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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4 속회지도자 자료
2026-05-20 16:05:06
신내교회
조회수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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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넷째 주 그룹큐티나눔

 

하나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창세기 45:1-15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나의 갈 길 다 가도록(찬송 384, 434)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200610, 평화롭던 아미쉬 마을 학교에 한 괴한이 침입해 총기를 난사했습니다. 범인은 아무 원한도 없는 소녀 5명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곧장 범인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복수가 아니라, 두려움에 떨고 있을 범인의 아내와 아이들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당신들 역시 우리처럼 소중한 가족을 잃은 피해자일 뿐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마침내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1-8).

1) 요셉이 정체를 드러낸 순간 형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3)

놀라서 대답하지 못했다.

야곱의 아들들은 흉년으로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왔다가 정탐꾼으로 몰리는 등 큰 곤경에 처한다. 시므온이 인질로 잡히고 막내 베냐민까지 은잔 사건에 휘말리자, 형제들은 아버지를 위해 베냐민을 살려달라며 간곡히 애원한다. 이 진심 어린 호소에 감정이 격해진 요셉은 마침내 자신이 요셉임을 밝힌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생이 대제국의 총리가 되어 눈앞에 서 있는 현실에 형들은 충격으로 얼어붙는다. 과거 자신들이 은 이십 세겔에 팔아넘겼던 요셉이 자신들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은 형들의 상상을 완전히 초월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극심한 당혹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서 있을 뿐이다. 이 정적은 인간의 악행을 선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2) 요셉은 누가 자신을 애굽으로 보냈다고 고백합니까? (5, 7-8)

하나님

요셉은 경악하여 아무 말도 못 하는 형제들에게 사건의 내막을 차분히 설명한다. 그는 자신을 판 일로 자책하거나 괴로워하지 말라며 형들을 안심시키고, 이 모든 과정이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이었음을 강조한다. 노예 생활과 억울한 옥살이를 거친 13년의 세월은 요셉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시련의 주체를 형들이나 보디발의 아내가 아닌 하나님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과의 약속을 잊었을 때조차 원망 대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지혜를 배운 것이다. 아들 므낫세를 낳으며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되었기에, 형제들을 향한 그의 고백은 이제 원망 없는 진실이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악행조차 선한 결과로 바꾸어 놓으신다. 요셉의 영성이 고난을 통해 성숙해졌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가문의 극적인 재회와 화해를 허락하셨다.

 

나눔 1 누군가 나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사람이 밉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그 아픈 일조차 나를 훈련하시고 다른 누군가를 돕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2. 요셉은 형제들의 가족을 초청합니다(9-15).

1) 요셉은 가족에게 무엇을 약속합니까?(11)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아직 다섯 해나 남은 극심한 흉년을 언급하며 애굽으로 이주할 것을 권유한다. 이 제안은 단순히 거처를 옮기는 차원을 넘어, 온 가족의 생계를 자신이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강력한 약속이다. 여기서 요셉이 언급한 보호의 대상에는 자신을 상인에게 팔아넘겼던 형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요셉의 파격적인 호의 앞에 형들은 본능적인 의심과 어리둥절함을 느꼈을 것이다. ‘나중에 우리를 보복하려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이나 앞으로의 흉년에 대한 불신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형제들이 요셉의 진심을 믿지 못하는 것은 요셉의 태도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지금까지 아버지를 속이며 거짓되게 살아온 방식이 타인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누군가를 신뢰하지 못하는 형제들의 불안은, 그들 스스로가 정직하지 못한 삶을 살아왔음을 보여 주는 내면의 투영이다.

 

2) 요셉은 자신의 약속을 믿을 수 있도록 형들에게 무슨 말을 덧붙입니까?(12)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요셉이 내 입이 직접 말하고 있음을 강조한 것은 두 가지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언어적 확신이다. 요셉은 그동안 통역관을 사이에 두고 형들과 대화했으나(42:23), 모든 시종을 물러나게 한 뒤(45:1) 그들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로 직접 말을 건넸다. 이집트 최고의 권력자가 자신들의 언어로 소통하는 것을 직접 보고 듣는 순간, 형들은 그가 진짜 요셉임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둘째는 관계의 진실성이다. 요셉은 이제 통치자로서의 가면을 벗고 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려 한다. 그동안 아버지를 속이며 거짓에 익숙한 삶을 살았던 형제들에게 요셉은 자신의 말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정직함을 호소한다. , “내 입이 말한다는 선언은 지금 형들이 듣고 있는 이 파격적인 약속이 어떠한 정치적 계산이나 속임수도 없는 요셉 자신의 인격에서 나온 진실임을 증명하려는 강력한 다짐이라 할 수 있다.

