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자료
260419 속회지도자 자료
2026-04-14
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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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셋째 주 그룹큐티나눔
잠 못 이루는 밤에
창세기 28:10-22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찬송 338장, 구 364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장자의 축복을 가로챕니다. 하지만 그 결과 야곱은 형의 미움을 받고 먼 길로 도망해야 했습니다. 야곱은 외로움과 두려움을 안고 거친 들에서 노숙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먼저 다가와 말씀하시고 위로하십니다. 우리가 잠 못 이루는 밤에 하나님은 은혜로 찾아오셔서 평안과 소망을 안겨 주십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도망가던 중에 거친 들에서 노숙합니다(10-15절).
1) 야곱이 꿈에서 본 장면은 무엇입니까?(12절)
사닥다리가 땅 위에서 하늘까지 닿아 있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사닥다리’는 히브리어로 ‘술람’이다. 그런데 이 ‘술람’은 지금의 간이 사다리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높은 곳을 오르도록 쌓은 계단을 의미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계단식 탑(신전 또는 제단)에 나오는 오르막 계단이 대표적인 예다. 야곱의 꿈에 나타난 이 계단이 땅에서 하늘까지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 긴 계단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였다. 그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까지 닿은 지점을 ‘하늘의 문’이라 하였다(17절). 즉 땅에서 하늘까지 사닥다리가 놓였다는 건 하늘과 땅이 ‘하늘의 문’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의미한다. 야곱은 간교하게 형과 아버지를 속이며 쫓기는 신세였지만, 하나님은 땅의 야곱을 보살피고 있었다. 야곱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돌보고 계셨다.
2) 야곱이 꿈에서 들은 말씀은 무엇입니까?(13-15절)
“네가 이 땅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며,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리라.”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권한을 간교한 술수로 탈취한 잘못을 범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야곱을 책망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야곱에게 다시 말씀하신다(13:14-15).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이 언약의 말씀을 도망자 야곱에게 하신 것이다. 야곱의 자손이 동서남북으로 퍼져나갈 것이며 모든 족속이 야곱의 자손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야곱이 아직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때, 아니 찾을 기회도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야곱에게 찾아와 은혜의 손을 내민 것이다.
나눔 1 도망자 신세가 되어 두려움에 떨며 노숙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들려주셨습니다. 야곱처럼 외롭게 광야 생활을 해야 했던 적은 언제입니까? 그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위로하고 회복시켜 주셨는지 나눠 봅시다.
2. 야곱이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서원합니다(16-22절).
1) 야곱이 잠에서 깬 후에 비로소 깨달은 사실은 무엇입니까?(16절)
여호와께서 자신이 있는 곳에 계시다는 사실
야곱은 꿈을 꾸면서도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꿈을 꾸고 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게 되었다. 신구약 성경이 완전히 기록되기 이전에 백성들은 꿈과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야곱은 꿈에서 계시의 말씀을 들었으며, 꿈을 깬 후에 그 말씀에 대한 해석을 시도했다(16-17절). 야곱은 말씀 묵상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성경 묵상이다. 성경 묵상은 단지 성경의 팩트만 파악하는 게 아니라 그 말씀의 팩트 속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구체적인 메시지를 찾는 것이다. 야곱은 그간 남을 속이는 삶만 살아오다가 벧엘에서 비로소 말씀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2)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장소를 무엇이라고 명명합니까?(17-19절)
‘벧엘’(하나님의 집)
야곱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곳을 ‘하나님의 집(벧엘)’, ‘하늘의 문’이라 칭했다. ‘하나님의 집’은 이곳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던 자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결코 하늘 위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이 땅에 임재하여 그의 사랑하는 백성과 동행하시는 분이다. ‘하늘의 문’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땅에 있는 백성이 만날 수 있는 만남의 자리를 상징한다. 이곳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진 ‘시은소’(施恩所)다. 사람이 감히 하나님을 만날 자격도 능력도 없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와 말 걸어 주시고 만나 주신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집, 성소다.
3)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한 내용은 무엇입니까?(20-22절)
‘하나님의 도움으로 내가 평안히 돌아온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나는 이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고 주께 십일조를 드릴 것이다.’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로 안전하게 이 땅에 돌아오면, 야곱은 여호와를 진정한 하나님으로 모시며, 이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고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이 약속은 야곱 당대에 다 성취되는 게 아니다. 사실은 구약과 신약 전 역사를 통해 성취된다.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은 구약 시대 성소를 의미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는데 바로 그 자리가 성소다. 그 하늘의 성소가 출애굽 광야에서 성막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광야 성막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발전하고, 예수님은 이 땅에 참 성전으로 성육신하신다(요 1:14). 또한 예수님과 연결된 교회가 바로 성전이다(엡 2:20-22). 요한계시록 3:8과 4:5에 나오는 ‘열린 문’은 지상 성전과 하늘 성전을 연결하는 통로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의 은혜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눔 2 야곱에게 벧엘은 돌베개를 베고 자던 차가운 땅이었지만, 하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이 되었습니다. 일상(일터, 가정, 학교)에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예배하는 ‘나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나눔 3 야곱은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십일조와 헌신을 약속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드린 서원(약속)이 있습니까? 그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지금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낙심될 때, 먼저 다가와 손잡아 주시고 위로하여 주소서.
공동체 _ 하나님께 약속한 서원을 신실하게 지킬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주소서.
260412 속회지도자 자료
2026-04-08
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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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둘째 주 그룹큐티나눔
미리 준비하는 아버지
창세기 22:1-18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복의 근원 강림하사(찬송 28장, 구 28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부르십니다. 그 시험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언약의 씨’인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받으시고 친히 번제로 쓸 양을 따로 준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친히 자기 아들을 준비하셨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아브라함은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을 받았지만, 아침 일찍 길을 떠납니다(1-8절).
1)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1-2절)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부르셨다. 시험의 내용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다.
야고보서 1:13에 의하면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 그렇다면 야고보서 1:13과 창세기 22:1은 서로 모순되는 말씀인가? 아니다.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시험은 ‘유혹’(temptation)을 의미한다. ‘유혹’은 어떤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함정을 파고 유인하는 거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죽음의 길로 이끌기 위해 미혹하지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순종)하는지는 시험(Test)하신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백 세에 낳은 약속의 씨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차마 순종하기 어려운 시험 문제를 하나님께 받았다.
2)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가던 이삭이 이상하게 여겨 질문한 것은 무엇입니까?(6-7절)
“번제를 위한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번제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제물인데 정작 양은 없고 장작과 불만 있는 게 이삭이 보기에 몹시 이상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질문한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예루살렘)까지 거리는 약 100km 정도다. 3일 정도 쉼 없이 걸어야 하는 거리다. 이삭은 당시 십대를 넘어 청년의 나이였을 것이다. 고대 맏아들을 인신 제사로 드리는 풍습이 만연해 있었기에 이삭은 혹시 자기가 제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청년 이삭은 3일 동안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아버지의 길을 따랐다.
3) 아들 이삭의 질문에 아버지 아브라함은 어떻게 대답합니까?(8절)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이삭의 질문에 아브라함은 번제로 드릴 어린양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거라고 에둘러 말한다. 사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드는 순간까지도 숫양을 따로 준비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몰랐다. 이런 차원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한 답변은 다소 궁색한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 상황을 단지 모면하려고 임기응변으로 말한 게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몸부림친 것이다.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내놓을 수 있다는 믿음을 표한 것이다.
나눔 1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시험은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를 불러 맡기신 시험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시험대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나눠 봅시다.
2. 하나님이 번제물을 친히 준비하십니다(9-18절).
1) 아브라함이 이삭을 칼로 찌르려 할 때 하늘에서 어떤 음성이 들려왔습니까?(9-12절)
“네 아들에게 손대지 말라. 네가 독자를 아낌없이 바치려 하였으니,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이제 내가 알겠다.”
이삭은 청년이고 아브라함은 노년의 할아버지였기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완력으로 제압해서 결박할 수는 없었다. 이삭이 순순히 받아들였기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고 칼을 들어 잡으려 하였다. 여기서 ‘잡다’라는 히브리어 ‘샤하트’는 ‘도살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이삭을 도살하려 했던 거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린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 네가 독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진짜 원하신 건 인신 제사가 아니라 헌신의 믿음이었다.
2) 결국 아브라함은 어떤 제물로 번제를 드립니까?(13-14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신 숫양으로 번제를 드렸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숫양을 준비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일관되게 인신 제사를 가증스럽게 여기신다(신 12:31; 레 18:21; 20:2-5; 렘 7:31; 19:5; 미 6:7; 왕하 16:3).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사람을 제물로 바치게 한 적이 없다. 아브라함에게는 그의 아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정작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어 모든 인류를 위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셨다. 인류 구원을 위한 궁극적인 희생 제물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것이다.
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거듭 말씀하신 언약의 복은 무엇입니까?(15-18절)
“네가 나의 말에 순종했으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네 자손으로 인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의 씨를 통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게 하는 것이다. 즉 이삭이 언약의 씨가 될 것이며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이스라엘 나라를 만드실 것이다. 바울은 이 사건을 그리스도 예수에게 적용한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씨’(자손)는 여럿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오직 한 사람을 가리키는 데 바로 그분이 ‘그리스도 예수’라는 거다(갈 3:1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 복이 예수를 통해 온전히 성취된 것이다. 예수를 믿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나눔 2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만 받으시고 번제물은 친히 준비하셨습니다. 이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것에 대한 예표이기도 합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해 주신 은혜를 경험한 적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나눔 3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며, 네 자손들로 인해 세상 모든 사람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은 무엇입니까? 가정과 공동체에 하나님이 주신 복을 헤아리며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이성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 말씀일지라도 믿음으로 순종하게 하소서.
