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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8 속회지도자 자료
2026-06-24 13:14:28
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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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네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부활의 열매

 

고린도전서 15:20-34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나의 영원하신 기업(찬송 435, 492)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세상은 우리에게 인생은 한 번뿐이니 후회 없이 즐겨라하고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남들 다 즐기는 것을 참으며 굳이 손해 볼 필요가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회의감이 들기도 합니다. 만약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우리가 주님을 위해 흘린 눈물과 이름 없는 헌신은 그저 헛된 낭비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과 최후 심판이 있기에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결말은 우리 현재를 전혀 다르게 규정합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부활하신 예수님이 고난받는 성도에게 새 소망을 주십니다(20-28).

1)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잠자는 자들에게 어떤 존재가 되셨습니까?(20)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기독교는 예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 위에 세워졌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초대 공동체의 신념과 결단으로 발생한 사상에 불과하다면 바울의 말대로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은 헛될 뿐이다(15:14, 17). 하지만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예수가 역사적으로 부활하였음을 확증하여 선포한다(15:1-8, 20).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부활하시고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여기 잠자는 자들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죄와 죽음의 권세아래에 놓인 자들이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 사건으로 잠자는 자들이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나라로 옮겨질 수 있게 되었다.

 

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21-22)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부활할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인류가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권세 아래 있을지라도 예수를 믿는 자들은 이미 예수 부활에 동참하여 영생의 맛을 조금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 장차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이들은 예수의 영광의 몸의 형체처럼 온전한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이다(3:21). 중요한 건 현재 예수를 믿고 부활에 동참한 자가 미래 예수의 재림 때에도 부활의 몸을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첫 사람 아담의 죄로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렀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를 통해 영생이 주어졌다.

 

3) 맨 나중에 멸망 받을 궁극적인 원수는 무엇입니까? (26)

사망

바울은 사망을 인격화하여 예수가 물리쳐야 할 최후의 원수로 규정한다. 예수 부활의 목적이 사탄의 최종 병기 사망의 권세를 깨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세상은 생명과 안식의 나라였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은 결과 이 땅은 죄와 사망의 나라로 전락했다.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가 사탄의 권세가 왕 노릇하는 비정상적인 세상으로 변질된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이유는 바로 이 비뚤어지고 왜곡된 세상을 생명과 안식의 나라로 정상 회복하기 위해서다.

 

나눔 1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그분을 믿는 우리도 반드시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부활하게 된다는 보증입니다. 부활 소망이 현재 내 삶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나눠 봅시다.

 

2.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선한 일을 위해 고난받을 이유가 없습니다(29-34).

1) 부활 소망을 품은 바울이 매일 다지는 삶의 각오는 무엇입니까?(31)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한다. 이는 바울이 날마다 사선을 넘나드는 듯한 위험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는 걸 말한다. 바울의 이 선언은 그의 사역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 사역인지를 방증한다. 바울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했음을 간증하고 있다. 바울은 날마다 순교의 각오를 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역했다. 바울에게 부활 신앙이 없었다면 결코 이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삶의 동력은 바로 부활 신앙이다.

 

2)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어떻게 살겠다고 말합니까? (32)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하면서 현재의 안락과 쾌락을 추구하겠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고 한다(32a). 이 맹수가 진짜 원형 경기장의 맹수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바울은 기독교인을 박해하며 핍박한 적대자들을 가리켜 맹수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어쨌든 바울은 에베소에서 거의 죽음에 이르는 극심한 환난을 겪었다. 그런데 바울이 반문한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나의 이런 고생이 무슨 의미가 있나?” “만일 부활이 없다면 차라리 오늘 먹고 마시고 편하게 사는 게 더 낫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바울은 부활 소망이 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역했다.

 

3) 부활을 기다리는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33-34)

부활을 부정하며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악한 동무들에게 속지 말고,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

바울은 악한 동무들이 선한 행실을 타락시킨다라는 메난더(Menander)의 희극 타이스(Thais)의 격언을 인용하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권면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이미 부활하여 구원의 완성을 누린다고 말하면서 정작 미래의 부활은 부인하는 자들을 강력하게 규탄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헛된 신앙을 가진 자들을 경계하며 오직 바른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권면한다.

 

나눔 2 부활이 없다면 오늘을 즐기는 삶이 최선이지만, 부활이 있기에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부활 소망 때문에 견뎌야 할 고난은 무엇입니까?

 

나눔 3 나의 신앙을 무디게 하고 죄로 유혹하는 악한 동무는 무엇입니까? 장차 부활하여 주님을 대면할 자로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내가 멀리해야 할 나쁜 습관이나 가까이해야 할 거룩한 습관은 무엇입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_ 부활의 소망을 갖고 죄의 유혹을 담대히 이기게 하소서.