 

3) 형들이 비로소 요셉과 대화하기 시작한 때는 언제입니까?(15)

요셉이 형들과 입 맞추며 안고 울었을 때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던 형들이 요셉과 대화를 시작한 것은, 요셉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가족 부양에 대한 진심을 전하며 설득한 이후다. 요셉은 형들을 안심시킨 뒤 한 사람씩 입을 맞추며 안고 울었다. 이때의 입맞춤은 단순한 형식적 인사가 아니라, 오랜 세월 억눌려 있던 죄책감과 원망을 녹여 내고 새로운 관계를 열어 가는 화해의 징표다. 이는 어긋나고 삐뚤어졌던 형제들의 마음을 회복시키는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형들은 이 뜨거운 눈물과 포옹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들처럼 누군가를 속이는 것은 아니며 진실한 용서가 실제로 존재함을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서로의 입맞춤으로 얼어붙었던 형들의 입이 열리고 진정한 소통이 시작되었다.

 

나눔 2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은 흉년 동안 그들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절연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처럼 그의 형편을 살피거나 진심으로 잘되기를 바란 적이 있습니까?

 

나눔 3 두려움에 떨던 형들은 요셉이 먼저 다가갔을 때 비로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오해나 갈등으로 오랜 기간 침묵하던 관계가 누군가 먼저 건넨 사과나 진심 어린 행동으로 풀린 경험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_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는 지혜를 주소서.