공동체 _ 교회가 ‘복의 통로’가 되어 세상에 생명의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260405 속회지도자 자료
2026-04-01
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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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첫째 주 그룹큐티나눔
안식 후 첫날 제자들이 찾는 것
요한복음 20:1-18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예수 부활했으니(찬송 164장, 구 154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제자들이 안식 후 첫날 아침부터 찾고 있는 것은 부활의 주님이 아니라 차가운 주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부활하셨지만, 제자들은 빈 무덤 앞에서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을까?’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넋이 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죽음의 절망에 빠진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안식 후 첫날, 제자들은 ‘빈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습니다(1-10절).
1)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이 빈 것을 알고 어떻게 행동합니까?(1-2절)
제자들에게 가서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보고하면서,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간 것 같다고 말했다.
안식 후 첫날 예수의 무덤에 간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마리아가 ‘시몬 베드로’와 ‘사도 요한’(‘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빈 무덤 사실을 보고할 때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무덤에 간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와 더불어 여러 여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공관복음에서는 모두 막달라 마리아를 포함한 다른 여인들이 함께했음을 보고한다(마 28:1; 막 16:2; 눅 24:1, 10). 즉 예수의 빈 무덤을 목격한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었다. 여인들에게 아직 예수 부활에 대한 의식은 없었지만, 그들이 분명하게 보고 증언하는 바는 바로 ‘빈 무덤’이다.
2) 마리아의 말을 듣고 무덤에 간 제자들이 재차 확인한 것은 무엇입니까?(3-7절)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
베드로와 ‘다른 제자’(사도 요한)가 여인들의 말을 듣고 즉각 예수의 무덤으로 달려갔다. 사도 요한이 베드로보다 젊었기에 좀 더 빨리 뛰어 무덤에 도착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무덤 밖에서 안을 확인할 뿐 무덤 안으로는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드로는 주저하지 않고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은 없었고,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더 특이한 점은 예수의 얼굴을 감쌌던 수건(수다리온)이 시신 머리 부분에 따로 가지런히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예수의 몸을 쌌던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이 그대로 있는 채 예수님의 몸만 빠져나간 것을 보여 준다.
3) 제자들이 ‘빈 무덤’을 보고도 깨닫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9절)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리라는 성경 말씀
베드로와 사도 요한 모두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고 예언한 구약의 말씀은 깨닫지 못했다(참조. 시 16:10; 호 6:2).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가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초대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후다(요 2:22; 눅 24:45-46). 빈 무덤은 부활의 분명한 증거이긴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제로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제자들과 만나 인격적으로 말씀을 나누며 자신을 보여 주는 일이 남아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직접 심방하신다(요 20:19).
나눔 1 ‘빈 무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명확한 증거임에도 제자들은 그 빈 무덤에서 다시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려 했습니다. 혹시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전히 무덤에서 찾으려는 건 아닙니까? 여전히 ‘죽음의 굴레’에 갇힌 채 낙망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서로 나눠 봅시다.
2.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11-18절).
1) ‘빈 무덤’을 보며 마리아가 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13절)
예수님의 시신이 도둑맞았다는 생각에 탄식했다.
마리아는 여전히 ‘빈 무덤’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예수님의 시신 ‘절도’로만 이해하려 한다. ‘빈 무덤’이 ‘예수의 부활’의 증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믿음이 아직 부족했던 거다. 여인은 단지 눈에 보이는 현상만 볼 뿐, ‘빈 무덤’의 의미를 예수님의 생전 말씀과 연결하지 못하고 있다(참조. 마 16:21; 17:22-23; 20:17-19). 빈 무덤은 예수 부활의 명확한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믿음이 부족하여 예수 시신을 지키지 못한 것만 자책하며 탄식하고 있다.
2)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인 줄 모르고 부탁한 것은 무엇입니까?(14-15절)
“예수님의 시신을 혹시 당신이 옮겼다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십시오.”
끝까지 여인이 관심을 두는 건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다. 심지어 살아계신 예수님께 ‘예수의 시신’을 어디에 두었는지 알려 달라고 요청한다. 기막힌 역설이다. 여인이 이렇게 하는 건 예수에 대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여인이 지극히 예수를 사랑하며 따랐기에 예수의 죽음에 예를 표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온전한 믿음은 예수의 죽음에 예를 표하는 게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3) 마리아는 방금 대화한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떻게 행동합니까?(16-18절)
즉시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렸다.
예수님은 자기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여전히 예수의 시신을 찾는 마리아의 우둔함을 책망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따뜻하게 ‘마리아야’라고 이름을 불러 주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 부활의 모습을 마리아에게 보여 주시고 이 사실(예수 부활)을 형제들(제자들)에게 가서 증언하라고 말씀하신다. 마리아는 이 예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며 제자들에게 가서 ‘살아나신 주님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신앙생활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을 증언하는 삶이다.
나눔 2 마리아는 무덤만 바라보며 주님의 부재를 한탄하다가, 부활하셔서 자기 등 뒤에 계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삶에서 ‘정말 주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하고 강렬한 주님의 임재를 느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나눔 3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달려가 “내가 주를 보았다”고 외친 것처럼, 내가 이 기쁜 부활의 소식을 전해 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지 구체적인 실천 한 가지를 정해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무덤(죽음, 삶의 문제)에서 시선을 돌려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소서.
공동체 _ 교회가 부활의 증인이 되어 생명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게 하소서.
260329 속회지도자 자료
2026-03-25
신내교회
260329 속회지도자 자료.pdf
3월 다섯째 주 그룹큐티나눔
주님이 떠난 자리에
요한복음 16:1-15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내가 매일 기쁘게(찬송 191장, 구 427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성도에게는 누구나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듯한 ‘영혼의 밤’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텅 빈 자리는 버려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또 다른 ‘초대’의 시간입니다. 눈에 보이는 껍데기에 의존하던 낡은 습관을 버리고, 마음의 눈을 떠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본심을 마주하라는, 가장 신비롭고 은밀한 사랑의 초대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예수님은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1-4절).
1)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가올 박해를 미리 말씀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1절)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고난을 미리 말씀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닥쳐올 시련 앞에서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박해 그 자체보다 더 위험한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의심에 빠져 신앙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이다. 주님은 이 모든 일을 미리 예고하심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비극이 통제 불능의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와 계획 안에 있음을 확증해 주셨다. 결국 이 예고는 제자들이 겪을 고통의 의미를 재정의하고, 끝까지 신뢰를 잃지 않게 하려는 주님의 세심한 배려다.
2) 사람들이 제자들을 박해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입니까?(3절)
사람들이 아버지와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겪게 될 박해의 가장 역설적인 지점은 가해자들이 그 폭력을 하나님을 위한 제의적 봉사로 확신한다는 점이다. 당시 유대교 사회에서 ‘출교’는 단순한 종교적 축출을 넘어 모든 사회적·경제적 관계가 단절되는 사회적 사형 선고와 같았다. 그들은 율법을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잔인한 박해를 행하면서도 그것이 신앙적인 정의라고 믿었다. 예수님은 이 비극의 근본 원인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무지’로 규정하신다. 하나님을 안다고 자부했으나, 정작 그분이 보내신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 영적 맹목이 종교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나눔 1 누구나 형통한 삶을 꿈꾸며 신앙생활을 시작하지만, 실상은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입거나 억울한 상황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뜻밖의 고난으로 주님을 원망하거나, 믿음이 요동했던 적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2. 성령님이 오셔서 제자들에게 할 일을 알려 주십니다(5-15절).
1)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인 까닭은 무엇입니까?(7절)
예수님이 떠나가시지 않으면 보혜사(성령)가 제자들에게로 오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떠나시는 것이 유익인 이유는,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 한 번에 한 장소에서만 제자들과 함께하실 수 있었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보내실 보혜사(성령)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서 각 사람의 심령 속에 내주하시며 우리를 도우신다. 당시 슬픔에 잠겼던 제자들은 이 영적 원리를 이해하기 어려웠겠지만, 결과적으로 성령의 오심은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땅끝까지 전파되는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다.
2) 성령님은 무엇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까?(8절)
죄, 의, 심판에 대하여
성령님이 오셔서 행하시는 책망은 단순히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당연하게 여겨온 기준을 완전히 뒤엎는 폭로다. 세상은 자신들이 ‘의롭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을 ‘심판’했으나, 성령님은 거꾸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이며, 하늘로 가신 예수님만이 참된 ‘의’이고, 오히려 예수를 죽인 세상 권세가 ‘심판’을 받았음을 드러낸다. 즉, 성령님은 인간이 세운 허구의 법정을 해체하시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승리했음을 온 천하에 알리는 역할을 하신다.
3) 진리이신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말하고 나타내고 알리시는 것은 무엇입니까?(13-15절)
예수님에게 들은 것을 말하고,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예수님의 것으로 알리신다.
본문은 성령님의 사역이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임을 보여 준다. 성령님은 스스로 나타내지 않으시고 오직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아버지의 것이 다 내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알리신다. 이는 성부-성자-성령의 완벽한 일치와 연합을 보여 준다. 결국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심으로써, 우리가 단순히 성경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권능에 동참하게 만드는 사역을 수행하신다.