공동체 _ 세상의 죄와 사망의 문화에 물들지 않고 선한 일을 추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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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이사야 37장에서 산헤립의 신성 모독적 발언과 히스기야의 경건한 태도가 대조된다. 앗수르 산헤립왕의 교만이 하늘을 찌른다. 편지에 의하면 앗수르가 점령하지 못한 나라가 없으며, 세상 모든 나라의 신들이 앗수르의 공격 앞에 무력하게 무너졌다. 여호와도 그런 무능력한 잡신 중 하나라는 것이다. 히스기야는 경건한 자로서 이 신성모독적 발언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영적인 의분을 내며 이 신성모독적 편지 자체를 하나님께 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친히 치시고 그의 손으로부터 유다를 구원해 주시길 간구한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치시고 열방의 어떤 신보다 더 위대한 참 신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나타내 주시기를 간구한다. 나눔 2 산헤립의 편지처럼 우리 주변은 ‘하나님을 믿어도 소용없다’는 속삭임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내 마음을 더 지배하며 신앙을 흔들어 놓는 ‘세상의 위협적인 소리’는 무엇입니까? 나눔 3 히스기야는 개인의 안위보다 하나님의 명예가 훼손되는 것을 더 아파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나의 기도가 내 문제 해결에만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 위해 새롭게 결단하며 간구할 기도 제목은 무엇인지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제일 먼저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을 주소서. 공동체 _ 세상의 조롱 앞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선포하며, 주의 영광만을 구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60823 속회지도자 자료 2026-08-19 신내교회 260823 속회지도자 자료.pdf 8월 네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패역한 자녀에게 이사야 26:1-27:1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돌아와 돌아와(찬송 525장, 구 315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 봅시다. 고집과 소신은 비슷한 것 같지만, 본질이 전혀 다릅니다. 고집이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는 비겁한 자기 확신이라면, 소신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내 자존심마저 기꺼이 내려놓는 거룩한 용기입니다. 과거 유다 백성은 국가적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묻기보다 애굽에 기대는 치명적인 ‘고집’을 부렸습니다. 오늘날 주님은 여전히 고집스런 우리를 향해 얄팍한 자구책을 버리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말씀 앞에서 고집을 꺾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 유일한 길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유다는 강대국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세상 권력의 그늘을 택합니다(1-11절). 1) 하나님이 유다를 ‘패역한 자식들’이라고 꾸짖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1-2절) 여호와께 묻지 않고 자기 계교(계획)를 베풀며,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않고 애굽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예언이 주어진 시기는 앗수르가 아스돗을 점령한 주전 711년과 예루살렘 포위가 이뤄진 주전 701년 사이로 볼 수 있다. 이때 선지자의 예언은 유다가 앗수르 군대를 막으려고 함부로 애굽과 동맹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군사적 안전보장을 추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유다의 외교 사절단이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계획에 따라 행동하는 패역한 자들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강대국을 의존하며 동맹을 맺으려는 것을 강력하게 규탄하신다. 2) 애굽을 의지한 유다가 얻게 될 결과는 무엇입니까? (3-5절) 애굽으로부터 도움은커녕 도리어 수치만 당할 것이다. 4절의 고관들과 사신들은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외교 사절단을 의미한다. 이들은 앗수르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서는 애굽의 도움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며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려고 애굽에 내려갔다. 하지만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믿었던 애굽으로부터 수치와 모욕만 당한다. 사실 애굽은 유다를 도울 만한 힘이 없었다. 애굽은 이미 상한 갈대와 같아서 누구를 도울 처지가 못 되었다. 그럼에도 유다는 하나님은 의지하지 않으면서, 도울 힘이 없는 세상 권력 집단을 의지하려 한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권력자를 의지할 때 세상으로부터 도움은커녕 오히려 버림받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한다. 3) 패역한 백성이 선견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10-11절) 바른 것을 보이지 말고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하나님을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고 요구한다. 자기 꾀에 빠져 사는 이들은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정작 세상의 작은 위협은 몹시 두려워한다. 그래서 선지자가 이런 패역한 백성의 불신앙을 바로잡으려 하는데 정작 백성은 선지자에게 말씀을 전하지 말라고 강짜를 부린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진실을 정직하게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어려움을 피하려다 정작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만다. 하지만 선지자를 위협하며 예언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도 멈추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의사와 상관없이 엄위하게 선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서 성도는 자기 입맛에 맞는 말씀을 선택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어떤 말씀이든 “아멘!” 하고 순종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나눔 1 유다는 눈앞의 위협(앗수르)을 피하려고 또 다른 세상의 힘(애굽)을 의지했다가 더 큰 수치를 당했습니다. 하나님보다 나를 안전하게 지켜 줄 것 같아 마음에 의지가 되는 ‘나의 애굽’은 무엇인지 나눠 봅시다. 나눔 2 내 생각과 반대되는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최근 말씀을 듣거나 묵상할 때, 내 굳은 신념을 건드려 마음이 몹시 아프고 불편했지만, 돌아보면 결국 내 영혼을 살린 ‘진리의 말씀’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2.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한 유다가 쇠락의 길을 걷습니다(12-17절). 1)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듯이 하나님이 유다를 심판하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12-14절) 유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애굽을 의지하며, 허망한(패역한)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유다의 권력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세상의 허망한 걸 붙잡고 의지하려 한다. 이 죄로 인해 그들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마치 잘못 쌓아 불쑥 튀어나온 담벼락이 장마철에 습기가 차서 갑자기 무너지듯이 유다 왕국도 그렇게 한순간에 패망할 것이다. 이것은 엄위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마치 토기장이가 잘못 빚어진 토기를 깨뜨리듯이 하나님께서 유다 왕국을 철저히 심판하실 것이다. 다시 복구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유다는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하나님이 유다를 이처럼 심판하려는 이유는 그들이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2) ‘회개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을 거부한 유다의 결국은 무엇입니까?(15-17절)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여 쇠락의 길을 걷는다.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슈브, 회개) 촉구했지만, 유다 백성은 이 말씀을 거부한다. 그들은 잠잠히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느니 애굽과 연대해서라도 앗수르와 싸울 거라며, 빠른 말을 타고 도망갈지언정 앗수르에게 무릎 꿇지 않겠다고 객기를 부린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준마를 타고 도망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아무리 빠른 말을 타고 도망할지라도 쫓는 자가 더 빨라서 결국 따라잡히고 말 것이다. 17절의 유다의 모습은 참으로 비참하다.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고, 다섯 사람이 꾸짖은즉 모든 사람이 다 도망하여서, 예루살렘에 사람은 없고 깃대만 남게 될 것이다. 나눔 3 하나님은 우리가 분주히 움직이며 허망한 것을 의지하기를 멈추고, 주 안에서 ‘잠잠히 신뢰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이번 한 주간, 내 힘으로 해결하려던 분주함을 내려놓고 주께 맡김으로 평안을 누려야 할 영역은 무엇인지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내 계획이 말씀에 비추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즉시 돌이키게 하소서. 공동체 _ 세상의 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하며, 잠잠히 기다리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60816 선교회 모임 자료 2026-08-08 신내교회 8월_선교회_모임_요약자료_최종.pdf 8월_선교회_모임_요약자료_최종.pdf 260809 속회지도자 자료 2026-08-05 신내교회 260809 속회지도자 자료.pdf 8월 두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경영 이사야 14:24-15:9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찬송 419장, 구 478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고 눈앞의 막막한 현실이 우리를 압도할 때, 종종 세속적인 방법으로 타협하고 싶은 유혹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온 열방을 향한 원대한 ‘경영’(계획)을 쉬지 않고 이루어 가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꺾으시고 기댈 곳 없는 연약한 백성을 끝까지 보호하십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굳게 신뢰하며 그 품에 거하는 사람은 어떠한 현실에서도 흔들림 없이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앗수르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계획입니다(14:24-27). 