공동체 _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안고 거짓 없는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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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1 속회지도자 자료 2026-05-27 신내교회 260531 속회지도자 자료.pdf 5월 다섯째 주 그룹큐티나눔 아버지의 마지막 노래 창세기 49:16-28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복의 근원 강림하사(찬송 28장, 구 28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유리마다 빛깔과 모양이 제각각이지만, 한데 모으면 경이로운 작품이 탄생합니다. 오래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꼭 그렇습니다. 멀리서는 하나의 성스러운 그림이나, 가까이서 보면 서로 다른 조각이 복잡하게 이어져 있을 뿐입니다. 야곱은 이처럼 제각각 다른 아들들의 삶을 두고 노래합니다. 단순한 과거의 회상을 넘어, 그들의 미래에 하나님의 빛이 통과할 때 어떤 영광이 드러날지를 미리 보여 주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야곱이 자녀들을 축복합니다(16-21절). 1) 야곱은 심판자가 될 ‘단’을 무엇과 같다고 합니까?(17절) 길섶의 뱀, 샛길의 독사 야곱은 이름의 발음이 유사한 ‘단’과 ‘심판’(딘)을 연결하여 언어유희로 노래한다. 야곱은 단을 길섶에 숨은 뱀이나 샛길의 독사에 비유하는데, 이는 단 지파가 압도적인 규모의 군사력은 아닐지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적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는 기습적 용맹함과 지략을 가졌음을 뜻한다. 말의 뒷굽을 물어 기마병을 거꾸러뜨리는 독사의 모습은 훗날 단 지파 출신인 삼손이 보여 준 놀라운 힘을 연상시킨다. 똬리를 틀고 기회를 엿보다 적을 무너뜨리는 단 지파의 기질은 작지만 결코 얕볼 수 없는 날카로운 공격성과 통찰력을 상징한다. 2) ‘갓’은 적들에게 쫓길 때 도리어 어떻게 합니까?(19절) 도리어 그(군대) 뒤를 추격할 것이다. 갓 지파에 대한 야곱의 예언은 훗날 이들이 처하게 될 지정학적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갓 지파는 요단 동편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아 일찍 정착했으나, 지리적 특성상 암몬이나 모압 같은 이방 민족의 끊임없는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전쟁이 일상이 된 환경 속에서 때로는 적의 공격에 밀리거나 후퇴해야 하는 고달픈 상황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야곱은 갓이 단순히 쫓기는 자로 남지 않을 것임을 선포한다.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할 것이라”는 외침은 위기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전세를 역전시켜 끝내 승리하는 갓 지파의 강인한 용맹함과 회복력을 상징한다. 이는 고난에 함몰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적의 배후를 치는 반격의 역사를 예고하는 축복이다. 나눔 1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큰 문제(사람, 환경, 내면의 약점 등) 앞에서, 단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길을 찾아내거나, 혹은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끝까지 견뎌내어 결국 승리한 경험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2. 야곱은 아들마다 알맞은 복을 빕니다(22-28절). 1) 야곱은 요셉을 무엇에 비유합니까?(22절) 샘 곁의 무성한 가지 야곱은 유다와 더불어 요셉을 축복의 핵심 인물로 비중 있게 다룬다. 흉년의 위기 속에서 온 가족을 보호한 요셉의 공로를 생각하면 이러한 강조는 지극히 당연하다. 요셉이 샘 곁에 뿌리를 두고 그 가지가 담을 넘을 정도로 번영할 것이라는 예언은, 훗날 북이스라엘의 주역이 될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거대한 성장을 암시한다. 또한 이 노래는 요셉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의 굴곡을 그대로 투영한다. 인생의 도처에서 나타난 대적들이 그를 향해 증오의 활을 쏘아 대며 학대했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고 견고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팔에 힘을 주시고 늘 동행하셨기 때문이다. 창세기 39장과 41장이 거듭 강조하듯, 요셉이 거둔 승리와 무성함은 끊이지 않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그 존재의 뿌리를 깊이 박은 결과다. 2) 요셉의 팔이 힘을 얻은 비결은 무엇입니까?(24절)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하나님)의 손을 힘입기 때문이다. 야곱은 요셉의 팔이 그 어떤 학대와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비결이 바로 하나님의 손을 힘입었기 때문이라고 선포한다. 요셉의 인생 행로를 보면 수많은 대적자가 그를 향해 활을 쏘며 괴롭혔지만, 정작 그의 활은 더욱 견고해졌고 팔은 힘을 얻었다. 이는 요셉 개인의 뛰어남보다 ‘야곱의 전능자’이자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하나님의 권능이 그를 붙들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성경의 서사 속에서 하나님의 손은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요셉이 처한 모든 위기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셨다’는 말로 묘사된다. 아무리 세상의 대적자가 강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이길 존재는 없다. 결국 야곱은 요셉을 향해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 곧 ‘하나님의 전능하신 보호와 중단 없는 동행’을 노래하고 있다. 3) 야곱은 무엇을 바탕으로 복을 빌었습니까?(28절)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했다. 야곱이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했다는 표현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각 자녀가 살아온 삶의 궤적과 그들의 고유한 성품, 그리고 앞으로 그들이 형성할 지파가 마주하게 될 구체적인 현실을 깊이 통찰한 결과다. 