나눔 2 제자들에게 주님의 빈자리는 공허가 아니라,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는 역전의 현장이 될 것입니다. 혹시 우리 삶에도 텅 비어 버린 상실의 공간이 있습니까? 성령께서 그 공간을 어떠한 은혜로 채우시길 원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나눔 3 성령님은 세상의 그릇됨을 책망하심으로 세상을 진리로 이끄십니다. 말씀과 양심을 통해 잘못을 꾸짖는 성령님 덕분에 다시 선한 마음을 품고 바른길로 가게 된 적이 있습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눈에 보이는 상황이 막막할지라도, 제 안에 계신 성령님을 더 깊이 신뢰하며 진리의 길을 걷게 하소서.
공동체 _ 화려한 프로그램에 의존하는 공동체가 아닌, 보이지 않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60322 속회지도자 자료
2026-03-18
신내교회
260322 속회지도자 자료.pdf
3월 넷째 주 그룹큐티나눔
발을 닦고, 길을 닦아 보이다
요한복음 13:1-17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십자가를 질 수 있나(찬송 461장, 구 519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명문대 출신의 수재이자 대형 교회들이 탐내던 스타 목사 사무엘 로건 브렝글. 그는 모든 부귀영화를 뒤로하고 윌리엄 부스를 찾아가 구세군에 자신을 투신했습니다. 자신의 화려한 이력이 큰 쓰임새가 되리라 믿었지만, 그에게 맡겨진 첫 임무는 훈련소 지하실에서 훈련생들의 진흙투성이 군화를 닦는 일이었습니다. 모욕감을 느껴 불평하던 순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예수님의 모습이 그의 뇌리를 스쳤습니다. 그는 군화의 진흙을 닦아 내며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닦아야 할 것은 군화에 묻은 진흙이 아니라, 마음 깊이 덕지덕지 붙어 있던 ‘교만’이었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1-11절).
1)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1절)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기 위해
당시 유대 사회에서 먼지 묻은 발을 씻기는 일은 가장 비천한 종이나 노예가 맡았던 낮은 자의 의무였다. 제자가 스승을 극진히 섬기는 관례는 있었으나, 스승이 종을 자처하여 제자의 발을 씻기는 것은 당대 사회의 위계질서를 완전히 뒤엎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요 1:14)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신 하나님의 성육신적 사랑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재현된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노예의 위치에 서심으로써, 사랑이란 위에서 아래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 섬기는 것임을 몸소 보여 주셨다.
2) 베드로가 자기 발을 씻지 못하게 하자, 예수님은 무슨 말로 그를 설득하셨습니까?(8절)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때로 우리는 ‘자격이 없다’는 겸손을 앞세워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거절하곤 한다. 베드로 역시 스승에 대한 예우를 지키려 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주님의 사역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씻겨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씻기심으로써 비로소 주님과 관계(상관) 있는 자로 만드신다. 내가 자격 없음을 고백하며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나, 반대로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며 은혜를 당연시하는 것 모두 ‘은혜의 본질’을 오해하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주님의 손길이 내 삶에 닿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순종이다.
나눔 1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을 섬겨야 한다는 생각에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섬김’보다 ‘씻김’이 먼저입니다. 그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께 사랑받는 기쁨’보다 ‘일의 성취나 인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진 않았는지 솔직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2.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본을 따르기를 바라십니다(12-17절).
1)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명령하셨습니까?(14절)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라는 말씀에서 ‘옳으니라’라는 표현은 도덕적, 신앙적 당위성을 담고 있다. 당시 사회적 통념으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발을 씻기는 것이 당연했지만, 예수님은 이 구조를 완전히 뒤엎으셨다. 스승이신 주님이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기에, 이제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더 높은가를 다투는 대신 누가 더 낮은 곳에서 섬길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 되어야 했다. 결국 성도의 위대함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거느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의 발을 씻기느냐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준다.
2)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15절)
제자들이 그대로 따르도록 보여 주신 본(본보기)이다.
예수님은 섬김을 관념적인 이론이나 고결한 철학으로만 남겨 두지 않으셨다.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행동, 즉 ‘발을 씻기심’이라는 시각적이고 실천적인 패턴을 직접 몸으로 그려 내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가르침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여 주신 그 행동 양식을 삶의 표준으로 삼아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인 삶의 태도로 낮아짐과 섬김을 증명해 내는 것이다.
3)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17절)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본을 따라 서로를 섬겨야 마땅함을 알고 행하는 것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의 비결은 단순히 주님의 가르침을 깨닫는 ‘지식’에 머물지 않고, 그 지식을 삶으로 번역해 내는 ‘실천’에 있다. 당시 요한복음의 수신자들은 영적인 지식만 있으면 구원에 충분하다고 믿던 영지주의적 풍조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된 지식이란 반드시 사랑의 행위로 증명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즉, 제자도의 핵심은 머리로 이해한 ‘섬김의 원리’가 손과 발을 통해 ‘섬김의 실제’로 나타날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복이 임한다는 것이다.
나눔 2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그들이 걸어가야 할 삶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공동체와 우리가 몸담은 이 사회 속에서, 주님을 따라 걸어야 할 ‘섬김의 길’은 무엇일지 함께 나눠 봅시다.
나눔 3 남의 발을 씻기는 것은 종의 일이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발을 씻기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발을 씻어 주는 태도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 누린 ‘복’에 대해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높아지려는 교만과 대접받으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예수님처럼 허리에 수건을 두르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공동체 _ 세상 속에서 섬김의 본을 보임으로 복음의 길을 닦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60315 속회지도자 자료
2026-03-13
신내교회
260315 속회지도자 자료.pdf
3월 셋째 주 그룹큐티나눔
믿으면 보이는 것들
요한복음 11:38-46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찬송 545장, 구 344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1945년 이후 육상계에는 ‘마의 4분 벽’이 존재했습니다. 당시 의학자들은 ‘인간이 4분 안에 1마일(약 1.6km)을 주파하면 심장이 터져 죽을 것’이라며 이는 신체 구조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했습니다. 하지만 로저 배니스터는 이 한계가 신체가 아닌 마음에 있다고 믿었고, 결국 1954년에 3분 59초 4의 기록으로 그 벽을 넘어섰습니다. 놀랍게도 불가능해 보이던 그 기록은 그 후 수많은 선수에 의해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불가능’이라는 돌을 치울 때, 비로소 ‘가능’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이는 믿음의 능력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을 막은 돌을 옮기려 하십니다(38-40절).
1) 예수님이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시자, 마르다는 무엇이라 말합니까?(39절)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고, 벌써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영혼이 3일 동안은 시신 주위를 맴돌며 다시 몸으로 돌아올 기회를 엿본다는 관념이 있었다. 그러나 ‘나흘째’가 되었다는 것은 영혼이 완전히 떠났으며, 신체 부패가 시작되어 생물학적 회복이 불가능한 절대적인 죽음을 의미했다. 마르다가 “벌써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오라버니가 이제는 그 어떤 기적의 범주에서도 벗어났다는 현실적이고도 처절한 절망을 드러낸 것이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십니까?(40절)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
예수님은 인간의 보편적인 인식론을 완전히 뒤집으신다. 대부분의 사람은 도마와 같이 “보아야 믿겠다”는 경험적 증명을 요구하지만, 예수님은 “믿으면 보리라”는 영적 원리를 선언하신다. 이는 믿음이 기적의 ‘결과’가 아니라 기적을 경험하기 위한 ‘전제’임을 의미한다. 썩은 냄새가 나는 절망적인 현실(4일 된 시신) 앞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먼저 신뢰할 때, 비로소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영광이 실재가 되어 나타난다.
나눔 1 마르다의 의식을 지배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이미 시신이 부패하여 냄새가 나는 참혹한 현실이었습니다. 혹시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보다 눈앞의 문제가 더 커 보여서, ‘이젠 끝났다’며 스스로 굳게 닫은 마음의 돌문이 있지 않습니까?
2.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십니다(41-46절).
1) 예수님이 주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 내어 기도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42절)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둘러선 무리가 믿게 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늘 소통하고 계셨기에 굳이 소리 내어 기도하실 필요가 없었으나, 곁에 선 무리를 위해 특별히 이 기도를 들려주셨다. 이는 이 기적이 예수의 개인적인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의 온전한 연합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원 성취’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음을 계시하는 도구로 기도를 사용하신 것이다. 결국 이 기도는 기적을 목격할 무리가 그 기적 너머에 있는 ‘보내신 이’(하나님)를 발견하도록 돕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2)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44a절)
죽은 자(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으나, 그의 모습은 여전히 ‘수족을 베로 동인 상태’였다. 당시 유대인의 매장 관습은 시신을 세마포로 감싸는 것이었으며, 이는 나사로가 생물학적으로는 살아났지만 외형적으로는 여전히 죽음의 흔적에 묶여 있었음을 보여 준다. 시신이 부패하여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자연의 법칙과 죽음의 굴레조차, 예수님의 한마디 권능 앞에서는 나사로를 무덤 속에 가두어 둘 수 없었음을 시각적으로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다.
3)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명하십니까?(44b절)
“(나사로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은 직접 행하셨지만, 그를 묶고 있는 베를 푸는 일은 주변 사람들에게 맡기셨다. 이는 죽음에서 옮겨진 한 영혼이 다시 일상의 삶을 영위하고 공동체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은혜와 더불어 지체의 돕는 손길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다니게 하라”는 말씀은 그가 이제 무덤이라는 폐쇄된 공간을 벗어나,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삶의 현장으로 당당히 복귀해야 함을 선포한다.