1) 여호와의 ‘경영’(계획)에는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24, 27절) 하나님의 ‘경영’(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누구도 폐하거나 돌이킬 수 없다. 24-27절은 교만한 앗수르 제국에 대한 심판 예언이다. 이는 이사야 10:5-11을 생각나게 한다. 원래 앗수르는 하나님의 심판 도구(몽둥이, 막대기)다(10:5). 하나님은 앗수르를 ‘징계의 회초리’로 사용하셔서 경건하지 않은 나라를 심판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 도구인 앗수르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교만하게 허다한 나라를 파괴했다(10:7). 그래서 하나님께서 앗수르에 대한 심판을 계획하신 것이다. 이사야 14:24, 27에서, 하나님은 앗수르를 향한 심판 계획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엄위한 심판을 막을 수 없다. 하나님의 심판은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실현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 개입만이 앗수르의 교만을 깨뜨릴 수 있다. 2) 앗수르를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경영은 무엇입니까?(25절) 앗수르를 ‘하나님의 땅’에서 파하며, ‘하나님의 산’에서 짓밟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철저히 분쇄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앗수르를 철저히 심판하시는 이유는 단지 억압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앗수르의 손에서 구출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이렇게 강력하게 파하시는 이유는 앗수르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며 스스로 왕 노릇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앗수르의 교만을 깨뜨리기 위해 심판의 칼을 드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과 위엄에 도전하는 모든 열방과 제국을 의롭게 심판하신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그의 뜻과 상관없이 세상을 억압하고 통치하는 모든 악한 권력을 반드시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계획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나눔 1 하나님의 경영은 역사의 한복판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영원할 것만 같은 세상 권세를 보며 낙심하거나 부러워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지금 내가 끝까지 붙들고 신뢰해야 할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인지 나눠 봅시다. 2. 블레셋과 모압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14:28-15:9). 1) 자신을 치던 막대기가 부러졌다며 기뻐하는 블레셋에게 어떤 경고가 임합니까?(29-31절) 비록 막대기가 부러졌을지라도 더 무서운 독사가 나올 것이며, 결국 블레셋은 기근으로 죽고 대적의 공격에 살육당할 것이다. 시리아-에브라임 연합군이 남유다에게 반앗수르 동맹을 강요하지만, 유다가 이를 거절하자 예루살렘을 공격한다. 이에 아하스왕은 앗수르에 도움을 요청한다. 그래서 앗수르는 군사를 일으켜 시리아(아람)를 멸망시키고, 북이스라엘(에브라임)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이게 바로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다(주전 735-732년). 이 전쟁 이후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3세는 주전 727년에 사망하고, 남유다의 아하스는 주전 715년에 사망한다. 29절의 ‘막대기’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남유다의 아하스 왕, 둘째,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3세다. 막대기의 정체가 누구든 그 막대기가 꺾였다고 블레셋이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뱀의 뿌리에서 독사가 나오듯이 강한 군주가 사라지면 그 뒤에 더 무서운 왕이 나타나서 블레셋을 멸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2) 반앗수르 동맹을 요구하는 블레셋 사신들에게 예언자는 무엇이라고 답합니까?(32절)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 유다 왕 아하스가 죽자, 블레셋은 은근히 유다가 반앗수르 전선에 동참하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사신을 보내 반앗수르 동맹에 동참하라고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선지자는 유다가 블레셋의 이 요구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유다의 진정한 보호자이며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시온(유다)의 운명은 동맹 여부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에 유다는 외세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3) 모압의 대표적인 성소가 있는 ‘디몬’(디본)의 물에는 무엇이 가득하게 됩니까?(15:9) 피가 가득할 것이다. 디몬은 ‘디본’을 가리킨다. 디본은 모압의 대표적인 성전이 있는 곳이다. 즉 디본은 모압의 중심지이며, 모압 신의 돌봄을 받는 축복받은 성읍이다. 마치 유다가 예루살렘을 성지로 생각하듯이 모압 사람들은 디본을 거룩한 도시로 생각했다. 그리고 디본 성읍은 화려하고 풍요로워서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모압 백성은 이곳에 피하면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삶의 안정을 디본에서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 디본이 피로 가득할 거라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마치 출애굽 당시 나일강이 붉은 피로 물들 듯이 디본이 그렇게 피로 물들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인간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성읍도 죽음의 도시가 될 것이다. 나눔 2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확실한 수단에 기대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기보다 먼저 찾아가려 했던 ‘나만의 동맹군’은 무엇이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나눔 3 세상의 요새인 ‘디몬’은 무너져도 하나님이 세우신 ‘시온’(교회)은 곤고한 자들의 영원한 피난처가 됩니다. 무너져 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 공동체가 서로에게 따뜻한 피난처가 되어 주었던 은혜의 기억을 서로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인간적인 계산보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주님의 약속을 먼저 붙들게 하소서. 공동체 _ 우리 교회가 고난당하는 이웃들이 찾아와 쉴 수 있는 피난처가 되게 하소서. 260726 속회지도자 자료 2026-07-25 신내교회 260726 속회지도자 자료.pdf 7월 네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거룩한 하나님, 거룩하지 못한 백성 이사야 6:1-13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날 대속하신 예수께(찬송 321장, 구 351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 봅시다. 괴사한 신체 부위를 방치하면 패혈증 같은 치명적인 위기를 맞습니다. 환자는 신체의 일부를 잃어야 하는 고통에 절망하지만, 의사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단호히 수술용 칼을 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무서운 심판을 내리신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영적인 무감각으로 이미 부패해 버린 부분을 도려내지 않으면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썩은 살을 베어 내는 일은 몸서리쳐질 만큼 참혹한 고통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만이 죽어 가는 이스라엘을 살려 낼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었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이사야는 성전에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1-7절). 1) 스랍들은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찬양합니까?(2-3절)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한다. 이사야 6장에 등장하는 ‘스랍’(사라프)은 매우 독특한 존재다. 구약에서 총 7회 사용된 이 단어는 이사야 6장(2회)을 제외한 나머지 구절에서 모두 ‘불뱀’으로 번역된다. 이러한 언어적 용례를 통해 스랍이 단순히 소식을 전하는 부드러운 천사가 아니라, 심판의 고통과 타오르는 불길을 연상시키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주를 이루는 이사야서 전반부(1~39장)의 문맥을 고려할 때, 불타는 존재인 스랍은 심판주의 위엄을 보좌하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들이 외치는 ‘거룩’(카도쉬)은 본래 ‘구별됨’을 의미한다. 즉, 스랍이 찬양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 계실 뿐만 아니라, 그 거룩함의 빛으로 인간의 죄에 대해 엄중히 책임을 물으시는 불타는 공의를 선포하는 것이다. 2) 이사야의 악을 제하고 죄를 사하기 위해 스랍은 어떤 일을 합니까?(6-7절)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날아와서 이사야의 입술에 대었다. 본문의 장면은 언뜻 입술을 불로 지지는 고통스러운 형벌처럼 보이지만, 환상 속에 담긴 심오한 상징에 주목해야 한다. 성전 제단 아래의 숯은 단순한 제사의 부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불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신성한 매개체다. 율법에 따라 오직 제단의 불만을 성소에 사용해야 했다. 스랍이 이 숯을 이사야의 입술에 댄 행위는 제물의 피를 흘리는 전통적 제사와는 또 다른 형태의 ‘직접적인 속죄’다. 죄 사함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지만, 그 죄를 태워 없애는 과정에는 반드시 뼈아픈 고통이 동반된다. 나눔 1 이사야가 겪은 숯불의 고통은 장차 이스라엘이 심판을 통해 정화될 것을 예표합니다. 내 삶에서 죄와 교만을 태워 없애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정화의 시간’이 있습니까? 당시에는 고통스러웠던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어떻게 정결해지고 주님과 가까워졌는지 나눠 봅시다. 2.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알릴 사자로 이사야가 자원합니다(8-13절). 1)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누구를 보낼지 고민하실 때 이사야는 어떤 말로 자원합니까?(8절)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스라엘을 위해 보낼 적임자를 찾으시자, 이사야는 주저 없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한다. 우리는 흔히 이 장면을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한 영광스러운 헌신의 순간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사명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이 결단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가 전해야 할 메시지는 회복이 아니라 심판이었으며, 백성의 마음을 더욱 둔하게 만들어 멸망을 확정 짓는 ‘실패가 예정된 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사야의 자원은 자기 민족의 파국을 정면으로 목도하면서도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끝까지 대언해야 했다. 