히 신뢰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이번 한 주간, 내 힘으로 해결하려던 분주함을 내려놓고 주께 맡김으로 평안을 누려야 할 영역은 무엇인지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내 계획이 말씀에 비추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즉시 돌이키게 하소서. 공동체 _ 세상의 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하며, 잠잠히 기다리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60816 선교회 모임 자료 2026-08-08 신내교회 8월_선교회_모임_요약자료_최종.pdf 8월_선교회_모임_요약자료_최종.pdf 260809 속회지도자 자료 2026-08-05 신내교회 260809 속회지도자 자료.pdf 8월 두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경영 이사야 14:24-15:9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찬송 419장, 구 478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고 눈앞의 막막한 현실이 우리를 압도할 때, 종종 세속적인 방법으로 타협하고 싶은 유혹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온 열방을 향한 원대한 ‘경영’(계획)을 쉬지 않고 이루어 가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꺾으시고 기댈 곳 없는 연약한 백성을 끝까지 보호하십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굳게 신뢰하며 그 품에 거하는 사람은 어떠한 현실에서도 흔들림 없이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앗수르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계획입니다(14:24-27). 1) 여호와의 ‘경영’(계획)에는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24, 27절) 하나님의 ‘경영’(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누구도 폐하거나 돌이킬 수 없다. 24-27절은 교만한 앗수르 제국에 대한 심판 예언이다. 이는 이사야 10:5-11을 생각나게 한다. 원래 앗수르는 하나님의 심판 도구(몽둥이, 막대기)다(10:5). 하나님은 앗수르를 ‘징계의 회초리’로 사용하셔서 경건하지 않은 나라를 심판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 도구인 앗수르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교만하게 허다한 나라를 파괴했다(10:7). 그래서 하나님께서 앗수르에 대한 심판을 계획하신 것이다. 이사야 14:24, 27에서, 하나님은 앗수르를 향한 심판 계획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엄위한 심판을 막을 수 없다. 하나님의 심판은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실현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 개입만이 앗수르의 교만을 깨뜨릴 수 있다. 2) 앗수르를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경영은 무엇입니까?(25절) 앗수르를 ‘하나님의 땅’에서 파하며, ‘하나님의 산’에서 짓밟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철저히 분쇄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앗수르를 철저히 심판하시는 이유는 단지 억압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앗수르의 손에서 구출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이렇게 강력하게 파하시는 이유는 앗수르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며 스스로 왕 노릇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앗수르의 교만을 깨뜨리기 위해 심판의 칼을 드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과 위엄에 도전하는 모든 열방과 제국을 의롭게 심판하신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그의 뜻과 상관없이 세상을 억압하고 통치하는 모든 악한 권력을 반드시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계획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나눔 1 하나님의 경영은 역사의 한복판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영원할 것만 같은 세상 권세를 보며 낙심하거나 부러워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지금 내가 끝까지 붙들고 신뢰해야 할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인지 나눠 봅시다. 2. 블레셋과 모압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14:28-15:9). 1) 자신을 치던 막대기가 부러졌다며 기뻐하는 블레셋에게 어떤 경고가 임합니까?(29-31절) 비록 막대기가 부러졌을지라도 더 무서운 독사가 나올 것이며, 결국 블레셋은 기근으로 죽고 대적의 공격에 살육당할 것이다. 시리아-에브라임 연합군이 남유다에게 반앗수르 동맹을 강요하지만, 유다가 이를 거절하자 예루살렘을 공격한다. 이에 아하스왕은 앗수르에 도움을 요청한다. 그래서 앗수르는 군사를 일으켜 시리아(아람)를 멸망시키고, 북이스라엘(에브라임)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이게 바로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다(주전 735-732년). 이 전쟁 이후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3세는 주전 727년에 사망하고, 남유다의 아하스는 주전 715년에 사망한다. 29절의 ‘막대기’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남유다의 아하스 왕, 둘째,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3세다. 