나눔 2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에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 이웃을 죽음의 결박에서 해방하고 생명을 누리도록 돕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나눔 3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나의 판단을 내려놓고 주님을 신뢰함으로 반전을 경험한 일이 있습니까? 막혔던 벽이 문이 되고 보이지 않던 해결책이 보였던 놀라운 은혜가 있다면 함께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눈앞의 현실이 아무리 암담해도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돌을 옮기게 하소서.
공동체 _ 우리 공동체가 사망의 권세에 결박되어 있는 이웃을 자유케 하는 주님의 손길이 되게 하소서.
260308 속회지도자 자료
2026-03-04
신내교회
260308 속회지도자 자료.pdf
3월 둘째 주 그룹큐티나눔
양을 위해 희생하는 목자
요한복음 10:1-21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찬송 569장, 구 442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9·11 테러 당시, 모건 스탠리의 보안 책임자 릭 레스콜라는 아수라장 속에서도 침착하게 대피를 지휘했습니다. 그의 지도력 덕분에 2700명의 직원 중 2687명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남은 이들을 구하려고 다시 불길 속으로 들어간 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는 위기의 순간에 도망치는 ‘삯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양 떼의 안전을 생각하여 끝까지 자리를 지킨, 우리 시대의 ‘선한 목자’였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예수님이 자신을 비유로 소개하십니다(1-10절).
1) 예수님은 자신을 무엇에 비유하십니까?(7절)
“나는 양의 문이다.”
예수님은 당시 제자들에게 익숙했던 목축 문화를 빌려 자신을 ‘양의 문’이라 선포하셨다. 목자가 양 떼를 몰고 멀리 나갔을 때, 밤이 되면 돌을 쌓아 임시 우리를 만들곤 했다. 이때 별도의 문이 없는 출입구 바닥에 목자가 직접 누워 잠을 청했는데, 이는 목자의 몸이 곧 우리로 드나드는 유일한 ‘문’이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비유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양들의 안전을 직접 책임지는 목자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지키는 ‘살아있는 문’이자 유일한 보호자가 되심을 강력하게 보여 준다.
2) 양의 문을 통하여 우리에 들어가는 양은 무엇을 받습니까?(9절)
구원을 받게 되고, 꼴을 얻게 된다.
본문에서 말하는 ‘구원’은 단순히 죽어서 가는 천국에 머물지 않는다. 예수님은 양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뿐만 아니라, 다시 밖으로 나가는 역동적인 모습(“들어가며 나오며”)을 통해 이 구원의 풍성함을 설명하신다. 이는 목자이신 주님의 보호 아래에서 누리는 일상의 자유와 안전을 의미한다. 참된 신앙은 심판을 피하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매 순간 주님과 동행하며 삶의 활력과 참된 생명력을 경험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나눔 1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으로 비유하시며, 그 문을 통할 때 얻게 될 구원과 풍성한 꼴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우리가 누리게 된 구원의 감격과 삶 속에서 채워 주시는 풍성한 기쁨을 소개해 봅시다.
2.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로 소개하십니다(11-21절).
1) ‘선한 목자’는 어떤 사람입니까?(11절)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로 정의하시며, 위기의 순간에 도망치는 ‘삯꾼’과 극명하게 대조하신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고용된 삯꾼은 이리가 나타나면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양을 버리는 것이 정당한 선택이었으나, 양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는 참된 목자는 목숨을 걸고 양을 지켰다. 예수님은 백성을 도구로 삼아 착취하던 바리새인들을 삯꾼으로 꾸짖으시며, 양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는 자신의 희생적 사랑이 진정한 목자의 증거임을 선포하신다.
2) 목자가 이리가 오는 것을 보고도 양을 버리고 달아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13절)
그가 삯꾼(품삯을 받고 임시로 일하는 일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난은 단순히 도덕적인 차원을 넘어, 당대 유대 사회의 최소한의 상식적 기준마저 저버린 무책임함을 지적하고 있다. 유대 법전인 ‘미쉬나’에 따르면 고용된 목자는 사자나 곰, 혹은 ‘이리 두 마리’ 이상이 나타나는 불가항력적 상황에서만 면책권이 주어졌다. 즉, 본문에 등장하는 ‘이리 한 마리’(단수) 정도는 목자의 막대기로 충분히 쫓아낼 수 있는 수준으로 간주 되었다. 그럼에도 양을 버리고 달아난 삯꾼은 법적 면책 사유조차 없는 극도의 태만함과 무관심을 보여 주며, 이는 당시 백성을 돌보지 않던 종교지도자들의 무책임한 실상을 날카롭게 폭로한다.
3)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14-15절)
예수님과 양이 서로 아는 것이, 아버지와 예수님이 서로 아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근거는 단순한 책임감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완전한 ‘앎’의 관계에 있다. 이는 목자가 없어서 흩어진 양 떼를 위해 하나님이 친히 목자가 되겠다고 선언하신 에스겔 34장의 약속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여기서 ‘안다’는 표현은 히브리어 ‘야다’의 개념으로,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닌 전인격적이고 경험적인 친밀함을 뜻한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을 온전히 아시고 사랑하시듯, 예수님 또한 우리를 그토록 깊이 알고 사랑하시기에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시는 것이다.
나눔 2 예수님은 나의 이름뿐만 아니라 숨겨진 아픔과 고민까지 다 아십니다. ‘주님이 내 상황과 마음을 다 알고 계셨구나’라고 깨달은 순간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나눔 3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주신 분이 해결하지 못하실 문제는 없습니다(참조. 롬 8:32). 이 믿음을 가지고, 지금 내가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할 걱정이나 염려는 무엇입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세상의 헛된 소리가 아닌 주님의 음성만 듣고 따라가는 주님의 양이 되게 하소서.
공동체 _ 주님의 마음을 품어 서로를 위해 기꺼이 수고를 감당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60301 속회지도자 자료
2026-02-25
신내교회
260301 속회지도자 자료.pdf
3월 첫째 주 그룹큐티나눔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는 시간
요한복음 9:1-12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어두운 내 눈 밝히사(찬송 366장, 구 485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일본에는 깨진 도자기를 버리는 대신, 그 틈을 옻과 금가루로 메우는 ‘킨츠기’라는 기법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수리된 그릇은 깨지기 전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예술품으로 재탄생합니다. 예수님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은 깨진 도자기처럼 상처 입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깨어진 틈을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채우셔서 우리를 세상에 하나뿐인 걸작으로 다시 빚어내십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예수님과 제자들이 시각장애인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눕니다(1-3절).
1) 제자들은 그가 시각장애인이 된 원인을 무엇으로 보았습니까?(2절)
자신의 죄, 혹은 부모의 죄
당대 유대 사회는 “복은 순종의 결과이며 불행은 죄의 대가”라는 인과응보적 신학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잠언과 같은 지혜 문학의 전통과 맞닿아 있었으며, 심지어 태아의 범죄 가능성이나 부모의 죄가 자녀에게 전가된다는 구체적인 신학적 논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제자들의 질문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고난의 원인을 오직 ‘누구의 죄 때문인가’라는 정죄의 틀 안에서만 파악하려 했던 당시의 한계를 보여 준다.
2) 예수님은 그 사람이 시각장애인이 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십니까?(3절)
당사자나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설명하신다.
유대 사회가 시각장애를 죄의 대가로 정죄하려 했다면, 예수님은 이 고통을 통해 일하실 하나님께로 사람들의 시선을 옮긴다. 이는 “선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강력한 대답이기도 하다. 인간의 연약함과 고통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로 재정의됨으로써, 시각장애인의 치유 사건은 단순한 신체적 회복을 넘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된다.
나눔 1 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내가 뭘 잘못했나?’ 하며 자책하거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통해 도리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일을 이야기해 봅시다.
2. 예수님이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4-12절).
1)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5절)
세상의 빛
예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선포하신 것은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빛과 어둠의 대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흑암을 물리치고 빛을 창조하셨던 사건을 연상시키며, 이제 예수께서 시각장애인이 처한 어둠을 몰아내고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심을 시사한다. 이 선포의 배경에는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의 강력한 시각적 이미지가 담겨 있다. 초막절 기간, 예루살렘 성전 ‘여인의 뜰’에는 거대한 횃불들이 타올라 온 성안을 환하게 비췄다. 이 빛은 광야 시절 이스라엘을 인도했던 ‘불 기둥’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나아가 열방을 비출 메시아를 고대하는 소망을 담고 있다. 예수님은 성전의 횃불을 보시며, 그 인공적인 빛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인도자이자 영원한 빛이 바로 자신임을 제자들에게 일깨워 주신다.
2) 예수님은 어떻게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까?(6-7절)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도록 하셨다.