사명의 참담한 무게를 미리 알았더라도 이토록 신속히 손을 들 수 있었을지 자문하게 될 만큼, 그의 순종은 인간적 고뇌를 압도한다. 2)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맡기신 임무는 무엇입니까? (10절)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는 것이다. 이는 선지자의 기대를 완전히 뒤엎는 당혹스러운 명령이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용서나 회복을 섣불리 선포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엄중한지 깊이 통감했을 것이다. 자신이 숯불로 입을 지져서 죄가 용서되었던 것처럼, 심판에는 적당한 타협이나 쉬운 지름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 백성을 영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들라는 이 역설적인 임무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필연적인지를 강력하게 시사한다. 3) 이사야는 이 사역을 언제까지 수행해야 합니까?(11-12절)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 이 엄중한 선포는 과거 온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던 사건을 떠올리게 할 만큼 단호하고 철저하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듯한 극한의 상실감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깊고 무거웠는지를 보여 준다. 만일 이 무서운 심판이 여기서 마침표를 찍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깊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모든 것이 베임을 당한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이 남겨 두신 마지막 희망은 무엇입니까?(13절) 그루터기, 곧 거룩한 씨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철저한 파괴를 예고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분의 궁극적인 시선은 ‘파멸’이 아닌 ‘재건’에 머물러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베어 내신 이유는 단순히 없애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거룩한 씨’만이 자랄 수 있는 정결한 토양을 만들기 위함이었음을 우리는 이 마지막 구절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나눔 2 이사야는 전해도 듣지 않는 백성에게 끊임없이 심판을 외쳐야 합니다.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어 낙심했던 영역이 있습니까?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내게 주어진 자리를 묵묵히 지키기 위해 필요한 마음가짐은 무엇인지 나눠 봅시다. 나눔 3 하나님은 다 태워 버리는 불같은 심판 중에도 다시 시작할 ‘그루터기’를 남겨 두십니다. 관계, 상황, 내면 등 지금 내 삶에서 가장 황폐해진 부분은 무엇입니까? 그곳에 주님이 남겨 두신 ‘작은 그루터기’(희망의 증거)가 있다면 무엇인지 찾아보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삶의 모진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내 안에 간직하게 하소서. 공동체 _ 우리 공동체가 주님이 남기신 거룩한 그루터기로 온전히 서게 하소서. 260719 선교회 모임 자료 2026-07-15 신내교회 7월_선교회_모임_요약자료_최종.pdf 260712 속회지도자 자료 2026-07-08 신내교회 260712 속회지도자 자료.pdf 7월 두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사람을 향하신 주님 시편 8:1-9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찬송 79장, 구 40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 봅시다. 웅장한 산맥과 광활한 평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 앞에서 우리는 종종 대자연의 장엄함에 압도당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토록 경이로운 우주 만물조차 하나님의 손끝에서 빚어진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저 광활한 우주와 창조주이신 당신 사이에 ‘인간’을 세워 두셨습니다. 시편 8편의 시인은 인간이 자연보다 존귀하며, ‘하나님보다 조금 못할 뿐’이라고 벅차게 노래합니다. 흙으로 지어진 유한한 우리가 어찌 창조주보다 단지 ‘조금’ 못한 존재일 수 있겠습니까? 시인이 진정 말하려 한 본질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시선이 그토록 특별하고 위대하다는 사실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하나님의 영광은 하늘을 뛰어넘습니다(1-3절). 1)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을 덮었다고 말합니까?(1절) 하늘 현대인이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은 성경이 고대인의 언어와 세계관을 통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 시편을 묵상할 때도 당대 세속적 가치관에 대항하는 시인의 신앙적 시선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대인들에게 ‘하늘’은 단순히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늘의 해와 달, 별 자체를 신(神)으로 숭배했으며, 그곳을 수많은 신이 거주하며 세상을 움직이는 신성한 처소로 여겼다. 이러한 다신론적이고 범신론적인 배경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위엄이 하늘을 덮었다”고 선포한다. 이는 이방인들이 신성시하던 하늘조차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음을 선언하는 파격적인 신앙 고백이다. 이처럼 시인은 당대의 가치관에 정면으로 맞서며, 온 우주의 진정한 통치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드러낸다. 2) 하나님은 대적들을 잠잠하게 하기 위해 누구의 입을 통해 권능을 세우십니까?(2절)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 고대 사회에서 신의 대리자는 항상 왕이나 제사장처럼 높은 계급과 강력한 힘을 가진 인물이었다. 신의 위엄을 드높일 자격이 있는 존재는 응당 사회적 정점에 있는 권력자일 때 신의 위엄이 더 높아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세상의 가치관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하나님은 화려한 권력을 쥔 이들이 아니라, 당시 가치관으로는 가장 힘없고 미약한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을 통해 자신의 권능을 세우시는 분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지위나 물리적인 힘에 기대지 않음을 보여 주는 파격적인 선포다. 세속적인 힘의 논리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 사이에는 이처럼 거대한 간격이 존재한다. 가장 천하게 여겨지던 자의 입술을 통해 대적들의 기세를 꺾으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진정한 권위다. 나눔 1 우리를 짓누르는 커다란 문제들도 광활한 밤하늘의 별들을 손가락으로 만드신 하나님께는 티끌 같을 뿐입니다. 요즘 나를 막막하게 만드는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크심을 묵상할 때, 그 문제가 어떻게 새롭게 해석되는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2. 하나님은 사람을 존귀하게 대하십니다(4-9절). 1) 시인은 인간을 어떤 말로 표현하며,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어떻게 대하십니까?(4절) 시인이 ‘사람’과 ‘인자’라고 표현한 인간을 하나님은 생각하고 돌보신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신화인 <에누마 엘리쉬>나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에 익숙했던 이들에게 자연은 그 자체로 신성한 존재였다. 신의 사체를 쪼개 세상을 만들었다는 신화적 관념은 자연 속에 신의 속성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그 안에서 인간은 만물보다 아래에 있는 비천한 존재이자 신들을 시중드는 도구로 여겨졌다. 그러나 시인의 선포는 당대의 가치관을 정면으로 뒤집는 가히 혁명적인 고백이다. 광활한 우주에 비해 인간이 비록 보잘것없는 ‘에노쉬’(사람)와 ‘벤 아담’(사람의 아들)에 불과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우주 만물보다 귀하게 여기시며 직접 생각하고 돌보신다.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만물을 다스리는 영광의 관을 씌우셨다는 시인의 노래는, 인간의 위상을 만물 위에 두시는 하나님의 파격적인 사랑을 고대 세계관의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드러낸다. 2) 하나님이 사람을 높이신 지위와 그에게 맡기신 것은 무엇입니까?(5-8절)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 또한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는 권한을 맡기셨다는 시인의 선포는 고대 세계의 종교적 근간을 뒤흔드는 놀라운 선언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해와 달, 별을 비롯한 대자연은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인 ‘신성한 실체’였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자연을 숭배의 자리가 아닌 인간의 다스림을 받는 자리로 옮겨 놓음으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뒤바꾼다. 3) 이 시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공통된 고백은 무엇입니까?(1, 9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인은 시의 처음과 끝을 동일한 찬양으로 장식하는 ‘수미상관’ 방식을 통해, 온 땅에 가득한 여호와의 이름이 지닌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고대 세계의 사람들은 자연을 무수한 신들의 각축장으로 인식했다. 그들에게 신은 변덕스럽고 폭력적인 존재였기에, 인간은 신들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끊임없이 제사를 바쳐야 하는 나약하고 피동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인이 노래하는 하나님의 통치는 이러한 비극적 세계관을 완전히 뒤바꾼다. 하나님은 인간을 억압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영광을 부여하시며 온 세상을 당신의 자비와 위엄으로 채우시는 분이다. 시인은 이 고백을 시의 입구와 출구에 배치함으로써, 신앙의 여정은 결국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발견하는 데서 출발하여 그분의 위대함을 확증하는 찬양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아름답게 보여 준다. 나눔 2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질 때, ‘하나님이 나를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되었던 적은 언제입니까? 나의 가치를 세상의 평가가 아닌 하나님의 시선에서 찾기로 결심한 지점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나눔 3 우리가 머무는 곳을 선하게 가꿀 때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집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작은 세상(가정, 일터, 소그룹)은 어디입니까? 그곳에서 하나님의 따뜻함과 공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이번 주 내가 책임감을 가지고 실천할 구체적인 행동은 무엇입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광활한 세상에서 먼지 같은 저를 기억하고 돌보시는 주님의 은혜를 오늘도 찬양합니다. 