야곱은 아버지로서 자녀들의 장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감당해야 할 고유한 사명에 맞추어 예언적 격려를 전한 것이다. 결국 이 축복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허락하신 은사의 분량과 그릇의 크기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선의 삶을 일구어 가도록 응원하는 사랑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어떤 예언은 그들의 허물을 지적하며 엄중하게 들릴지라도, 그 바탕에는 자손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바르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 나눔 2 요셉은 모진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을 꼭 붙잡고 어떤 역경도 뛰어넘는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높은 담장과 같은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넘기 위해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면 이야기해 봅시다. 나눔 3 야곱의 아들들은 각기 다른 축복을 받았지만, 그 복들은 모두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세우는 데 꼭 필요한 조각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활용해 구체적으로 실천해 보고 싶은 ‘나다운 섬김’이 있다면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내 모습 그대로 주께 뿌리를 내리게 해 주소서. 공동체 _ 각자 고유한 빛깔로 하나 되어 주님의 영광을 가득 채우는 교회 되게 하소서. 260524 속회지도자 자료 2026-05-20 신내교회 260524 속회지도자 자료.pdf 5월 넷째 주 그룹큐티나눔 하나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창세기 45:1-15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나의 갈 길 다 가도록(찬송 384장, 구 434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2006년 10월, 평화롭던 아미쉬 마을 학교에 한 괴한이 침입해 총기를 난사했습니다. 범인은 아무 원한도 없는 소녀 5명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곧장 범인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복수가 아니라, 두려움에 떨고 있을 범인의 아내와 아이들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당신들 역시 우리처럼 소중한 가족을 잃은 피해자일 뿐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마침내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1-8절). 1) 요셉이 정체를 드러낸 순간 형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3절) 놀라서 대답하지 못했다. 야곱의 아들들은 흉년으로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왔다가 정탐꾼으로 몰리는 등 큰 곤경에 처한다. 시므온이 인질로 잡히고 막내 베냐민까지 은잔 사건에 휘말리자, 형제들은 아버지를 위해 베냐민을 살려달라며 간곡히 애원한다. 이 진심 어린 호소에 감정이 격해진 요셉은 마침내 자신이 요셉임을 밝힌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생이 대제국의 총리가 되어 눈앞에 서 있는 현실에 형들은 충격으로 얼어붙는다. 과거 자신들이 은 이십 세겔에 팔아넘겼던 요셉이 자신들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은 형들의 상상을 완전히 초월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극심한 당혹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서 있을 뿐이다. 이 정적은 인간의 악행을 선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2) 요셉은 누가 자신을 애굽으로 보냈다고 고백합니까? (5, 7-8절) 하나님 요셉은 경악하여 아무 말도 못 하는 형제들에게 사건의 내막을 차분히 설명한다. 그는 자신을 판 일로 자책하거나 괴로워하지 말라며 형들을 안심시키고, 이 모든 과정이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이었음을 강조한다. 노예 생활과 억울한 옥살이를 거친 13년의 세월은 요셉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시련의 주체를 ‘형들’이나 ‘보디발의 아내’가 아닌 ‘하나님’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과의 약속을 잊었을 때조차 원망 대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지혜를 배운 것이다. 아들 므낫세를 낳으며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되었기에, 형제들을 향한 그의 고백은 이제 원망 없는 진실이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악행조차 선한 결과로 바꾸어 놓으신다. 요셉의 영성이 고난을 통해 성숙해졌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가문의 극적인 재회와 화해를 허락하셨다. 나눔 1 누군가 나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사람이 밉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그 아픈 일조차 나를 훈련하시고 다른 누군가를 돕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2. 요셉은 형제들의 가족을 초청합니다(9-15절). 1) 요셉은 가족에게 무엇을 약속합니까?(11절)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아직 다섯 해나 남은 극심한 흉년을 언급하며 애굽으로 이주할 것을 권유한다. 이 제안은 단순히 거처를 옮기는 차원을 넘어, 온 가족의 생계를 자신이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강력한 약속이다. 