예수께서 침으로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신 행위는,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던 창세기의 창조 사건(창 2:7)을 강력하게 연상시킨다. 이는 단순히 당시의 민간요법을 따르신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결여되었던 시각 기능을 창조주로서 새롭게 창조하고 빚으시는 신성한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만드셨던 태초의 하나님처럼, 예수님은 어둠 속에 갇힌 태생적 시각장애인에게 빛의 세계를 선물하신다. 기혼 샘에서 흘러나온 물이 모이는 실로암 못은 성전 제례 시 정결 예식을 위해 사용되던 거룩한 장소였다. 시각장애인이 그곳에서 씻어 눈을 뜨게 된 것은, 육체적인 치유를 넘어 그동안 죄인으로 낙인찍혀 소외되었던 그가 공동체 안에서 온전한 정결함을 인정받고 회복되었음을 공포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3) 주변 사람들은 그가 눈을 뜨게 된 것을 알아보았습니까?(8-9절)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고,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이 눈을 뜨고 세상을 보게 된 사건은 주변 사람들의 인식을 뒤흔들 만큼 강렬했다. 늘 같은 자리에 앉아 구걸하던 비천한 ‘걸인’의 모습이 사람들의 기억에 너무나 강하게 박혀 있었기에, 눈을 뜨고 당당히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동일인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생소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주변에서 동일인 여부를 두고 논쟁을 벌일 정도였으나, 그는 단호하게 “내가 그다”라고 밝힌다. 이는 그가 단순히 시력만 회복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덧씌운 ‘거지’라는 낙인을 벗고 하나님이 회복시키신 새로운 정체성을 스스로 선포했음을 의미한다.
나눔 2 침으로 이긴 진흙을 눈에 바르고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때로 우리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거나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하는 일을 요구하십니다. 예상치 못한 명령에 순종함으로 예기치 못한 은혜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나눔 3 제자들은 이유를 찾아 헤맸지만, 예수님은 목적을 밝히시는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유를 찾느라 방황하기보다 하나님의 일이 시작될 현장이자 참 빛을 만날 시간으로 재정의해야 할 내 삶의 형편은 무엇입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제 인생의 풀리지 않는 고난과 어두움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기회로 삼으소서.
공동체 _ 서로 아픔에 대해 탓하기보다, 그 속에 채워질 하나님의 능력을 기다리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260222 속회지도자 자료
2026-02-18
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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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넷째 주 그룹큐티나눔
양식을 주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6:1-15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즐겁게 안식할 날(찬송 43장, 구 57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자기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함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생명의 양식이 공급된 은혜의 사건입니다. 유월절 가까운 때에 광야에서 양식을 공급하신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유월절 어린양으로 드림으로써 인류에 영생의 양식을 공급하실 것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먹일 양식이 모자란 상황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시험하십니다(1-7절).
1)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신 시기는 어떤 절기가 가까운 때입니까?(3-4절)
유월절
3절의 ‘산에’(데 에이스 토 오로스)에 정관사 ‘토’가 사용된다. 그래서 직역하면 ‘그 산에, on the mountain’이다. ‘그 산’은 구약의 출애굽 시절 광야에 있는 ‘시내산’을 연상시킨다(참조. 출 19:20). 모세가 여호수아와 함께 시내산에 오르듯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랐다(참조. 출 24:12-13; 마 5:1).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른 때는 ‘유월절 가까운 때’다. ‘유월절’ 또한 출애굽 때에 어린양의 피를 통해 이스라엘 장자의 생명이 보전되는 걸 연상케 한다(참조. 출 12:1-14; 요 6:4, 53-57). 또한 이어질 오병이어 기적은 광야에서 먹은 만나를 연상시킨다(참조. 신 8:3, 16; 요 6:49-51). 이처럼 예수님이 유월절 가까운 때에, 산 위에 오르고, 말씀을 전하며, 오병이어 사건을 일으키신 이유는 출애굽 모티프를 바탕으로 구원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다.
2) 큰 무리가 자기에게 다가오자 예수님은 빌립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5절)
“우리가 어디에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큰 무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세우려는 자들이다(요 6:15). 예수님은 이런 무리에 대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평가하신다(요 6:26). 예수님은 무리의 실제적 필요를 아셨지만 단지 그 필요만을 채우기 위해 표적을 행한 건 아니다. 표적은 예수가 생명의 양식을 나눠 줄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 주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5절에서 예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고 질문한 것은 무리를 먹일 책임을 제자들에게 전가하려는 게 아니라 무리의 ‘생명의 필요’를 진짜 채워 줄 자가 누구인지를 고민하게 하신 것이다.
3) 예수님이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신 말씀에 빌립은 뭐라고 대답합니까?(6-7절)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합니다.”
빌립은 지극히 이성적으로 대답했다. 무리에게 떡을 조금씩 나눠주더라도 200데나리온어치의 떡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200데나리온은 노동자 200일 품삯이다. 절대 적지 않은 액수다. 빌립은 이 많은 돈이 제자 공동체에 없으니, 무리의 ‘생명의 필요’도 책임질 수 없다는 거다. 지극히 평범하고 합리적인 대답이다. 예수님은 빌립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고 물어보신 게 아니라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하셨다. 즉 제자 공동체의 한계 상황에서 어떻게 ‘생명의 필요’를 채울 수 있을지를 도전하신 것이다.
나눔 1 예수님이 “이 큰 무리를 먹일 떡을 어디서 사겠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은 제자들의 믿음을 보시기 위함입니다. 빌립은 지극히 이성적인 대답을 내놓고 현실에 좌절합니다. 내 상식과 인식의 한계를 초월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2.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십니다(8-15절).
1) 안드레가 예수님 앞에 가져온 것은 무엇입니까?(8 -9절)
한 아이에게 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다. 그가 한 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예수께 나아왔다. 안드레가 오병이어를 예수께 드린 건 이것을 사용해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부탁하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터무니없는 도전을 비웃으며 우리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시위하려는 것이다.
2) 예수님은 건네받은 오병이어를 어떻게 하십니까?(10 -11절)
떡과 물고기를 들고 축사하신 후에 오천 명이 되는 무리에게 나눠 주어 먹게 하셨다.
오천 명은 여자와 아이가 계수되지 않은 숫자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먹여야 할 인원은 최소 만 명에서 만 오천 명 규모다. 오병이어는 기껏 5인 가족이 한 끼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작은 양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작은 도시락을 축사하고 오천 명에게 나눠 주신다. 누가 봐도 무모한 시도다. 하지만 주님은 무모해 보이는 일을 서슴지 않고 행하신다. 예수님은 초자연적 이적을 통해 참된 생명의 양식을 나눠 주실 이가 바로 예수 자신임을 보여 주려 하신 거다(요 6:35, 48).
3) 배부르게 먹고 생기가 돈 백성은 어떤 일을 시도합니까?(15절)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
무리는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 받자마자 곧바로 세속적인 본색을 드러낸다. 즉 무리는 예수님을 자기들의 양식의 필요를 채워 줄 도구로 활용하고 싶었다. 그래서 예수를 자신들의 왕으로 세우려 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의 세속적 요구를 뿌리치시고 다시 홀로 산으로 들어가신다. 예수께서 표적을 일으킨 것은 단지 인간의 육체적 필요만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영생을 선물하는 ‘생명의 떡’이라는 걸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끼 식사만을 위해 주님을 찾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주님을 찾는 궁극적 이유는 주님을 통해 하늘 백성이 되어 참된 영생을 누리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나눔 2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천 명을 먹일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라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도움을 구하는 경건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가정, 공동체, 사회의 결핍과 필요는 무엇입니까? 결핍과 필요를 주께 아뢰며 도움을 구합시다.
나눔 3 예수님은 물질적 결핍만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더 큰 영적 결핍인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문제 해결사로만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까? 내가 따르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절대 결핍과 한계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며 주의 긍휼을 구합니다.
공동체 _ 우리 필요를 채우는 일에 주님을 도구로 사용하려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260215 속회지도자 자료
2026-02-11
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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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셋째 주 그룹큐티나눔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5:1-15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목마른 자들아(찬송 526장, 구 316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베데스다’(자비의 집) 연못에서 하늘의 자비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지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38년 된 병자는 자기 힘으로 일어설 수조차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늘의 천사가 내려와 연못물을 동하게 한들 자기 힘으로 그 못에 뛰어들 수 없었습니다. 절망의 땅에서 날마다 희망고문을 당하는 38년 된 병자를 예수님이 말씀으로 고치십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막연히 하늘의 자비를 기다리는 병자들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십니다(1-9절).
1) 베데스다 못가는 어떤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까?(2 -3절)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 등 많은 병자
‘양의 문’은 예루살렘 성 동북쪽에 있었고, 이 양문 옆에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었다. 이 못에서 제물로 바칠 양을 깨끗하게 씻었다(참조. 느 3:1, 32; 12:39). ‘베데스다’는 히브리어 ‘베이트 헤세다’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다. 그 뜻은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다. 행각 다섯은 다섯 개의 기둥으로 된 벽 없는 주랑이다. 이곳에서 병자들은 비나 이슬을 피해 거주했다. 베데스다 못 주변에 모여든 병자들은 시각장애인, 소아마비 환자, 근위축증 환자, 중풍 병자 등 다양했다. 자비의 집에 고통과 탄식 소리가 넘쳐났다.
2) 베데스다 못가에 모인 사람들이 하루 종일 기다리는 것은 무엇입니까?(4절)
천사가 못에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하기를 기다렸다. 바로 그 순간에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이 치료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베데스다 못에 대한 전설이 있었다. 천사가 하늘에서 강림할 때 못의 물이 요동치는데 그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가 치유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환자들은 그 풍문을 믿고 못이 요동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못의 물이 요동칠 기미라도 보이면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경쟁하며 다툰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보며 위로하기보다는 다툼과 경쟁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고 있다. 베데스다 못 주위에 있는 병자들은 은혜와 자비의 집에서 은혜를 기다리기보다는 미신적 풍문을 붙들고 희망 고문을 하고 있었다.