막대기의 정체가 누구든 그 막대기가 꺾였다고 블레셋이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뱀의 뿌리에서 독사가 나오듯이 강한 군주가 사라지면 그 뒤에 더 무서운 왕이 나타나서 블레셋을 멸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2) 반앗수르 동맹을 요구하는 블레셋 사신들에게 예언자는 무엇이라고 답합니까?(32절)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 유다 왕 아하스가 죽자, 블레셋은 은근히 유다가 반앗수르 전선에 동참하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사신을 보내 반앗수르 동맹에 동참하라고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선지자는 유다가 블레셋의 이 요구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유다의 진정한 보호자이며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시온(유다)의 운명은 동맹 여부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에 유다는 외세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3) 모압의 대표적인 성소가 있는 ‘디몬’(디본)의 물에는 무엇이 가득하게 됩니까?(15:9) 피가 가득할 것이다. 디몬은 ‘디본’을 가리킨다. 디본은 모압의 대표적인 성전이 있는 곳이다. 즉 디본은 모압의 중심지이며, 모압 신의 돌봄을 받는 축복받은 성읍이다. 마치 유다가 예루살렘을 성지로 생각하듯이 모압 사람들은 디본을 거룩한 도시로 생각했다. 그리고 디본 성읍은 화려하고 풍요로워서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모압 백성은 이곳에 피하면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삶의 안정을 디본에서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 디본이 피로 가득할 거라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마치 출애굽 당시 나일강이 붉은 피로 물들 듯이 디본이 그렇게 피로 물들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인간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성읍도 죽음의 도시가 될 것이다. 나눔 2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확실한 수단에 기대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기보다 먼저 찾아가려 했던 ‘나만의 동맹군’은 무엇이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나눔 3 세상의 요새인 ‘디몬’은 무너져도 하나님이 세우신 ‘시온’(교회)은 곤고한 자들의 영원한 피난처가 됩니다. 무너져 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 공동체가 서로에게 따뜻한 피난처가 되어 주었던 은혜의 기억을 서로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인간적인 계산보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주님의 약속을 먼저 붙들게 하소서. 공동체 _ 우리 교회가 고난당하는 이웃들이 찾아와 쉴 수 있는 피난처가 되게 하소서. 260726 속회지도자 자료 2026-07-25 신내교회 260726 속회지도자 자료.pdf 7월 네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거룩한 하나님, 거룩하지 못한 백성 이사야 6:1-13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날 대속하신 예수께(찬송 321장, 구 351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 봅시다. 괴사한 신체 부위를 방치하면 패혈증 같은 치명적인 위기를 맞습니다. 환자는 신체의 일부를 잃어야 하는 고통에 절망하지만, 의사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단호히 수술용 칼을 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무서운 심판을 내리신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영적인 무감각으로 이미 부패해 버린 부분을 도려내지 않으면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썩은 살을 베어 내는 일은 몸서리쳐질 만큼 참혹한 고통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만이 죽어 가는 이스라엘을 살려 낼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었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이사야는 성전에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1-7절). 1) 스랍들은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찬양합니까?(2-3절)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한다. 이사야 6장에 등장하는 ‘스랍’(사라프)은 매우 독특한 존재다. 구약에서 총 7회 사용된 이 단어는 이사야 6장(2회)을 제외한 나머지 구절에서 모두 ‘불뱀’으로 번역된다. 이러한 언어적 용례를 통해 스랍이 단순히 소식을 전하는 부드러운 천사가 아니라, 심판의 고통과 타오르는 불길을 연상시키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주를 이루는 이사야서 전반부(1~39장)의 문맥을 고려할 때, 불타는 존재인 스랍은 심판주의 위엄을 보좌하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들이 외치는 ‘거룩’(카도쉬)은 본래 ‘구별됨’을 의미한다. 즉, 스랍이 찬양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 계실 뿐만 아니라, 그 거룩함의 빛으로 인간의 죄에 대해 엄중히 책임을 물으시는 불타는 공의를 선포하는 것이다. 2) 이사야의 악을 제하고 죄를 사하기 위해 스랍은 어떤 일을 합니까?(6-7절)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날아와서 이사야의 입술에 대었다. 본문의 장면은 언뜻 입술을 불로 지지는 고통스러운 형벌처럼 보이지만, 환상 속에 담긴 심오한 상징에 주목해야 한다. 성전 제단 아래의 숯은 단순한 제사의 부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불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신성한 매개체다. 