여기서 요셉이 언급한 보호의 대상에는 자신을 상인에게 팔아넘겼던 형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요셉의 파격적인 호의 앞에 형들은 본능적인 의심과 어리둥절함을 느꼈을 것이다. ‘나중에 우리를 보복하려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이나 앞으로의 흉년에 대한 불신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형제들이 요셉의 진심을 믿지 못하는 것은 요셉의 태도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지금까지 아버지를 속이며 거짓되게 살아온 방식이 타인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누군가를 신뢰하지 못하는 형제들의 불안은, 그들 스스로가 정직하지 못한 삶을 살아왔음을 보여 주는 내면의 투영이다. 2) 요셉은 자신의 약속을 믿을 수 있도록 형들에게 무슨 말을 덧붙입니까?(12절)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요셉이 ‘내 입’이 직접 말하고 있음을 강조한 것은 두 가지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언어적 확신이다. 요셉은 그동안 통역관을 사이에 두고 형들과 대화했으나(창 42:23), 모든 시종을 물러나게 한 뒤(45:1) 그들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로 직접 말을 건넸다. 이집트 최고의 권력자가 자신들의 언어로 소통하는 것을 직접 보고 듣는 순간, 형들은 그가 진짜 요셉임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둘째는 관계의 진실성이다. 요셉은 이제 통치자로서의 가면을 벗고 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려 한다. 그동안 아버지를 속이며 거짓에 익숙한 삶을 살았던 형제들에게 요셉은 자신의 말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정직함을 호소한다. 즉, “내 입이 말한다”는 선언은 지금 형들이 듣고 있는 이 파격적인 약속이 어떠한 정치적 계산이나 속임수도 없는 요셉 자신의 인격에서 나온 진실임을 증명하려는 강력한 다짐이라 할 수 있다. 3) 형들이 비로소 요셉과 대화하기 시작한 때는 언제입니까?(15절) 요셉이 형들과 입 맞추며 안고 울었을 때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던 형들이 요셉과 대화를 시작한 것은, 요셉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가족 부양에 대한 진심을 전하며 설득한 이후다. 요셉은 형들을 안심시킨 뒤 한 사람씩 입을 맞추며 안고 울었다. 이때의 입맞춤은 단순한 형식적 인사가 아니라, 오랜 세월 억눌려 있던 죄책감과 원망을 녹여 내고 새로운 관계를 열어 가는 화해의 징표다. 이는 어긋나고 삐뚤어졌던 형제들의 마음을 회복시키는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형들은 이 뜨거운 눈물과 포옹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들처럼 누군가를 속이는 것은 아니며 진실한 용서가 실제로 존재함을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서로의 입맞춤으로 얼어붙었던 형들의 입이 열리고 진정한 소통이 시작되었다. 나눔 2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은 흉년 동안 그들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절연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처럼 그의 형편을 살피거나 진심으로 잘되기를 바란 적이 있습니까? 나눔 3 두려움에 떨던 형들은 요셉이 먼저 다가갔을 때 비로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오해나 갈등으로 오랜 기간 침묵하던 관계가 누군가 먼저 건넨 사과나 진심 어린 행동으로 풀린 경험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는 지혜를 주소서. 공동체 _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안고 거짓 없는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60517 선교회 모임 자료 2026-05-14 신내교회 5월_선교회_모임_자료.pdf 260510 속회지도자 자료 2026-05-06 신내교회 260510 속회지도자 자료.pdf 5월 둘째 주 그룹큐티나눔 피로 적신 채색옷 창세기 37:18-36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주 안에 있는 나에게(찬송 370장, 구 455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태피스트리는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면서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그 뒷면에는 매듭과 실오라기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습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선 현실도 꼭 태피스트리의 뒷면 같을 때가 있습니다. 수많은 갈등과 사건이 무질서하게 꼬여 있어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을 엮어 가시는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시간이 지나 시선을 달리할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매듭이 필연적이었던 하나님의 작품을 마주하게 됩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시기심에 사로잡힌 형들은 동생을 죽이려는 무서운 음모를 꾸밉니다(18-24절). 1) 저 멀리서 요셉이 다가오는 것을 본 형들은 어떤 계획을 세웁니까?(20절) 요셉을 죽여 구덩이에 던지고 짐승에게 잡아먹힌 것처럼 꾸민 다음,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했다. 멀리서 다가오는 요셉을 본 형들은 그동안 품어 온 증오를 실행에 옮기기로 결의한다. 이들의 모의는 단순히 우발적인 감정이 아니라 살해와 시체 은폐, 그리고 거짓 보고까지 포함된 매우 치밀한 계획이었다. 형들은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에 대한 질투를 넘어, 그가 꾼 꿈이 자신들을 조롱한다고 믿으며 분노를 키웠다. 결국 그들이 제거하고자 했던 핵심은 요셉이라는 개인을 넘어 그가 가진 ‘꿈’ 그 자체였다.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는 조롱 섞인 말은 그 꿈을 비웃고 짓밟으려는 일그러진 시선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이들의 악랄한 음모는 아이러니하게도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가동하는 결정적인 출발점이 된다. 인간은 폭력으로 꿈을 죽이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 악행조차 꿈을 이루는 통로로 사용하신 것이다. 2) 르우벤은 요셉을 살리기 위해 형제들을 어떤 말로 설득합니까?