3)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8절)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베데스다 못 주변에 있는 병자 중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 38년 된 병자다. 38년 된 병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나와 있지는 않지만 유추는 할 수 있다. 8절에서 예수께서 치유를 선언할 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하셨다. 즉 38년 된 병자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하반신 장애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데스다 못 주위에 있는 병자들 형편이 다 좋지 않지만, 물이 요동칠 때 자기 힘으로 단 한 걸음도 힘 있게 전진할 수 없는 38년 된 병자에게 ‘자비의 집’은 더욱 가혹한 고통의 집이었다. 그런 소망 없는 자를 예수께서 근원적으로 고치신다. 단지 베데스다 못에 일찍 들어가도록 등을 밀어주는 도움이 아니라 병을 낫게 해 주셨다. 이 환자에게 진정한 하늘의 자비와 은혜가 임했다.
나눔 1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입니다. 하지만 그 자비의 집에 경쟁과 불신, 미신과 희망고문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물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이 자비의 원천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희망을 걸고 있는 잘못된 대상은 무엇입니까? 나는 어떻게 하늘의 은혜를 구합니까?
2.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참된 안식을 선물하십니다(10-15절).
1) 38년 된 병자가 걷게 된 것을 보며 유대인들이 한 말은 무엇입니까?(10절)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예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친 날은 때마침 안식일이었다. 유대인들은 병 고침을 받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사람을 보며 안식일을 범했다며 비판했다. 유대인들은 병 고침을 받은 자를 위로하며 축하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가 율법을 어겼다며 위협하고 정죄했다. 유대인들은 형식적 율법주의에 빠져 율법의 강령인 ‘이웃 사랑’ 정신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친 사건은 어쩌다 우연히 이뤄진 게 아니라 예수께서 의도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은혜의 집에 자비는 없이 고통과 경쟁만 있고, 형식적 율법주의 속에서 사랑이 소멸한 사회에 진짜 안식이 무엇인지 예수께서 가르치려 하신 것이다.
2) 성전에서 다시 만난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이 권면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14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육체의 질병과 죄가 항상 인과 관계가 있는 건 아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다시 이 사람을 만났을 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실 때도 특정 죄를 명시하신 건 아니다. 다만 ‘더 이상 죄짓지 말라’라는 명령이 현재 시제다. 예수께서는 죄와 질병 사이의 연관 관계를 말씀하려 했다기보다는 육적인 장애를 극복했을지라도 영적인 장애인으로 살아갈 가능성을 경고한 것이다.
3) 자기를 낫게 한 분이 예수라는 것을 알게 된 병자는 무슨 일을 합니까?(15절)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가 예수라고 말한다.
38년 된 병자가 치유를 받은 후 안식일을 어겼다며 유대인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비판받는 것을 피하려고 자기를 고쳐 준 사람이 예수라는 사실을 말한다. 헬라어 ‘아낭겔로’는 구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고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 주셨는데 병자는 자기 살겠다고 예수님을 고발한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박해하기 시작한다(16절). 예수님이 38년 동안 병들었던 자에게 더 이상 죄짓지 않도록 경고한 건 이런 상황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은혜를 배역하는 죄를 범했다. 육체의 질병을 고침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인격적으로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
나눔 2 유대인들은 38년 된 병자가 나은 걸 보면서 함께 기뻐하기는커녕 왜 안식일에 짐을 들어 노동을 하냐며 질책합니다. 약자에 대한 자비도, 공감도 없었습니다. 경직된 형식주의는 생명을 경시하고 인격을 무시합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형식주의는 없는지 살펴봅시다.
나눔 3 예수님은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참된 안식을 선물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안식에 합당하게 살지 않으면, 계속 죄에 머물면 일회적 안식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은혜를 받기 이전과 이후의 마음과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미신적인 희망고문의 노예가 아니라 은혜를 소망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소서.
공동체 _ 교회가 고통받는 이웃에게 비판과 혐오가 아닌 포용과 사랑으로 다가가게 하소서.
260208 속회지도자 자료
2026-02-03
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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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둘째 주 그룹큐티나눔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2:1-12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가나의 혼인 잔치(찬송 136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면 단순히 흥이 깨지는 정도가 아니라 잔치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모친의 말에 예수님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며 시큰둥하게 말씀하시지만, 이내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잔치에 다시 생기가 돌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생기를 잃어버린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에 그치지 않는 기쁨을 주러 오셨습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표적을 통해 자신이 그 일을 이루실 것임을 나타내셨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혼인 잔치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포도주가 떨어집니다(1-6절).
1)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알게 된 마리아는 이 사실을 누구에게 먼저 알립니까?(3절)
예수님에게 알린다.
모친 마리아가 예수의 신적 능력을 다 알고 예수님께 포도주 떨어진 사실을 알린 건 아니다. 다만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땅에 온 과정과 목적을 그 누구보다 마리아가 잘 알고 있었기에(참조. 마 1:18-25; 눅 1:30-33), 마리아는 ‘흥’(기쁨)이 깨질 위기의 혼인 잔치를 예수가 다시 살릴 수 있을 거로 생각하고 말했던 거다.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일주일간 지속되는 잔치가 자칫 도중에 중단될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마리아는 모든 사람이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결핍과 절망의 문제를 안고 예수께 나아간 것이다.
2)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리는 어머니에게 예수님이 하신 대답은 무엇입니까?(4절)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여자여’(헬, 귀나이)라는 말은 모친을 무례하게 부르는 게 아니다. 당시 ‘귀나이’는 친한 여성을 부르는 일상적인 호칭이었다. 다만 어머니라고 하지 않고 ‘귀나이’라고 부른 건 예수가 공적 위치에서 하나님 나라 사역을 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참조. 요 19:26).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은 ‘그것이 어머니께나 나에게나 무슨 상관입니까?’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다고 말한다. 요한복음에서 ‘내 때’(헤 호라 무)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시간(7:30; 8:20; 12:27; 13:1), 부활하여 영화롭게 되는 시간을(12:23; 13:31-32; 17:1, 5) 의미한다. 예수님은 가나 혼인 잔치의 표적이 십자가, 부활 사건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적으로 드러내려 한 것이다.
3) 예수님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어떤 지시를 합니까?(5절)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의 다소 무심한 듯한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종들에게 ‘예수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라고 지시한다. 이는 예수께서 필요한 것을 공급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표적은 믿음의 제자도와 깊은 관련 있다. 첫 번째 표적(가나 혼인 잔치)에서는 마리아의 믿음이 강조되어 나타난다. 마리아가 비록 모친이지만 그 역시 예수 앞에서 제자 관계로 소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눔 1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알게 된 마리아는 이 사실을 맨 먼저 예수님께 알립니다. 예수님께 어떤 해결 방안이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해결을 바라며 주께 기도하는 일은 무엇인지 나눠 봅시다.
나눔 2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심한 듯한 말씀에 실망하지 않고 하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를 들으실 하나님을 믿고 행동합니다. 기도하는 것 자체로 내게 변화가 생긴 적이 있습니까?
2.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혼인 잔치에 다시 생기가 돕니다(7-12절).
1) 예수님이 하인에게 내리신 명령은 무엇입니까?(7- 8절)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그리고 그것을 연회장에게 갖다 주어라.”
6절의 ‘통’(메트레테스)은 약 40리터 정도의 양을 말한다. 그러므로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가 6개 있다는 것은 총 500리터 정도의 물을 담을 수 있다는 말이다. 원래 이 돌항아리는 정결 예식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흙으로 만든 질그릇은 부정해질 수 있다고 보았다(참조. 레 11:33). 그래서 돌항아리를 정결 예식 통으로 사용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 돌항아리 여섯에 500리터나 되는 물을 부으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그 물을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한다. 참으로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들이다. 하지만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다. 순종이 생명의 역사를 창출한다.
2) 연회장은 하인이 가져온 포도주를 맛보고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9-10절)
이 집은 처음보다 나중에 더 좋은 포도주를 내놓는다며 (물에서 바뀐) 포도주 맛에 감탄했다.
하인이 가져온 것은 맹물이 아니라 진한 포도주였다. 그것도 최상급 포도주였다. 연회장은 감탄하면서 신랑을 불러 칭찬한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은 물리적 변화가 아니라 화학적 변화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초자연적 기적이다. 예수께서 이 표적을 통해 자신은 율법보다 훨씬 더 큰 존재라는 걸 보이신 것이다. 예수는 이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생명의 표적을 행할 것이다.
3) 가나 혼인 잔치에서 첫 표적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11절)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다.
요한복음에 총 여섯 번의 표적이 나온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표적(요 2:1-11), 왕의 신하 아들을 고친 표적(4:46-54), 38년 된 병자를 고친 표적(5:1-9), 오병이어 표적(6:1-21), 맹인을 치유하는 표적(9:1-7),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표적(11:1-44). 이 표적들이 공통으로 지향하는 바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와서 사람들에게 생명과 안식을 선물한다는 거다.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이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다.
나눔 3 포도주가 떨어져 잔치가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예수님은 하나님이 흙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을 창조하시듯 죽어 가는 잔치에 생기를 불어넣으십니다. 예수님이 내 삶에 불어넣으신 생기, 안겨 주신 기쁨은 무엇입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주님을 철저히 신뢰하며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생명의 기적을 날마다 맛보게 하소서.
공동체 _ 죄와 사망의 그림자 아래 신음하는 이 땅에 참된 생명과 안식을 공급하여 주소서.