율법에 따라 오직 제단의 불만을 성소에 사용해야 했다. 스랍이 이 숯을 이사야의 입술에 댄 행위는 제물의 피를 흘리는 전통적 제사와는 또 다른 형태의 ‘직접적인 속죄’다. 죄 사함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지만, 그 죄를 태워 없애는 과정에는 반드시 뼈아픈 고통이 동반된다. 나눔 1 이사야가 겪은 숯불의 고통은 장차 이스라엘이 심판을 통해 정화될 것을 예표합니다. 내 삶에서 죄와 교만을 태워 없애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정화의 시간’이 있습니까? 당시에는 고통스러웠던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어떻게 정결해지고 주님과 가까워졌는지 나눠 봅시다. 2.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알릴 사자로 이사야가 자원합니다(8-13절). 1)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누구를 보낼지 고민하실 때 이사야는 어떤 말로 자원합니까?(8절)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스라엘을 위해 보낼 적임자를 찾으시자, 이사야는 주저 없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한다. 우리는 흔히 이 장면을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한 영광스러운 헌신의 순간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사명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이 결단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가 전해야 할 메시지는 회복이 아니라 심판이었으며, 백성의 마음을 더욱 둔하게 만들어 멸망을 확정 짓는 ‘실패가 예정된 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사야의 자원은 자기 민족의 파국을 정면으로 목도하면서도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끝까지 대언해야 했다. 사명의 참담한 무게를 미리 알았더라도 이토록 신속히 손을 들 수 있었을지 자문하게 될 만큼, 그의 순종은 인간적 고뇌를 압도한다. 2)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맡기신 임무는 무엇입니까? (10절)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는 것이다. 이는 선지자의 기대를 완전히 뒤엎는 당혹스러운 명령이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용서나 회복을 섣불리 선포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엄중한지 깊이 통감했을 것이다. 자신이 숯불로 입을 지져서 죄가 용서되었던 것처럼, 심판에는 적당한 타협이나 쉬운 지름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 백성을 영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들라는 이 역설적인 임무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필연적인지를 강력하게 시사한다. 3) 이사야는 이 사역을 언제까지 수행해야 합니까?(11-12절)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 이 엄중한 선포는 과거 온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던 사건을 떠올리게 할 만큼 단호하고 철저하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듯한 극한의 상실감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깊고 무거웠는지를 보여 준다. 만일 이 무서운 심판이 여기서 마침표를 찍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깊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모든 것이 베임을 당한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이 남겨 두신 마지막 희망은 무엇입니까?(13절) 그루터기, 곧 거룩한 씨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철저한 파괴를 예고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분의 궁극적인 시선은 ‘파멸’이 아닌 ‘재건’에 머물러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베어 내신 이유는 단순히 없애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거룩한 씨’만이 자랄 수 있는 정결한 토양을 만들기 위함이었음을 우리는 이 마지막 구절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나눔 2 이사야는 전해도 듣지 않는 백성에게 끊임없이 심판을 외쳐야 합니다.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어 낙심했던 영역이 있습니까?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내게 주어진 자리를 묵묵히 지키기 위해 필요한 마음가짐은 무엇인지 나눠 봅시다. 나눔 3 하나님은 다 태워 버리는 불같은 심판 중에도 다시 시작할 ‘그루터기’를 남겨 두십니다. 관계, 상황, 내면 등 지금 내 삶에서 가장 황폐해진 부분은 무엇입니까? 그곳에 주님이 남겨 두신 ‘작은 그루터기’(희망의 증거)가 있다면 무엇인지 찾아보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삶의 모진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내 안에 간직하게 하소서. 공동체 _ 우리 공동체가 주님이 남기신 거룩한 그루터기로 온전히 서게 하소서. 260719 선교회 모임 자료 2026-07-15 신내교회 7월_선교회_모임_요약자료_최종.pdf 260712 속회지도자 자료 2026-07-08 신내교회 260712 속회지도자 자료.pdf 7월 두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사람을 향하신 주님 시편 8:1-9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찬송 79장, 구 40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 봅시다. 