공동체 _ 우리에게 맡겨 주신 세상과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60705 속회지도자 자료 2026-07-04 신내교회 260705 속회지도자 자료.pdf 7월 첫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주께로 향하는 길 시편 1:1-6 높이가 무려 100미터에 달하는 캘리포니아의 레드우드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나무 중 하나입니다. 놀라운 점은 이 거목의 뿌리가 생각보다 아주 얕게 퍼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 나무는 수천 년의 거센 폭풍우를 견디며 거대한 몸집을 지탱해 온 것일까요? 그 비결은 바로 ‘연대’에 있습니다. 레드우드는 홀로 깊이 뿌리내리는 대신, 뿌리를 옆으로 넓게 뻗어 이웃한 나무들의 뿌리와 단단히 하나로 얽힙니다. 모진 비바람이 몰아쳐도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 주기에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의인의 공동체가 그토록 복되고 강인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복 있는 사람은 죄인과 연대하지 않습니다(1-2절). 1) 복 있는 사람이 하지 않는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1절)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시편 1:1은 복 있는 사람이 멀리해야 할 행동을 ‘걷다’(따르다), ‘서다’, ‘앉다’라는 점진적인 동사 변화를 통해 묘사한다. 이는 죄가 인간의 삶에 어떻게 은밀히 침투하여 견고하게 뿌리 내리는지를 탁월하게 보여 준다. 처음에는 단순히 악인의 ‘꾀’(생각)를 수용하며 함께 걷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그들의 ‘길’에 익숙해져 멈추어 서게 되고, 결국에는 오만함이라는 ‘자리’에 깊이 정착하게 된다는 경고다. 시인은 죄가 일회적인 유혹을 넘어 하나의 삶의 양식으로 고착되는 치명적인 과정을 날카롭게 통찰한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복은 죄의 영향력이 습관으로 굳어지기 전에 그 연결고리를 단호히 끊어 내는 거룩한 구별됨에서 시작한다. 2) 복 있는 사람이 즐겨 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2절)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 시인이 노래하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은 곧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과 같은 신앙적 태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주야’(晝夜)는 흔히 ‘항상’이라는 시간적 연속성으로 이해하지만, 이를 ‘밝은 낮’과 ‘어두운 밤’이라는 인생의 계절적 대조로 바라보면 그 의미가 더욱 풍성해진다. 지구가 자전하며 낮과 밤이 반복되듯, 우리 인생에도 기쁨이 충만한 시간과 고통스러운 시련의 시간이 교차하기 마련이다. 흔히 평탄한 낮의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기 좋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에 가장 깊이 새겨지는 계기는 칠흑 같은 ‘밤의 시간’이다. 삶의 가장 힘겨운 순간에도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갈망하며 말씀을 붙드는 사람이야말로, 환경에 매이지 않는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나눔 1 나를 무너뜨리는 것은 멀리 떼어놓아야 하고,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곁에 두려 애써야 합니다. 요즘 나의 하루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이나 ‘물건’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은 다릅니다(3-6절). 1) 시인은 의인을 무엇에 비유합니까?(3절) 시냇가에 심은 나무 팔레스타인은 강수량이 적어 물이 매우 귀한 지역이다. 이스라엘 문화에서 우기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하나님의 전적인 공급을 상징했다면, 사람이 직접 판 ‘웅덩이’는 한계가 있는 인간의 수고를 의미한다. 시인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마르지 않는 ‘시냇가’로 묘사했다. 따라서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가뭄과 같은 환경 변화에 휘둘리지 않는다. 생명의 근원인 물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시절을 좇아 자연스럽게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생명력을 유지한다. 결국 의인의 형통이란 내 능력이 아니라, 생명수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온전히 연결되어 있을 때 완성되는 것이다. 2) 악인은 무엇에 비유됩니까?(4절) 바람에 나는 겨 시인은 악인의 본질을 ‘바람에 나는 겨’로 묘사한다. 고대 농경 문화에서 키질을 통해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 내는 풍경은 누구나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이 표현은 청중에게 악인의 운명을 직관적인 시각적 이미지로 전달한다. 겨는 거창한 폭풍이 아니라 키질로 발생하는 아주 작은 바람에도 속절없이 흩어지는 ‘존재의 가벼움’을 상징한다. 시인은 이 비유를 통해 세상에서 제아무리 강하고 견고한 권세를 가진 악인이라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라는 바람 앞에서는 힘없이 날아갈 수밖에 없는 허무하고 무가치한 존재임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겉모습은 화려할지 모르나 생명의 알맹이가 없는 악인의 실체를 꼬집는 탁월한 비유다. 3) 악인이 참여하지 못하는 곳은 어디입니까?(5절) 의인들의 모임 시인은 앞서 제시한 비유들을 하나로 연결하며 심판의 필연성을 강조한다.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하나님의 말씀(율법)에서 생명수를 충분히 공급받아 영적인 무게감을 지닌 존재다. 반면, 악인은 말씀과 무관하게 살아가기에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흩어지는 겨와 같이 가볍기 그지없다. 세상 속에서는 의인과 악인이 뒤섞여 살아가는 듯 보이나,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심판의 바람 앞에서는 오직 은혜의 수분을 머금어 견고해진 의인들만이 흔들리지 않고 서 있게 된다. 악인이 의인의 모임에 끝내 참여하지 못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들은 세상의 자원은 풍족히 누렸을지언정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영적인 물은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메마르고 가벼운 영혼은 결국 심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흩어지고 만다. 나눔 2 요즘 내 마음을 흔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유행이나 눈앞의 이익 앞에서 ‘바람에 나는 겨’처럼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는지, 아니면 말씀에 깊이 뿌리내린 견고한 ‘나무’처럼 든든히 서 있는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정직하게 나눠 봅시다. 나눔 3 의인은 홀로 서 있는 외로운 나무가 아닙니다. 시냇가에 심겨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의인들의 모임’(5절)에 속한 자입니다. 우리가 메마르지 않는 ‘생명의 시냇가’가 되기 위해, 이번 주 지체들에게 건넬 수 있는 따뜻한 격려나 구체적인 섬김이 있다면 함께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말씀을 묵상함으로 말씀의 시냇가에 뿌리내리게 하소서. 공동체 _ 우리 공동체가 서로의 뿌리를 든든히 붙들어 주는 연대의 장이 되게 하소서. 260628 속회지도자 자료 2026-06-24 신내교회 260628 속회지도자 자료.pdf 6월 네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부활의 열매 고린도전서 15:20-34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나의 영원하신 기업(찬송 435장, 구 492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세상은 우리에게 “인생은 한 번뿐이니 후회 없이 즐겨라” 하고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남들 다 즐기는 것을 참으며 굳이 손해 볼 필요가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회의감이 들기도 합니다. 만약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우리가 주님을 위해 흘린 눈물과 이름 없는 헌신은 그저 헛된 낭비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과 최후 심판이 있기에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결말’은 우리 ‘현재’를 전혀 다르게 규정합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부활하신 예수님이 고난받는 성도에게 새 소망을 주십니다(20-28절). 1)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잠자는 자들’에게 어떤 존재가 되셨습니까?(20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기독교는 예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 위에 세워졌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초대 공동체의 신념과 결단으로 발생한 사상에 불과하다면 바울의 말대로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은 헛될 뿐이다(15:14, 17). 하지만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예수가 역사적으로 부활하였음을 확증하여 선포한다(15:1-8, 20).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부활하시고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여기 ‘잠자는 자들’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에 놓인 자들이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 사건으로 ‘잠자는 자들’이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나라로 옮겨질 수 있게 되었다. 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21-22절)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부활할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인류가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권세 아래 있을지라도 예수를 믿는 자들은 이미 예수 부활에 동참하여 영생의 맛을 조금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 장차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이들은 예수의 ‘영광의 몸’의 형체처럼 온전한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이다(빌 3:21). 중요한 건 현재 예수를 믿고 부활에 동참한 자가 미래 예수의 재림 때에도 부활의 몸을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첫 사람 아담의 죄로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렀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를 통해 영생이 주어졌다. 3) 맨 나중에 멸망 받을 궁극적인 원수는 무엇입니까? (26절) 사망 바울은 ‘사망’을 인격화하여 예수가 물리쳐야 할 ‘최후의 원수’로 규정한다. 예수 부활의 목적이 사탄의 최종 병기 ‘사망의 권세’를 깨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세상은 생명과 안식의 나라였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은 결과 이 땅은 죄와 사망의 나라로 전락했다.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가 사탄의 권세가 왕 노릇하는 비정상적인 세상으로 변질된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이유는 바로 이 비뚤어지고 왜곡된 세상을 생명과 안식의 나라로 정상 회복하기 위해서다. 나눔 1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그분을 믿는 우리도 반드시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부활하게 된다는 보증입니다. 