260201 속회지도자 자료
2026-01-28
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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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첫째 주 그룹큐티나눔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
창세기 21:1-21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찬송 95장, 구 82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아브라함 부부는 아들을 주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실재가 되자 행복한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이삭의 탄생으로 아브라함과 사라가 웃고 있는 동안,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는 비탄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이들까지 긍휼로 돌보시면서 위로와 소망을 주십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 가정에 기쁨의 아들이 태어납니다(1-7절).
1) 아브라함이 백 세에 아들을 낳고 행한 일은 무엇입니까?(3-4절)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짓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시행했다.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 이름을 ‘이삭’이라 하고,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시행한 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순종했기 때문이다(참조. 창 17:10-12, 19).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몸을 통해 아들을 낳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처음에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속으로 웃었다(히, 이츠하크, ‘그가 웃다’ 창 17:17). 아브라함 나이 100세, 그의 아내 나이 90세에 자녀를 낳는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로 그때 아브라함에게 장차 낳을 아들 이름을 ‘이삭’(히, 이츠하크, 웃음)이라 하라고 명하신다(창 17:19). 그리고 이 일 후 다시 아브라함 부부에게 하나님의 사자 세 명이 나타나서 아들을 낳을 거라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그때도 사라는 사자들의 말을 비웃었다(창 18:12-15). 아브라함 부부 모두 노년에 아들을 낳을 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비웃고 있을 때 ‘비웃음’을 진정한 ‘웃음’(행복, 기쁨)으로 바꿀 준비를 하고 계셨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실제로 아들을 낳은 후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깨닫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아들 이름을 이삭으로 지었다.
2) 태어난 아들을 보며 사라는 어떤 말로 기쁜 마음을 표현합니까?(6절)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셨으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을 것이다.”
처음에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허황한 말로 치부하며 비웃었다(창 18:12-13). 하지만 그의 나이 90세에 실제로 아들을 낳고 보니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셨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그리고 이웃과 기쁨을 나누면서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주신 ‘행복’(기쁨, 웃음, ‘이삭’) 바이러스가 사라 가정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확산되고 있다.
나눔 1 사라는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은 적이 있습니다(창 18:12-13). 하지만 실제로 아들을 낳자 사라는 행복한 웃음을 터뜨립니다. 하나님이 ‘비웃음’을 ‘웃음’(이삭)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 어떤 기쁨을 주고 계시는지 나눠 봅시다.
2. 하나님은 광야로 내쫓긴 하갈과 이스마엘까지 돌보십니다(8-21절).
1) 이삭이 태어난 이후 아브라함 가정에 발생한 예기치 못한 문제는 무엇입니까?(8-10절)
하갈의 아들이 어린 이삭을 놀리고 이에 사라가 분노한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86세에 낳았고(창 16:16), 이삭을 100세에 낳았다(21:5). 그렇다면 이삭이 태어날 때 이스마엘은 약 14세였을 것이며, 이삭이 젖 뗄 때의 이스마엘 나이는 17세 정도로 추정된다. 17세 청소년이 3살 갓난아이를 놀리면서 웃고 있다(9절, 메차하크). 하나님께서 힘겹게 아브라함 부부의 비웃음을 ‘웃음’(기쁨)으로 바꿔 놨는데, 이스마엘이 다시 폭력적 ‘조소’로 만들어 버렸다. 이에 사라는 이성을 잃고 분노한 것이다. 웃음이 화로 변한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 가정의 이런 비극은 아브라함 부부가 애초에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여종 하갈을 통해 자녀를 생산하려 할 때부터 배태된 것이다(참조. 창 16:2).
2) 하갈이 광야에서 목 놓아 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4-16절)
광야에서 물을 먹지 못해 죽어 가는 아들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의 태어남을 통해 웃고 있지만, 광야로 쫓겨난 하갈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탄식에 빠진다. 이런 비극은 아브라함 부부의 불신에서 초래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갈의 비통한 울부짖음을 함부로 비정하게 정죄할 수 없다. 하갈은 자신이 죽는 건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17세 된 청소년 아들이 물을 먹지 못해 메말라 죽어 가는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없었다. 그래서 통곡할 뿐이었다. 이런 비극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에서 초래된 것이다.
3) 하갈의 울음소리를 들은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17-19절)
하갈에게 이스마엘이 장차 커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 말씀하시고, 하갈의 눈을 열어 샘물을 보게 하여 그 물을 아들에게 먹이게 하셨다.
비록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으로 인해 초래된 일이긴 하지만,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 모녀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광야에 버려진 모자의 탄식을 들으시고, 하갈에게 사자를 보내 말씀하신다.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밝혀 샘물을 발견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소망을 주시고, 샘물로 육체의 갈증을 해결해 주신다. 하나님은 비탄에 빠져 있는 하갈과 이스마엘 가정에도 영육 간에 웃음을 회복해 주신다.
나눔 2 기쁨 가득하던 아브라함 가정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브라함 부부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으려고 시도할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불순종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무엇이 있는지 나눠 봅시다.
나눔 3 하나님은 광야로 내쫓긴 하갈 모자까지도 섬세하게 돌보십니다. 좌절하고 있는 하갈에게 소망을 말씀하시고, 기력이 없어 좌우분간을 못하는 하갈의 눈을 열어 샘물을 보게 하십니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위로와 돌봄을 이야기해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웃을 일이 없는 삶에서도 오직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하소서.
공동체 _ 실의와 절망에 빠진 교회가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으로 일어서게 하소서.
260125 속회지도자 자료
2026-01-21
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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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넷째 주 그룹큐티나눔
기다리다 지쳤을 때
창세기 15:1-21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주 믿는 사람 일어나(찬송 357장, 구 397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인간의 약속은 변하는 상황 앞에 쉽게 무너집니다. 그러나 반석과도 같은 하나님의 약속은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이 역사가 되어 성취된 것이 그 증거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언젠가 잘 되겠지’ 하는 막연한 낙관과 다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명예를 걸고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데서 오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하나님이 아브람의 불평을 바꾸십니다(1-6절).
1) 아브람이 솔직하게 털어놓은 불평은 무엇입니까? (3절)
하나님이 씨(자녀)를 주지 않으셨기에 집에서 기른 자(종)를 상속자로 삼겠다고 불평했다.
아브람의 불평은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라는 탄식에 집약되어 있다. 그는 이미 자손에 대한 약속(창 13:16)을 받았고 막대한 재산(창 13:6)까지 소유했지만, 정작 그 모든 것을 이어받을 ‘씨’(자녀)가 없는 현실에 절망했다. 따라서 집에서 기른 종(엘리에셀)이 자신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과 자신의 현실 사이의 괴리감 속에서 터져 나온 그의 솔직한 불평이다.
2) 하나님이 아브람을 밖으로 데려가셔서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5절)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장막 안에 머물며 “씨가 없다”고 불평하는 아브람을 밖으로 이끄셨다. 이는 아브람의 시선을 자신의 절망적인 현실(어두운 장막)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약속(밤하늘의 뭇별)으로 옮기게 하시려는 행동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티끌’(13:16)이라는 이전의 약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변한 것이 없음을, 셀 수 없는 별들을 통해 시각적으로 다시 한번 확증해 주셨다.
3)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람은 어떻게 반응합니까?(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
‘여호와를 믿었다’는 아브람의 반응은, 조금 전에 ‘씨를 주지 않으셨다’고 불평했던 그의 흔들리던 마음이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돌아섰음을 보여 준다. 비록 자신의 현실(자녀 없음)에 비추어 볼 때 뭇별과 같은 자손은 비현실적이고 납득하기 어려운 약속이었지만, 아브람은 그 약속을 하신 하나님 자체를 신뢰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바로 이 ‘믿음’을 아브람의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고 기록한다.
나눔 1 하나님은 자식 없는 자신의 텅 빈 장막을 바라보는 아브람을 밖으로 이끌어 밤하늘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순간 아브람의 불평은 경이로움으로, 의심은 믿음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의심’이 ‘하나님을 향한 경이와 믿음’으로 바뀐 일을 이야기해 봅시다.
2. 하나님이 아브람에 대한 약속을 확증하십니다(7- 21절).
1) 하나님이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신 목적은 무엇입니까?(7절)
이(가나안) 땅을 아브람에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임을 상기시키시며, 그 목적이 처음부터 “이 땅을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는 것”이었음을 분명히 하신다. 이는 ‘씨’(자손)가 없다는 한 가지 문제(3절)에 함몰되어 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계획이 자손뿐 아니라 이 광대한 ‘땅’에까지 미쳐 있음을 일깨우시는 것이다. 따라서 아들은 물론 땅의 약속까지 이루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할 이유를 분명히 하신다.
2) 하나님이 약속을 확증하기 위하여 아브람에게 명령하신 것은 무엇입니까?(9-10절)
3년 된 암소와 숫양,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반으로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짐승들을 쪼개어 마주 보게 하신 방식은, 레위기의 제사법과는 구별되는 고대 근동의 엄숙한 계약 체결 문화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에는 계약 당사자들이 짐승을 반으로 쪼개고 그 사이를 함께 지나감으로써 언약을 확증했다. 이 행위에는 ‘만약 이 계약을 어긴다면, 이 쪼개진 짐승처럼 될 것이다’라는 생명을 건 맹세가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엄중한 당대의 방식을 통해 당신의 약속을 공식적으로 확증하신 것이다.
3) 아브람이 잠든 밤에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간 것은 무엇입니까?(17절)
연기 나는 화로, 타는 횃불
아브람이 낮 동안 짐승들을 지키며 기다렸지만, 밤이 되어 깊은 잠에 빠진 것은 그의 인간적인 한계를 상징한다. 아브람이 약속 이행에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는 그 무력한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연기 나는 화로와 타는 횃불”의 모습으로 나타나 홀로 계약 의식을 완성하셨다. 이는 아브람의 믿음에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성취 또한 아브람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이루시겠다는 것을 강력하게 보증하신 행위다.