웅장한 산맥과 광활한 평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 앞에서 우리는 종종 대자연의 장엄함에 압도당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토록 경이로운 우주 만물조차 하나님의 손끝에서 빚어진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저 광활한 우주와 창조주이신 당신 사이에 ‘인간’을 세워 두셨습니다. 시편 8편의 시인은 인간이 자연보다 존귀하며, ‘하나님보다 조금 못할 뿐’이라고 벅차게 노래합니다. 흙으로 지어진 유한한 우리가 어찌 창조주보다 단지 ‘조금’ 못한 존재일 수 있겠습니까? 시인이 진정 말하려 한 본질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시선이 그토록 특별하고 위대하다는 사실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하나님의 영광은 하늘을 뛰어넘습니다(1-3절). 1)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을 덮었다고 말합니까?(1절) 하늘 현대인이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은 성경이 고대인의 언어와 세계관을 통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 시편을 묵상할 때도 당대 세속적 가치관에 대항하는 시인의 신앙적 시선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대인들에게 ‘하늘’은 단순히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늘의 해와 달, 별 자체를 신(神)으로 숭배했으며, 그곳을 수많은 신이 거주하며 세상을 움직이는 신성한 처소로 여겼다. 이러한 다신론적이고 범신론적인 배경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위엄이 하늘을 덮었다”고 선포한다. 이는 이방인들이 신성시하던 하늘조차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음을 선언하는 파격적인 신앙 고백이다. 이처럼 시인은 당대의 가치관에 정면으로 맞서며, 온 우주의 진정한 통치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드러낸다. 2) 하나님은 대적들을 잠잠하게 하기 위해 누구의 입을 통해 권능을 세우십니까?(2절)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 고대 사회에서 신의 대리자는 항상 왕이나 제사장처럼 높은 계급과 강력한 힘을 가진 인물이었다. 신의 위엄을 드높일 자격이 있는 존재는 응당 사회적 정점에 있는 권력자일 때 신의 위엄이 더 높아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세상의 가치관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하나님은 화려한 권력을 쥔 이들이 아니라, 당시 가치관으로는 가장 힘없고 미약한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을 통해 자신의 권능을 세우시는 분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지위나 물리적인 힘에 기대지 않음을 보여 주는 파격적인 선포다. 세속적인 힘의 논리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 사이에는 이처럼 거대한 간격이 존재한다. 가장 천하게 여겨지던 자의 입술을 통해 대적들의 기세를 꺾으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진정한 권위다. 나눔 1 우리를 짓누르는 커다란 문제들도 광활한 밤하늘의 별들을 손가락으로 만드신 하나님께는 티끌 같을 뿐입니다. 요즘 나를 막막하게 만드는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크심을 묵상할 때, 그 문제가 어떻게 새롭게 해석되는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2. 하나님은 사람을 존귀하게 대하십니다(4-9절). 1) 시인은 인간을 어떤 말로 표현하며,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어떻게 대하십니까?(4절) 시인이 ‘사람’과 ‘인자’라고 표현한 인간을 하나님은 생각하고 돌보신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신화인 <에누마 엘리쉬>나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에 익숙했던 이들에게 자연은 그 자체로 신성한 존재였다. 신의 사체를 쪼개 세상을 만들었다는 신화적 관념은 자연 속에 신의 속성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그 안에서 인간은 만물보다 아래에 있는 비천한 존재이자 신들을 시중드는 도구로 여겨졌다. 그러나 시인의 선포는 당대의 가치관을 정면으로 뒤집는 가히 혁명적인 고백이다. 광활한 우주에 비해 인간이 비록 보잘것없는 ‘에노쉬’(사람)와 ‘벤 아담’(사람의 아들)에 불과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우주 만물보다 귀하게 여기시며 직접 생각하고 돌보신다.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만물을 다스리는 영광의 관을 씌우셨다는 시인의 노래는, 인간의 위상을 만물 위에 두시는 하나님의 파격적인 사랑을 고대 세계관의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드러낸다. 2) 하나님이 사람을 높이신 지위와 그에게 맡기신 것은 무엇입니까?(5-8절)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 또한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는 권한을 맡기셨다는 시인의 선포는 고대 세계의 종교적 근간을 뒤흔드는 놀라운 선언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해와 달, 별을 비롯한 대자연은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인 ‘신성한 실체’였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자연을 숭배의 자리가 아닌 인간의 다스림을 받는 자리로 옮겨 놓음으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뒤바꾼다. 3) 이 시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공통된 고백은 무엇입니까?(1, 9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인은 시의 처음과 끝을 동일한 찬양으로 장식하는 ‘수미상관’ 방식을 통해, 온 땅에 가득한 여호와의 이름이 지닌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고대 세계의 사람들은 자연을 무수한 신들의 각축장으로 인식했다. 