부활 소망이 현재 내 삶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나눠 봅시다. 2.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선한 일을 위해 고난받을 이유가 없습니다(29-34절). 1) 부활 소망을 품은 바울이 매일 다지는 삶의 각오는 무엇입니까?(31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한다. 이는 바울이 날마다 사선을 넘나드는 듯한 위험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는 걸 말한다. 바울의 이 선언은 그의 사역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 사역인지를 방증한다. 바울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했음을 간증하고 있다. 바울은 날마다 순교의 각오를 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역했다. 바울에게 부활 신앙이 없었다면 결코 이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삶의 동력은 바로 부활 신앙이다. 2)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살겠다고 말합니까? (32절)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면서 현재의 안락과 쾌락을 추구하겠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고 한다(32a절). 이 맹수가 진짜 원형 경기장의 맹수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바울은 기독교인을 박해하며 핍박한 적대자들을 가리켜 맹수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어쨌든 바울은 에베소에서 거의 죽음에 이르는 극심한 환난을 겪었다. 그런데 바울이 반문한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나의 이런 고생이 무슨 의미가 있나?” “만일 부활이 없다면 차라리 오늘 먹고 마시고 편하게 사는 게 더 낫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바울은 부활 소망이 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역했다. 3) 부활을 기다리는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33-34절) 부활을 부정하며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악한 동무들’에게 속지 말고,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 바울은 ‘악한 동무들이 선한 행실을 타락시킨다’라는 메난더(Menander)의 희극 타이스(Thais)의 격언을 인용하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권면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이미 부활하여 구원의 완성을 누린다’고 말하면서 정작 미래의 부활은 부인하는 자들을 강력하게 규탄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헛된 신앙을 가진 자들을 경계하며 오직 바른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권면한다. 나눔 2 부활이 없다면 오늘을 즐기는 삶이 최선이지만, 부활이 있기에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부활 소망 때문에 견뎌야 할 고난은 무엇입니까? 나눔 3 나의 신앙을 무디게 하고 죄로 유혹하는 ‘악한 동무’는 무엇입니까? 장차 부활하여 주님을 대면할 자로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내가 멀리해야 할 나쁜 습관이나 가까이해야 할 거룩한 습관은 무엇입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부활의 소망을 갖고 죄의 유혹을 담대히 이기게 하소서. 공동체 _ 세상의 죄와 사망의 문화에 물들지 않고 선한 일을 추구하게 하소서. 260621 선교회 모임 2026-06-17 신내교회 6월_선교회_모임_자료 (1).pdf 260614 속회지도자 자료 2026-06-09 신내교회 260614 속회지도자 자료.pdf 6월 두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성령의 전 고린도전서 6:12-20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찬송 8장, 구 9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기에, 사람은 어떤 일이든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선택은 자신은 물론, 공동체 전체를 병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의 자유가 말씀의 울타리 안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말씀의 빛 아래 있을 때 가장 빛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도가 자기 몸을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도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이기 때문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자유는 유익함을 위해 있고 몸은 주님을 위해 있습니다(12-14절). 1)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라는 주장에 대해, 바울은 무엇이라고 응답합니까?(12절) “다 유익한 것이 아니며, 나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겠다.” ‘내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말은 당시 고린도 지역 사람들의 구호였다. 그들은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으며 살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이들의 주장을 일부 인정한다. 성도는 죄와 사망의 권세, 율법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은 이것이 곧 방종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한다. 사람에게 자유가 있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모든 행위가 다 유익한 건 아니다. 즉 성도가 자유를 부르짖으며 무책임하게 타인 또는 공동체의 생명과 자유를 침해한다면 그건 자유가 아니라 범죄다. 진정한 자유는 자기뿐 아니라 교회의 지체에도 유익이 되어야 한다. 자유롭게 행한다고 하면서 방종한 삶을 사는 것은 오히려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기 권리를 통제할 줄 아는 것이다. 2) 몸을 욕구 충족의 도구로 여기는 사고방식에 반대하는 바울의 해석은 무엇입니까?(13절)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신다.”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다’는 말 역시도 당시 고린도 사람들의 대표적인 구호였다. 당시 헬라의 영육 이원론 사상에 의하면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 그래서 배에 어떤 음식을 채우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상은 단지 배의 음식 문제만이 아니라 몸의 성적인 문제로도 확장된다. 어차피 육체는 물질이기에 문란하게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사상에 대해 ‘몸은 음란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주를 위해 있으며, 주도 몸을 위해 있다’라고 반박한다. 특히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주를 위해 자기 몸을 써야 한다(참조. 롬 6:12-14; 갈 2:20). 나눔 1 성경은 ‘몸’을 자기 욕심이나 즐거움을 위해 함부로 쓰지 말고 공동체와 주님을 위해 제한하라고 가르칩니다. 주님과의 깊은 교제나 주님의 명예를 위해, 혹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내 몸(의 일)을 어떻게 절제할지 나눠 봅시다. 2.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자 성령의 전입니다(15-20절). 1) 우리 몸을 음란한 목적으로 사용하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15-17절) 음행은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의 몸을 죄와 정욕의 지체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선언하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교회)의 지체들이라고 한다(참조. 고전 12:27).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연합한 자들이며, 예수와 함께 살아야 할 존재들이다(참조. 롬 6:3-11). 마치 신랑과 신부가 하나가 되듯이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로 연합되어 살아가야 할 존재들이다(참조. 엡 5:23).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인이 그의 몸을 창기와 합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한 몸’(연합) 됨을 깨는 행위다. 음행은 단지 육체적인 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를 내는 심각한 영적인 범죄다. 2) ‘음행’이 다른 죄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무엇입니까?(18절) 다른 죄는 몸 밖에 있지만,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음행을 피하라’(헬, 퓨게테 뗀 포르네이안)를 직역하면, ‘음행으로부터 도망치라’이다. 이것은 음행을 저지를 만한 어떤 환경도 만들지 말라는 거다. 음행과 우상숭배의 유혹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정도 유혹은 견딜 수 있다’고 교만을 떨며 음행의 자리를 전전해서는 안 된다. 아예 음행을 저지를 환경 자체를 조성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철저히 음행을 피해야 하는 이유는 음행의 죄가 다른 죄와 달리 그 사람의 몸에 부정을 각인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몸은 주께 속하고 주를 위해 써야 할 몸이다. 그런데 그 몸을 창기와 연합시키면 그 사람은 자기 몸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상태로는 주님과 연합할 수 없다. 음행은 단지 부적절한 육체관계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심각한 영적인 죄다. 3) 우리 몸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19-20절) 우리의 몸(성도, 교회)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며, 값이 지불된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다(참조. 요 1:14; 2:19-21). 바울은 예수님의 이 성전론을 이어받아 건물이 아닌 예수님과 연합된 교회가 성전이라고 선언한다(참조. 엡 2:20-22). 본문 19절에서도 ‘너희 몸’은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라고 한다. 바울은 교회가 성전이며, 그리스도인 각자의 몸이 또한 성전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음란한 행동으로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을 부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또한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산 존재이기에(구속받은 자) 더 이상 사탄(죄)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나눔 2 그리스도의 지체답게 살지 못하도록 나를 유혹하는 환경은 무엇입니까? 그 유혹을 ‘피하기’(18절) 위해 오늘 내가 실천할 일은 무엇입니까? 나눔 3 단순히 나쁜 일을 피하는 수준을 넘어, 하나님의 소유인 나와 우리 공동체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일은 무엇일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정욕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게 하소서. 