나눔 2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오늘 내 손안에’ 쥐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생애를 훌쩍 넘어, 먼 역사의 지평선 너머에 있었습니다. ‘당장의 현실을 보는 아브람의 눈’과 ‘영원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눈’은 이렇게나 다릅니다. 나의 짧은 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신뢰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나눠 봅시다.
나눔 3 고대 사람들은 계약을 체결할 때 쪼갠 짐승 사이를 함께 걸었습니다. 둘 중 누구든 계약을 어기면 짐승처럼 쪼개질 것을 맹세하는 의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실 때 횃불의 형상으로 홀로 짐승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언약의 모든 책임을 하나님이 혼자 지실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언약의 복을 주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이야기해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내 안에 의심과 불안이 커질 때, 아브람이 봤던 밤하늘을 보게 하소서.
공동체 _ 우리 성취에 대한 자랑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에 대한 찬양이 가득한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60118 속회지도자 자료
2026-01-14
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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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셋째 주 그룹큐티나눔
구름에 감춰진 무지개 언약
창세기 9:1-17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찬송 545장, 구 344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1914년 크리스마스이브, 인류 최악의 전쟁터 한가운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독일군 참호에서 울려 퍼진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노래에 영국군이 캐럴로 화답한 것입니다. 총성이 멎고 노래가 흐르던 그 짧은 순간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폐허 위에 작은 평화의 꽃이 피어난 시간이었습니다. 절망의 먹구름 사이로 찬란한 무지개가 비추듯, 가장 어두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이야기가 드러납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자녀에게 복을 주십니다(1-7절).
1) 하나님이 노아와 자녀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1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축복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첫 사람 아담에게 주셨던 창조의 복(창 1:28)과 정확히 일치한다. 홍수라는 대심판 이후,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자녀들에게 이 똑같은 축복을 다시 선언하신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인류의 완전한 멸절이 아닌,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시려는 재창조의 의지임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2) 하나님이 피 흘리는 것(살인)을 엄격히 금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6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라고 하며 살인을 엄격히 금지하신 이유는, 명시된 대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귀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것은 단순히 한 개인을 넘어 그 사람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을 직접 파괴하고 모독하는 심각한 범죄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살인을 엄격히 금하시는 이유다.
나눔 1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시면서 동시에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사람을 해치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번성’은 ‘상호존중’, ‘상생’, ‘공존’이 전제된 더 깊은 차원의 번성입니다. 하나님이 뜻하신 ‘생육, 번성, 충만’의 명령을 어떻게 이행해야 할지 이야기해 봅시다.
2. 하나님이 무지개 언약을 세우십니다(8-17절).
1) 하나님은 누구와 언약을 맺으십니까?(8-10절)
노아와 그의 아들들, 그들의 후손, 그들과 함께 한 모든 생물
하나님께서는 홍수 이전에(창 6:18) 약속하셨던 언약을 이제 노아와 그 후손들, 그리고 “함께 한 모든 생물”과 공식적으로 세우신다. 이 언약의 가장 큰 특징은 그 대상이 인간을 넘어 모든 피조물까지 포함한다는 점이다. 이는 홍수 심판이 인간의 죄악에서 비롯되었으나 그 영향이 모든 생명체에 미쳤던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의 약속 또한 모든 피조세계에 미침을 분명히 보여 준다.
2)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11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을 것이다.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의 핵심은 ‘보존의 약속’이다.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고 “땅을 멸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신다. 이는 8:21에서 노아의 제사를 받으시고 이미 결심하셨던 바(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를, 이제 모든 생명체를 대상으로 하는 공식적인 약속으로 확증하신 것이다.
3) 하나님이 언약의 증거로 두신 것은 무엇입니까?(13-17절)
무지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보증하기 위해 스스로 ‘무지개’라는 증거를 제시하신다. 하나님은 이전 심판의 비를 내렸던 ‘구름’ 속에 이 무지개를 두심으로써, 사람들이 비가 그친 뒤 무지개를 볼 때마다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도록 하신다. 또한 이 무지개는 하나님도 그 약속을 기억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나눔 2 하나님은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증표로 구름 사이에 찬란한 무지개를 걸어 두셨습니다. 무지개는 인간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온 세계에 중단 없이 제공된다는 보증입니다. 세상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나눔 3 하나님의 무지개 약속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름 모를 들풀 한 포기, 작은 새 한 마리의 생명까지도 끌어안으시는 전 지구적인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가 서로 존중해야 하듯, 하나님의 사랑이 깃든 모든 피조물을 소중히 여기는 것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어떻게 실천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제 삶에 먹구름이 몰려올 때 절망하기보다 그 속에 숨겨진 주님의 언약을 발견하게 하소서.
공동체 _ 우리 공동체가 분열과 위기로 신음하는 사회 속에서 화해와 평화를 보여 주는 역할을 감당하게 하소서.
260111 속회지도자 자료
2026-01-07
신내교회
260111 속회지도자 자료.pdf
1월 둘째 주 그룹큐티나눔
포악함의 바다에서 세운 언약
창세기 6:1-22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찬송 345장, 구 461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20세기 초 독일이 나치즘이라는 포악에 잠겨 갈 때 대부분의 양심은 침묵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암흑 속에서도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처럼 시대의 죄악에 맞서 불꽃처럼 저항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성경 속 노아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모든 이가 세상의 탁류에 휩쓸려 갈 때, 그는 홀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구원의 방주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온몸으로 시대의 불의에 저항한 노아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한탄하십니다(1- 8절).
1) 하나님이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2-3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 것’에서 확인되듯이 사람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본문(6:1-8)은 사람의 죄악이 가득함을 보여 주며, 그 원인을 ‘하나님의 아들들’의 선택에서 찾는다.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1) 천사적 존재, 2) 고대 통치자, 3) 경건한 사람들(셋의 후손)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고대에는 영적 존재가 인간과 결합하여 타락했다는 첫 번째 견해가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들이 누구든 간에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렸던 존재들이 거룩함을 상실하고 오직 ‘육신’의 아름다움만을 좇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그분의 영이 거할 수 없는 전적인 ‘육신’의 상태가 된 것을 보시고 그들을 떠나기로 결정하셨다.
2) 하나님이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5절)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의 기대와 달리, 인간의 현실은 완전히 어긋나 있었다. 비록 당대에 명성을 떨친 용사들(6:4)이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이 주목하신 것은 그들의 업적이 아닌 마음(내면)의 상태였다. 하나님이 보신 것은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인, 회복 불가능해 보이는 전적인 타락이었다. 이처럼 선한 구석을 찾을 수 없는 인간의 총체적인 부패가, 하나님께서 창조 자체를 한탄하시고 고통스러워하신 이유다.
나눔 1 선하게 지으신 세상이 악에 잠식당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한탄하셨습니다. 진노하기보다 먼저 슬퍼하고 아파하셨습니다. 창조의 목적을 잃어버린 세상의 모습, 하나님이 한탄하실 세상의 형편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2. 하나님이 포악의 땅에서 노아의 생명을 보존하십니다(9-22절).
1) 하나님 보시기에 노아는 어떤 사람입니까?(9절)
의인이고, 당대에 완전한 자이고,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다.
창세기 6장이 묘사하는 당대의 총체적인 타락 속에서, 노아는 하나님께 “의인”이자 “완전한 자”로 인정받았다. 이 평가는 그가 흠 없는 존재였다기보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려 애썼음을 의미한다. 세상은 힘센 ‘용사’(6:4)들을 주목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한 사람은 오직 노아였다.
2) 하나님은 노아에게 그의 가족과 모든 생물을 살리도록 무엇을 만들라 명령하십니까?(14절)
방주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자 하나님은 한탄하시며 심판(홍수)을 결심하셨다. 그러나 이 타락한 세대 속에서도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였던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모든 생물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방주’를 만들도록 명령하셨다. 이 방주는 임박한 멸절 속에서 생명을 이어 가는 유일한 수단이자, 심판 후 새로운 시작을 위한 보존의 도구였다.
3) 하나님은 노아와 무엇을 세우셨습니까?(18절)
언약을 세우셨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선언하시는 동시에, 노아에게는 방주를 만들라 명하시며 그와 “언약”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신다. 비록 무지개 언약과 같은 구체적인 내용은 홍수 이후(창 9장)에 주어지지만, 이 언약(18절)은 심판 속에서 반드시 너를 구별하여 살리겠다는 보존의 약속이다. 방주를 만들라는 명령 자체가 이미 노아와 그의 가족을 언약 관계 안으로 부르셨다는 증거며, 이 약속은 노아 개인을 넘어 그를 통해 이어질 새로운 인류를 향한 은혜의 시작점이 된다.
나눔 2 포악함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았습니다.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빛의 자녀인 우리 삶은 달라야 합니다. 세상의 탁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매일 붙잡고 있는 거룩한 습관을 이야기해 봅시다.
나눔 3 가망 없어 보이는 세상에 여전히 희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노아와 언약을 맺어 새 창조를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둘러싼 절망적인 상황과 그 속에서도 내게 희망을 주는 하나님의 약속(말씀)은 무엇인지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죄악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의롭게 살게 하소서.
공동체 _ 우리 공동체가 포악함으로 물결치는 세상에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주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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