그들에게 신은 변덕스럽고 폭력적인 존재였기에, 인간은 신들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끊임없이 제사를 바쳐야 하는 나약하고 피동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인이 노래하는 하나님의 통치는 이러한 비극적 세계관을 완전히 뒤바꾼다. 하나님은 인간을 억압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영광을 부여하시며 온 세상을 당신의 자비와 위엄으로 채우시는 분이다. 시인은 이 고백을 시의 입구와 출구에 배치함으로써, 신앙의 여정은 결국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발견하는 데서 출발하여 그분의 위대함을 확증하는 찬양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아름답게 보여 준다. 나눔 2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질 때, ‘하나님이 나를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되었던 적은 언제입니까? 나의 가치를 세상의 평가가 아닌 하나님의 시선에서 찾기로 결심한 지점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나눔 3 우리가 머무는 곳을 선하게 가꿀 때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집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작은 세상(가정, 일터, 소그룹)은 어디입니까? 그곳에서 하나님의 따뜻함과 공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이번 주 내가 책임감을 가지고 실천할 구체적인 행동은 무엇입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광활한 세상에서 먼지 같은 저를 기억하고 돌보시는 주님의 은혜를 오늘도 찬양합니다. 공동체 _ 우리에게 맡겨 주신 세상과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60705 속회지도자 자료 2026-07-04 신내교회 260705 속회지도자 자료.pdf 7월 첫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주께로 향하는 길 시편 1:1-6 높이가 무려 100미터에 달하는 캘리포니아의 레드우드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나무 중 하나입니다. 놀라운 점은 이 거목의 뿌리가 생각보다 아주 얕게 퍼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 나무는 수천 년의 거센 폭풍우를 견디며 거대한 몸집을 지탱해 온 것일까요? 그 비결은 바로 ‘연대’에 있습니다. 레드우드는 홀로 깊이 뿌리내리는 대신, 뿌리를 옆으로 넓게 뻗어 이웃한 나무들의 뿌리와 단단히 하나로 얽힙니다. 모진 비바람이 몰아쳐도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 주기에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의인의 공동체가 그토록 복되고 강인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복 있는 사람은 죄인과 연대하지 않습니다(1-2절). 1) 복 있는 사람이 하지 않는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1절)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시편 1:1은 복 있는 사람이 멀리해야 할 행동을 ‘걷다’(따르다), ‘서다’, ‘앉다’라는 점진적인 동사 변화를 통해 묘사한다. 이는 죄가 인간의 삶에 어떻게 은밀히 침투하여 견고하게 뿌리 내리는지를 탁월하게 보여 준다. 처음에는 단순히 악인의 ‘꾀’(생각)를 수용하며 함께 걷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그들의 ‘길’에 익숙해져 멈추어 서게 되고, 결국에는 오만함이라는 ‘자리’에 깊이 정착하게 된다는 경고다. 시인은 죄가 일회적인 유혹을 넘어 하나의 삶의 양식으로 고착되는 치명적인 과정을 날카롭게 통찰한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복은 죄의 영향력이 습관으로 굳어지기 전에 그 연결고리를 단호히 끊어 내는 거룩한 구별됨에서 시작한다. 2) 복 있는 사람이 즐겨 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2절)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 시인이 노래하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은 곧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과 같은 신앙적 태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주야’(晝夜)는 흔히 ‘항상’이라는 시간적 연속성으로 이해하지만, 이를 ‘밝은 낮’과 ‘어두운 밤’이라는 인생의 계절적 대조로 바라보면 그 의미가 더욱 풍성해진다. 지구가 자전하며 낮과 밤이 반복되듯, 우리 인생에도 기쁨이 충만한 시간과 고통스러운 시련의 시간이 교차하기 마련이다. 흔히 평탄한 낮의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기 좋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에 가장 깊이 새겨지는 계기는 칠흑 같은 ‘밤의 시간’이다. 삶의 가장 힘겨운 순간에도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갈망하며 말씀을 붙드는 사람이야말로, 환경에 매이지 않는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나눔 1 나를 무너뜨리는 것은 멀리 떼어놓아야 하고,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곁에 두려 애써야 합니다. 요즘 나의 하루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이나 ‘물건’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은 다릅니다(3-6절). 1) 시인은 의인을 무엇에 비유합니까?(3절) 시냇가에 심은 나무 팔레스타인은 강수량이 적어 물이 매우 귀한 지역이다. 이스라엘 문화에서 우기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하나님의 전적인 공급을 상징했다면, 사람이 직접 판 ‘웅덩이’는 한계가 있는 인간의 수고를 의미한다. 시인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마르지 않는 ‘시냇가’로 묘사했다. 