공동체 _ 우리 개인과 공동체가 성령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전이 되게 하소서. 260607 속회지도자 자료 2026-06-04 신내교회 260607 속회지도자 자료.pdf 6월 첫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지혜로운 건축자 고린도전서 3:1-15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내 주의 나라와(찬송 208장, 구 246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갓난아기가 엄마 젖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젖 뗄 나이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모유만 찾는다면, 그 아이는 제대로 성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인 지 꽤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미성숙한 삶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이 분파를 형성하여 서로 다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린도 교회를 향해 바울은 ‘그날’에 불의 시험이 있을 거라고 경고합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영적 미성숙을 지적합니다(1-9절). 1) 바울이 고린도 성도를 ‘육신에 속한 자’라고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3-4절) 고린도 성도가 분파를 만들어 서로 시기하고 분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도를 ‘신령한 자’(1절, spiritual people)와 ‘육신에 속한 자’(1절, people of the flesh)로 나눈다. ‘신령한 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 사람을 의미하고,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을 의미한다. 육신에 속한 자는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분파(바울, 베드로, 아볼로)를 만들며 분쟁하는 미성숙한 성도를 의미한다. 2) 바울과 아볼로의 수고도 있지만, 결국 교회를 성장시킨 분은 누구입니까?(6-7절) 하나님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능력과 은사는 ‘통치의 수단’이 아니라 ‘섬김의 수단’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 아볼로, 베드로의 은사와 능력을 차별화하면서 각기 자기 우두머리로 삼고 추앙했다. 바울과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를 위해 수고한 건 사실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선포했으며, 아볼로는 바울의 뒤를 이어 성도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했다. 하지만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역의 도구였을 뿐 교회를 궁극적으로 성장시킨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교회는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성장한다. 3) 바울과 아볼로가 지닌 공통된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9절) 하나님의 동역자 ‘바울과 아볼로’(9절,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헬, 쉬네르고이)이다. ‘쉬네르고스’(동역자)는 동일한 일을 하는 일꾼, 사역자를 의미한다. 즉 바울과 아볼로의 직분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같은 일을 하는 동역자들이다. 5절에서는 이를 ‘사역자들’(헬, 디아코노이)이라고 표현한다. ‘디아코노이’(사 역자들)는 요한복음 2:9에서는 ‘하인들’로, 요한복음 12:26에서는 ‘섬기는 자’로, 디모데전서 3:8에서는 ‘집사들’로 쓰인다. 헬라어 ‘디아코니아’는 원래 ‘식탁에서 시중들기’란 의미를 담고 있다. 바울은 교회 안의 다양한 직분을 지칭할 때, 당시 로마의 높은 관직명을 쓰지 않고, ‘디아코니아’로 통일하여 부른다(참조. 고전 12:5). 즉 바울과 아볼로 모두 교회 안에서는 ‘섬김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였다. 나눔 1 바울은 교회 성도를 향해 사람을 중심으로 파벌을 만들지 말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몸이 되라고 말합니다. 혹시 우리 공동체에 분열과 갈등은 없는지 돌아보고,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 무엇에 힘써야 할지 이야기해 봅시다. 나눔 2 교회에서 봉사하거나,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나를 다른 성도와 비교하거나 경쟁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경쟁자가 아닌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각자의 사명을 격려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이야기해 봅시다. 2. 바울은 사역자의 ‘공적’이 평가받을 날에 대해 말합니다(10-15절). 1) 바울은 어떤 터(토대) 위에 교회 공동체를 세웠습니까?(10-11절) 예수 그리스도 바울이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어 교회의 ‘터’(기초)를 잘 세웠지만(10절), 이 ‘터’는 바울의 ‘사상과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다. 바울이나 그 어떤 사역자도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없다. 복음 사역자들은 오직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의 ‘터’(기초) 위에 교회를 세우며 섬기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예수 외에 그 어떤 사람이 교회의 기초가 되어서도 안 되고, 또한 복음이 아닌 그 어떤 사상이나 지혜, 가르침(율법), 공적이 교회의 터가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의 유일한 기초는 그리스도 예수다. 2) ‘그날’이 이르면 하나님 나라 사역자들의 ‘공적’은 어떻게 평가받습니까?(12-15절) 그날에 모든 사역자의 공적이 불의 시험을 받을 것이다.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을 것이다. ‘그날’(최후의 심판 날)에 복음 사역자들은 그들의 공적에 따라 평가받을 것이다. 복음 사역자들이 만일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듯이 거짓되고 불성실하게 사역하면 그 공적이 다 불타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단단한 금이나 보석처럼 성실하고 바르게 사역하면 그 사람의 공적은 불의 시험에도 남게 될 것이다. 불충하게 사역한 자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 받은 것 같다’(헬, 후토스 데 호스 디아 퓌로스)라는 관용구는 마치 ‘불을 통과한 자 같이’ 간신히 구원을 받는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은 부끄러운 구원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가 주님을 믿음으로써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긴 하지만 그가 맡은 하나님 나라 사역은 전혀 빛을 내지 못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면 불에 타지 않는 공적으로 인정받은 사람이 받는 상은 무엇인가? 이것은 구원 외에 또 다른 부가적 상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충성스럽게 수고한 모든 일이 심판 날에 이르기까지 인정되며 찬란하게 빛나는 것 자체가 그에게 큰 영광이며 상이라는 의미다. 나눔 3 지혜로운 건축자는 자기 의로움이나 열정으로 교회를 건축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기초 위에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태도로 공동체를 건축합니다. 무엇을 기초로, 어떤 동기로, 어떤 수단으로, 어떤 목적을 위해 교회에서 봉사할지 나의 결심을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날마다 순전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주의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공동체 _ 분열과 다툼이 아닌 존중과 배려로 공동체를 건강히 세우게 하소서. 260531 속회지도자 자료 2026-05-27 신내교회 260531 속회지도자 자료.pdf 5월 다섯째 주 그룹큐티나눔 아버지의 마지막 노래 창세기 49:16-28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복의 근원 강림하사(찬송 28장, 구 28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유리마다 빛깔과 모양이 제각각이지만, 한데 모으면 경이로운 작품이 탄생합니다. 오래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꼭 그렇습니다. 멀리서는 하나의 성스러운 그림이나, 가까이서 보면 서로 다른 조각이 복잡하게 이어져 있을 뿐입니다. 야곱은 이처럼 제각각 다른 아들들의 삶을 두고 노래합니다. 단순한 과거의 회상을 넘어, 그들의 미래에 하나님의 빛이 통과할 때 어떤 영광이 드러날지를 미리 보여 주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야곱이 자녀들을 축복합니다(16-21절). 1) 야곱은 심판자가 될 ‘단’을 무엇과 같다고 합니까?(17절) 길섶의 뱀, 샛길의 독사 야곱은 이름의 발음이 유사한 ‘단’과 ‘심판’(딘)을 연결하여 언어유희로 노래한다. 야곱은 단을 길섶에 숨은 뱀이나 샛길의 독사에 비유하는데, 이는 단 지파가 압도적인 규모의 군사력은 아닐지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적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는 기습적 용맹함과 지략을 가졌음을 뜻한다. 말의 뒷굽을 물어 기마병을 거꾸러뜨리는 독사의 모습은 훗날 단 지파 출신인 삼손이 보여 준 놀라운 힘을 연상시킨다. 똬리를 틀고 기회를 엿보다 적을 무너뜨리는 단 지파의 기질은 작지만 결코 얕볼 수 없는 날카로운 공격성과 통찰력을 상징한다. 2) ‘갓’은 적들에게 쫓길 때 도리어 어떻게 합니까?(19절) 도리어 그(군대) 뒤를 추격할 것이다. 갓 지파에 대한 야곱의 예언은 훗날 이들이 처하게 될 지정학적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갓 지파는 요단 동편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아 일찍 정착했으나, 지리적 특성상 암몬이나 모압 같은 이방 민족의 끊임없는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전쟁이 일상이 된 환경 속에서 때로는 적의 공격에 밀리거나 후퇴해야 하는 고달픈 상황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야곱은 갓이 단순히 쫓기는 자로 남지 않을 것임을 선포한다.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할 것이라”는 외침은 위기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전세를 역전시켜 끝내 승리하는 갓 지파의 강인한 용맹함과 회복력을 상징한다. 이는 고난에 함몰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적의 배후를 치는 반격의 역사를 예고하는 축복이다. 나눔 1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큰 문제(사람, 환경, 내면의 약점 등) 앞에서, 단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길을 찾아내거나, 혹은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끝까지 견뎌내어 결국 승리한 경험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2. 야곱은 아들마다 알맞은 복을 빕니다(22-28절). 1) 야곱은 요셉을 무엇에 비유합니까?(22절) 샘 곁의 무성한 가지 야곱은 유다와 더불어 요셉을 축복의 핵심 인물로 비중 있게 다룬다. 흉년의 위기 속에서 온 가족을 보호한 요셉의 공로를 생각하면 이러한 강조는 지극히 당연하다. 요셉이 샘 곁에 뿌리를 두고 그 가지가 담을 넘을 정도로 번영할 것이라는 예언은, 훗날 북이스라엘의 주역이 될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거대한 성장을 암시한다. 또한 이 노래는 요셉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의 굴곡을 그대로 투영한다. 인생의 도처에서 나타난 대적들이 그를 향해 증오의 활을 쏘아 대며 학대했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고 견고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팔에 힘을 주시고 늘 동행하셨기 때문이다. 