(21-22절) “죽이지는 말고, 광야 구덩이에 던지기만 하자.” 장자 르우벤은 형제들의 살인 모의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도 못했다. 요셉을 향한 형제들의 분노를 알았기에 적어도 ‘살인’만은 막으려 했다. 나름의 계획은 요셉을 몰래 구출하여 아버지에게 무사히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르우벤의 정확한 의도를 성경은 밝히지 않으나, 요셉이 사라진 뒤 절규하는 그의 모습은 장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 준다. 동생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아니었을지라도 그의 개입 덕분에 요셉은 생명을 보존한다. 비겁한 인간의 타협안조차 요셉의 생명을 지키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다. 나눔 1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어느 한 사람을 비난하거나, 옳지 않은 방향으로 분위기가 흘러 불편함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그때 르우벤처럼 상황을 조금이라도 바꾸려 노력했거나, 혹은 용기가 부족해 망설인 적이 있다면 솔직하게 나눠 봅시다. 2.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은 아버지까지 기만합니다(25-36절). 1) 결국 형들은 요셉에게 어떤 일을 저지릅니까?(28절) 은 이십에 동생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다.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은 형제들은 태연히 음식을 먹다가 지나가는 상인들을 발견한다. 그들은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이십에 판다. 여기서 은 이십은 화폐가 통용되기 전 시대이므로 무게 단위인 ‘세겔’을 의미한다. 형들은 동생을 은 이십 세겔의 무게만큼 받기 위해 상인들과 흥정하며 저울에 무게를 달았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요셉은 사랑받아야 할 동생이 아닌, 사고팔 수 있는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한다. 누군가를 인격체인 사람이 아니라 이익을 위한 물건으로 취급하는 순간, 그 안에 깃든 하나님의 형상은 처참히 파괴된다. 형제들의 이러한 냉혹한 매매는 요셉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를 이집트라는 더 큰 무대로 이끄는 서막이 된다. 2) 형제들은 요셉의 채색옷에 숫염소의 피를 적시고 아버지에게 보여 줍니다. 야곱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33-35절) 요셉이 짐승에 잡아먹힌 줄 알고, 큰 슬픔으로 오랫동안 통곡하며 주변의 어떤 위로도 거절했다. 요셉의 형제들은 숫염소의 피를 채색옷에 적셔 아버지를 철저히 속인다. 야곱은 피 묻은 옷을 보고 요셉이 악한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고 확신하며 절규한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라는 그의 탄식은 아들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참담한 심경을 잘 보여 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평생 타인을 속이며 살아왔던 야곱이 이제는 자식들에게 철저히 속임을 당하고 있다는 역설이다. 그는 주변의 어떤 위로도 거부한 채 굵은 베를 허리에 묶고 오랫동안 애통해한다. 야곱은 피 묻은 채색옷을 붙들고 오열하며 자신의 지난 삶과 기구한 운명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의 눈물은 아들을 잃은 극심한 슬픔인 동시에, 자신의 속임수가 초래한 비극적인 현실에 대한 처절한 회한과 고통의 증거다. 3) 요셉을 산 상인들은 그를 누구에게 팝니까?(36절)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다. 요셉의 이야기는 상인에게 팔려 간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를 다시 알 수 없는 미궁으로 인도한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자리에서 노예로 추락하여 이집트 정치의 중심부인 친위대장의 집으로 팔려 간다. 현실은 처참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우나 요셉의 삶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장이 시작된 것뿐이다. 우리는 삶에 닥친 급격한 변화의 의미를 당장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감당하기 힘든 순간을 묵묵히 버티며 살아갈 때, 훗날 돌아본 그 시간 속에서 비로소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을 발견하게 된다. 요셉에게 닥친 시련은 결국 거대한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한 신비로운 섭리의 과정이다. 나눔 2 누군가를 시기하거나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결과적으로 가까운 사람(가족, 친구, 교우)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준 적이 있습니까? 혹은 내 안의 질투심 때문에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적이 있습니까? 나눔 3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까?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그 시간이 나를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임을 알게 된 경험을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남들 손에 떠밀려 벼랑 끝에 설지라도 나를 붙잡은 주님 손만 믿고 묵묵히 견디게 하소서. 공동체 _ 욕심과 질투로 깨어진 곳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 되어, 새 창조를 경험하게 하소서. 260503 속회지도자 자료 2026-04-29 신내교회 260503 속회지도자 자료.pdf 5월 첫째 주 그룹큐티나눔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보다 창세기 33:1-20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찬송 272장, 구 330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19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장 발장을 따뜻하게 맞이한 이는 미리엘 신부였습니다. 