따라서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가뭄과 같은 환경 변화에 휘둘리지 않는다. 생명의 근원인 물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시절을 좇아 자연스럽게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생명력을 유지한다. 결국 의인의 형통이란 내 능력이 아니라, 생명수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온전히 연결되어 있을 때 완성되는 것이다. 2) 악인은 무엇에 비유됩니까?(4절) 바람에 나는 겨 시인은 악인의 본질을 ‘바람에 나는 겨’로 묘사한다. 고대 농경 문화에서 키질을 통해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 내는 풍경은 누구나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이 표현은 청중에게 악인의 운명을 직관적인 시각적 이미지로 전달한다. 겨는 거창한 폭풍이 아니라 키질로 발생하는 아주 작은 바람에도 속절없이 흩어지는 ‘존재의 가벼움’을 상징한다. 시인은 이 비유를 통해 세상에서 제아무리 강하고 견고한 권세를 가진 악인이라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라는 바람 앞에서는 힘없이 날아갈 수밖에 없는 허무하고 무가치한 존재임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겉모습은 화려할지 모르나 생명의 알맹이가 없는 악인의 실체를 꼬집는 탁월한 비유다. 3) 악인이 참여하지 못하는 곳은 어디입니까?(5절) 의인들의 모임 시인은 앞서 제시한 비유들을 하나로 연결하며 심판의 필연성을 강조한다.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하나님의 말씀(율법)에서 생명수를 충분히 공급받아 영적인 무게감을 지닌 존재다. 반면, 악인은 말씀과 무관하게 살아가기에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흩어지는 겨와 같이 가볍기 그지없다. 세상 속에서는 의인과 악인이 뒤섞여 살아가는 듯 보이나,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심판의 바람 앞에서는 오직 은혜의 수분을 머금어 견고해진 의인들만이 흔들리지 않고 서 있게 된다. 악인이 의인의 모임에 끝내 참여하지 못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들은 세상의 자원은 풍족히 누렸을지언정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영적인 물은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메마르고 가벼운 영혼은 결국 심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흩어지고 만다. 나눔 2 요즘 내 마음을 흔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유행이나 눈앞의 이익 앞에서 ‘바람에 나는 겨’처럼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는지, 아니면 말씀에 깊이 뿌리내린 견고한 ‘나무’처럼 든든히 서 있는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정직하게 나눠 봅시다. 나눔 3 의인은 홀로 서 있는 외로운 나무가 아닙니다. 시냇가에 심겨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의인들의 모임’(5절)에 속한 자입니다. 우리가 메마르지 않는 ‘생명의 시냇가’가 되기 위해, 이번 주 지체들에게 건넬 수 있는 따뜻한 격려나 구체적인 섬김이 있다면 함께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말씀을 묵상함으로 말씀의 시냇가에 뿌리내리게 하소서. 공동체 _ 우리 공동체가 서로의 뿌리를 든든히 붙들어 주는 연대의 장이 되게 하소서. 260628 속회지도자 자료 2026-06-24 신내교회 260628 속회지도자 자료.pdf 6월 네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부활의 열매 고린도전서 15:20-34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나의 영원하신 기업(찬송 435장, 구 492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세상은 우리에게 “인생은 한 번뿐이니 후회 없이 즐겨라” 하고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남들 다 즐기는 것을 참으며 굳이 손해 볼 필요가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회의감이 들기도 합니다. 만약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우리가 주님을 위해 흘린 눈물과 이름 없는 헌신은 그저 헛된 낭비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과 최후 심판이 있기에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결말’은 우리 ‘현재’를 전혀 다르게 규정합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부활하신 예수님이 고난받는 성도에게 새 소망을 주십니다(20-28절). 1)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잠자는 자들’에게 어떤 존재가 되셨습니까?(20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기독교는 예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 위에 세워졌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초대 공동체의 신념과 결단으로 발생한 사상에 불과하다면 바울의 말대로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은 헛될 뿐이다(15:14, 17). 하지만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예수가 역사적으로 부활하였음을 확증하여 선포한다(15:1-8, 20).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부활하시고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여기 ‘잠자는 자들’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에 놓인 자들이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 사건으로 ‘잠자는 자들’이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나라로 옮겨질 수 있게 되었다. 