창세기 39장과 41장이 거듭 강조하듯, 요셉이 거둔 승리와 무성함은 끊이지 않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그 존재의 뿌리를 깊이 박은 결과다. 2) 요셉의 팔이 힘을 얻은 비결은 무엇입니까?(24절)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하나님)의 손을 힘입기 때문이다. 야곱은 요셉의 팔이 그 어떤 학대와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비결이 바로 하나님의 손을 힘입었기 때문이라고 선포한다. 요셉의 인생 행로를 보면 수많은 대적자가 그를 향해 활을 쏘며 괴롭혔지만, 정작 그의 활은 더욱 견고해졌고 팔은 힘을 얻었다. 이는 요셉 개인의 뛰어남보다 ‘야곱의 전능자’이자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하나님의 권능이 그를 붙들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성경의 서사 속에서 하나님의 손은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요셉이 처한 모든 위기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셨다’는 말로 묘사된다. 아무리 세상의 대적자가 강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이길 존재는 없다. 결국 야곱은 요셉을 향해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 곧 ‘하나님의 전능하신 보호와 중단 없는 동행’을 노래하고 있다. 3) 야곱은 무엇을 바탕으로 복을 빌었습니까?(28절)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했다. 야곱이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했다는 표현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각 자녀가 살아온 삶의 궤적과 그들의 고유한 성품, 그리고 앞으로 그들이 형성할 지파가 마주하게 될 구체적인 현실을 깊이 통찰한 결과다. 야곱은 아버지로서 자녀들의 장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감당해야 할 고유한 사명에 맞추어 예언적 격려를 전한 것이다. 결국 이 축복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허락하신 은사의 분량과 그릇의 크기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선의 삶을 일구어 가도록 응원하는 사랑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어떤 예언은 그들의 허물을 지적하며 엄중하게 들릴지라도, 그 바탕에는 자손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바르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 나눔 2 요셉은 모진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을 꼭 붙잡고 어떤 역경도 뛰어넘는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높은 담장과 같은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넘기 위해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면 이야기해 봅시다. 나눔 3 야곱의 아들들은 각기 다른 축복을 받았지만, 그 복들은 모두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세우는 데 꼭 필요한 조각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활용해 구체적으로 실천해 보고 싶은 ‘나다운 섬김’이 있다면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내 모습 그대로 주께 뿌리를 내리게 해 주소서. 공동체 _ 각자 고유한 빛깔로 하나 되어 주님의 영광을 가득 채우는 교회 되게 하소서. 260524 속회지도자 자료 2026-05-20 신내교회 260524 속회지도자 자료.pdf 5월 넷째 주 그룹큐티나눔 하나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창세기 45:1-15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나의 갈 길 다 가도록(찬송 384장, 구 434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2006년 10월, 평화롭던 아미쉬 마을 학교에 한 괴한이 침입해 총기를 난사했습니다. 범인은 아무 원한도 없는 소녀 5명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곧장 범인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복수가 아니라, 두려움에 떨고 있을 범인의 아내와 아이들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당신들 역시 우리처럼 소중한 가족을 잃은 피해자일 뿐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마침내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1-8절). 1) 요셉이 정체를 드러낸 순간 형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3절) 놀라서 대답하지 못했다. 야곱의 아들들은 흉년으로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왔다가 정탐꾼으로 몰리는 등 큰 곤경에 처한다. 시므온이 인질로 잡히고 막내 베냐민까지 은잔 사건에 휘말리자, 형제들은 아버지를 위해 베냐민을 살려달라며 간곡히 애원한다. 이 진심 어린 호소에 감정이 격해진 요셉은 마침내 자신이 요셉임을 밝힌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생이 대제국의 총리가 되어 눈앞에 서 있는 현실에 형들은 충격으로 얼어붙는다. 과거 자신들이 은 이십 세겔에 팔아넘겼던 요셉이 자신들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은 형들의 상상을 완전히 초월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극심한 당혹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서 있을 뿐이다. 이 정적은 인간의 악행을 선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2) 요셉은 누가 자신을 애굽으로 보냈다고 고백합니까? (5, 7-8절) 하나님 요셉은 경악하여 아무 말도 못 하는 형제들에게 사건의 내막을 차분히 설명한다. 그는 자신을 판 일로 자책하거나 괴로워하지 말라며 형들을 안심시키고, 이 모든 과정이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이었음을 강조한다. 노예 생활과 억울한 옥살이를 거친 13년의 세월은 요셉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시련의 주체를 ‘형들’이나 ‘보디발의 아내’가 아닌 ‘하나님’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과의 약속을 잊었을 때조차 원망 대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지혜를 배운 것이다. 아들 므낫세를 낳으며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되었기에, 형제들을 향한 그의 고백은 이제 원망 없는 진실이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악행조차 선한 결과로 바꾸어 놓으신다. 요셉의 영성이 고난을 통해 성숙해졌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가문의 극적인 재회와 화해를 허락하셨다. 나눔 1 누군가 나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사람이 밉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그 아픈 일조차 나를 훈련하시고 다른 누군가를 돕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2. 요셉은 형제들의 가족을 초청합니다(9-15절). 1) 요셉은 가족에게 무엇을 약속합니까?(11절)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아직 다섯 해나 남은 극심한 흉년을 언급하며 애굽으로 이주할 것을 권유한다. 이 제안은 단순히 거처를 옮기는 차원을 넘어, 온 가족의 생계를 자신이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강력한 약속이다. 여기서 요셉이 언급한 보호의 대상에는 자신을 상인에게 팔아넘겼던 형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요셉의 파격적인 호의 앞에 형들은 본능적인 의심과 어리둥절함을 느꼈을 것이다. ‘나중에 우리를 보복하려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이나 앞으로의 흉년에 대한 불신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형제들이 요셉의 진심을 믿지 못하는 것은 요셉의 태도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지금까지 아버지를 속이며 거짓되게 살아온 방식이 타인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누군가를 신뢰하지 못하는 형제들의 불안은, 그들 스스로가 정직하지 못한 삶을 살아왔음을 보여 주는 내면의 투영이다. 2) 요셉은 자신의 약속을 믿을 수 있도록 형들에게 무슨 말을 덧붙입니까?(12절)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요셉이 ‘내 입’이 직접 말하고 있음을 강조한 것은 두 가지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언어적 확신이다. 요셉은 그동안 통역관을 사이에 두고 형들과 대화했으나(창 42:23), 모든 시종을 물러나게 한 뒤(45:1) 그들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로 직접 말을 건넸다. 이집트 최고의 권력자가 자신들의 언어로 소통하는 것을 직접 보고 듣는 순간, 형들은 그가 진짜 요셉임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둘째는 관계의 진실성이다. 요셉은 이제 통치자로서의 가면을 벗고 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려 한다. 그동안 아버지를 속이며 거짓에 익숙한 삶을 살았던 형제들에게 요셉은 자신의 말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정직함을 호소한다. 즉, “내 입이 말한다”는 선언은 지금 형들이 듣고 있는 이 파격적인 약속이 어떠한 정치적 계산이나 속임수도 없는 요셉 자신의 인격에서 나온 진실임을 증명하려는 강력한 다짐이라 할 수 있다. 3) 형들이 비로소 요셉과 대화하기 시작한 때는 언제입니까?(15절) 요셉이 형들과 입 맞추며 안고 울었을 때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던 형들이 요셉과 대화를 시작한 것은, 요셉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가족 부양에 대한 진심을 전하며 설득한 이후다. 요셉은 형들을 안심시킨 뒤 한 사람씩 입을 맞추며 안고 울었다. 이때의 입맞춤은 단순한 형식적 인사가 아니라, 오랜 세월 억눌려 있던 죄책감과 원망을 녹여 내고 새로운 관계를 열어 가는 화해의 징표다. 이는 어긋나고 삐뚤어졌던 형제들의 마음을 회복시키는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형들은 이 뜨거운 눈물과 포옹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들처럼 누군가를 속이는 것은 아니며 진실한 용서가 실제로 존재함을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서로의 입맞춤으로 얼어붙었던 형들의 입이 열리고 진정한 소통이 시작되었다. 나눔 2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은 흉년 동안 그들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절연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처럼 그의 형편을 살피거나 진심으로 잘되기를 바란 적이 있습니까? 나눔 3 두려움에 떨던 형들은 요셉이 먼저 다가갔을 때 비로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오해나 갈등으로 오랜 기간 침묵하던 관계가 누군가 먼저 건넨 사과나 진심 어린 행동으로 풀린 경험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는 지혜를 주소서. 공동체 _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안고 거짓 없는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60517 선교회 모임 자료 2026-05-14 신내교회 5월_선교회_모임_자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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