그러나 장 발장은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붙잡히고 마는데, 신부는 그를 꾸짖는 대신, “왜 은촛대는 가져가지 않았소?”라며 더 귀한 것까지 내주었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만, 어쩌면 하나님은 예기치 못한 용서의 자리, 그 용서를 건네는 이의 따뜻한 얼굴 속에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드디어 야곱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형 에서와 마주합니다(1-11절). 1) 야곱은 형 에서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아갑니까?(3절) 가족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가까이 갔다. 야곱은 에서를 단순한 형이 아니라 자신의 생사권을 가진 ‘왕, 주’로 높여 대우하고 있다. 과거에는 속임수로 축복을 가로챘지만(창 27장), 이제는 진실하게 몸을 굽히며 사죄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야곱이 서 있는 ‘위치’다. 얍복강 씨름 전까지 그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행렬의 맨 뒤에 숨어 있었다. 형의 분노가 확인되면 언제든 도망칠 궁리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3절은 야곱이 모든 무리의 ‘맨 앞’에 서서 형을 맞이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위치 변화는 야곱이 더 이상 ‘속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고 직면하는 ‘이스라엘’로 변화되었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다. 2) 에서는 야곱을 어떤 모습으로 맞이합니까?(4절) 달려가서 야곱을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 맞추고 함께 울었다. 야곱은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수많은 재물을 준비하며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에서는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동생이 보낸 재물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동생을 보자마자 달려와 목을 안으며 진한 그리움을 쏟아 냈다. 이 눈물 섞인 포옹은 지난 세월의 아쉬움과 형제애를 한순간에 회복시키는 놀라운 화해의 장면이다. 야곱은 재물로 형의 마음을 사려 했으나, 에서는 이미 그 모든 응어리를 털어 버린 성숙한 모습으로 동생을 환대했다. 3) 야곱은 에서의 얼굴을 보며 마치 ‘누구’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말합니까?(10절) 하나님의 얼굴 에서는 야곱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그를 이미 용서하고 뜨겁게 환대했다. 이에 감격한 야곱은 형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고백한다. 이 표현은 단순히 형의 비위를 맞추려는 아첨이 아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밤새 씨름하며 대면했던 하나님의 얼굴(브니엘, 창 32:30)을, 이제 자신을 용서하는 형의 얼굴을 통해 다시금 생생하게 경험한다. 야곱에게 있어 하나님의 얼굴은 환상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마주하는 구체적인 실재가 되었다.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용서’라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완성되는지를 보여 준다. 나눔 1 내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뒤로 숨거나 도망치고 싶었던 적이 있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나 특별한 위로(기도, 말씀, 예배 등)를 통해 책임을 다할 용기를 얻은 경험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나눔 2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상황에서, 혹은 나를 비난할 줄 알았던 그 사람에게서 조건 없는 용서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내 두려움과 경직된 마음까지 녹아내리게 한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고 느낀 적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2. 야곱은 세겜으로 가서 하나님을 찾습니다(12-20절). 1) 야곱은 함께 가자는 에서의 청을 어떻게 사양합니까? (13-14절) 연약한 자식들과 가축 때문에 빨리 갈 수 없으니, 형이 앞서 가면 천천히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화해가 곧바로 ‘함께 이동하거나 거주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브라함과 롯이 거처를 나누었던 것처럼, 때로는 깊은 신뢰 관계 안에서도 서로를 위한 적절한 거리두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야곱에게는 돌봐야 할 어린 자녀들과 가축들이 있었다. 반면 에서는 400명의 군사를 거느린 전사이자 빠른 기동력을 가진 지도자였다. 두 사람은 태생부터 기질과 삶의 방식이 전혀 달랐기에(창 25:27), 에서의 호의가 야곱의 연약한 가족들에게는 오히려 감당하기 힘든 속도가 될 수 있다. 야곱은 형의 친절을 정중히 거절함으로써 이제 막 회복된 관계를 불편함 없이 유지하는 동시에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형편을 존중하는 지혜를 발휘한다. 2) 세겜에 당도한 야곱은 장막을 친 땅을 얼마에 구입합니까?(19절) 백 크시타 야곱은 장막 칠 부지를 얻기 위해 양 100마리에 달하는 비용을 지불한 셈이다. 아무리 야곱이 많은 가축을 거느린 거부였다 하더라도, 이는 결코 가벼운 지출이 아니었다. 어쩌면 하몰의 아들들이 이방인인 야곱의 형편을 이용해 시세보다 비싼 값을 불렀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야곱은 이 불리할 수 있는 거래를 피하지 않고 묵묵히 성사시킨다. 이를 통해 야곱은 가나안 땅에서 더 이상 떠도는 나그네가 아니라,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자신의 터전을 확보한 당당한 거주자가 되었다. 