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21-22절)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부활할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인류가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권세 아래 있을지라도 예수를 믿는 자들은 이미 예수 부활에 동참하여 영생의 맛을 조금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 장차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이들은 예수의 ‘영광의 몸’의 형체처럼 온전한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이다(빌 3:21). 중요한 건 현재 예수를 믿고 부활에 동참한 자가 미래 예수의 재림 때에도 부활의 몸을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첫 사람 아담의 죄로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렀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를 통해 영생이 주어졌다. 3) 맨 나중에 멸망 받을 궁극적인 원수는 무엇입니까? (26절) 사망 바울은 ‘사망’을 인격화하여 예수가 물리쳐야 할 ‘최후의 원수’로 규정한다. 예수 부활의 목적이 사탄의 최종 병기 ‘사망의 권세’를 깨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세상은 생명과 안식의 나라였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은 결과 이 땅은 죄와 사망의 나라로 전락했다.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가 사탄의 권세가 왕 노릇하는 비정상적인 세상으로 변질된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이유는 바로 이 비뚤어지고 왜곡된 세상을 생명과 안식의 나라로 정상 회복하기 위해서다. 나눔 1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그분을 믿는 우리도 반드시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부활하게 된다는 보증입니다. 부활 소망이 현재 내 삶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나눠 봅시다. 2.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선한 일을 위해 고난받을 이유가 없습니다(29-34절). 1) 부활 소망을 품은 바울이 매일 다지는 삶의 각오는 무엇입니까?(31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한다. 이는 바울이 날마다 사선을 넘나드는 듯한 위험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는 걸 말한다. 바울의 이 선언은 그의 사역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 사역인지를 방증한다. 바울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했음을 간증하고 있다. 바울은 날마다 순교의 각오를 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역했다. 바울에게 부활 신앙이 없었다면 결코 이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삶의 동력은 바로 부활 신앙이다. 2)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살겠다고 말합니까? (32절)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면서 현재의 안락과 쾌락을 추구하겠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고 한다(32a절). 이 맹수가 진짜 원형 경기장의 맹수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바울은 기독교인을 박해하며 핍박한 적대자들을 가리켜 맹수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어쨌든 바울은 에베소에서 거의 죽음에 이르는 극심한 환난을 겪었다. 그런데 바울이 반문한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나의 이런 고생이 무슨 의미가 있나?” “만일 부활이 없다면 차라리 오늘 먹고 마시고 편하게 사는 게 더 낫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바울은 부활 소망이 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역했다. 3) 부활을 기다리는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33-34절) 부활을 부정하며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악한 동무들’에게 속지 말고,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 바울은 ‘악한 동무들이 선한 행실을 타락시킨다’라는 메난더(Menander)의 희극 타이스(Thais)의 격언을 인용하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권면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이미 부활하여 구원의 완성을 누린다’고 말하면서 정작 미래의 부활은 부인하는 자들을 강력하게 규탄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헛된 신앙을 가진 자들을 경계하며 오직 바른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권면한다. 나눔 2 부활이 없다면 오늘을 즐기는 삶이 최선이지만, 부활이 있기에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부활 소망 때문에 견뎌야 할 고난은 무엇입니까? 나눔 3 나의 신앙을 무디게 하고 죄로 유혹하는 ‘악한 동무’는 무엇입니까? 장차 부활하여 주님을 대면할 자로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내가 멀리해야 할 나쁜 습관이나 가까이해야 할 거룩한 습관은 무엇입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부활의 소망을 갖고 죄의 유혹을 담대히 이기게 하소서. 공동체 _ 세상의 죄와 사망의 문화에 물들지 않고 선한 일을 추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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