과거의 야곱이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속임수를 써서 이득을 취했겠지만, 이제는 타인이 자신을 속이려 할지라도 결코 속임수로 맞서지 않는다. 3) 야곱은 세겜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무엇이라 불렀습니까?(20절) 엘엘로헤이스라엘 벧엘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고(창 28:13), 야곱은 무사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서원했다. 야곱은, 마침내 그 서원을 이행하며 감사의 제단을 쌓았다. 그는 이 제단의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이름하였다. 과거에는 막연히 조상들의 하나님으로만 여겼으나, 이제는 자신의 험난한 삶을 직접 인도하고 지켜 주신 분을 당당히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 제단은 야곱의 신앙이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는 단계에서 벗어나, 직접 경험하고 증명해 낸 살아 있는 신앙으로 성숙했음을 보여 주는 위대한 기념비가 된다. 나눔 3 주변 사람들이나 부모님을 통해 막연하게 알고 있던 하나님의 존재를, ‘정말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구나!’ 하고 뜨겁게 만난 나만의 ‘엘엘로헤이스라엘’ 같은 순간이 있습니까? 이후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하나님의 은혜로 원수인 줄 알았던 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하게 해 주소서. 공동체 _ 서로의 얼굴에서 주님을 닮은 모습을 발견하며, 아픈 마음들이 따뜻한 사랑으로 아물게 하소서. 260426 속회지도자 자료 2026-04-22 신내교회 260426 속회지도자 자료.pdf 4월 넷째 주 그룹큐티나눔 잠 못 이루는 밤에 창세기 28:10-22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찬송 338장, 구 364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장자의 축복을 가로챕니다. 하지만 그 결과 야곱은 형의 미움을 받고 먼 길로 도망해야 했습니다. 야곱은 외로움과 두려움을 안고 거친 들에서 노숙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먼저 다가와 말씀하시고 위로하십니다. 우리가 잠 못 이루는 밤에 하나님은 은혜로 찾아오셔서 평안과 소망을 안겨 주십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도망가던 중에 거친 들에서 노숙합니다(10-15절). 1) 야곱이 꿈에서 본 장면은 무엇입니까?(12절) 사닥다리가 땅 위에서 하늘까지 닿아 있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사닥다리’는 히브리어로 ‘술람’이다. 그런데 이 ‘술람’은 지금의 간이 사다리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높은 곳을 오르도록 쌓은 계단을 의미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계단식 탑(신전 또는 제단)에 나오는 오르막 계단이 대표적인 예다. 야곱의 꿈에 나타난 이 계단이 땅에서 하늘까지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 긴 계단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였다. 그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까지 닿은 지점을 ‘하늘의 문’이라 하였다(17절). 즉 땅에서 하늘까지 사닥다리가 놓였다는 건 하늘과 땅이 ‘하늘의 문’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의미한다. 야곱은 간교하게 형과 아버지를 속이며 쫓기는 신세였지만, 하나님은 땅의 야곱을 보살피고 있었다. 야곱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돌보고 계셨다. 2) 야곱이 꿈에서 들은 말씀은 무엇입니까?(13-15절) “네가 이 땅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며,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리라.”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권한을 간교한 술수로 탈취한 잘못을 범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야곱을 책망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야곱에게 다시 말씀하신다(13:14-15).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이 언약의 말씀을 도망자 야곱에게 하신 것이다. 야곱의 자손이 동서남북으로 퍼져나갈 것이며 모든 족속이 야곱의 자손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야곱이 아직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때, 아니 찾을 기회도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야곱에게 찾아와 은혜의 손을 내민 것이다. 나눔 1 도망자 신세가 되어 두려움에 떨며 노숙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들려주셨습니다. 야곱처럼 외롭게 광야 생활을 해야 했던 적은 언제입니까? 그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위로하고 회복시켜 주셨는지 나눠 봅시다. 2. 야곱이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서원합니다(16-22절). 1) 야곱이 잠에서 깬 후에 비로소 깨달은 사실은 무엇입니까?(16절) 여호와께서 자신이 있는 곳에 계시다는 사실 야곱은 꿈을 꾸면서도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꿈을 꾸고 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게 되었다. 신구약 성경이 완전히 기록되기 이전에 백성들은 꿈과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야곱은 꿈에서 계시의 말씀을 들었으며, 꿈을 깬 후에 그 말씀에 대한 해석을 시도했다(16-17절). 야곱은 말씀 묵상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성경 묵상이다. 성경 묵상은 단지 성경의 팩트만 파악하는 게 아니라 그 말씀의 팩트 속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구체적인 메시지를 찾는 것이다. 야곱은 그간 남을 속이는 삶만 살아오다가 벧엘에서 비로소 말씀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2)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장소를 무엇이라고 명명합니까?(17-19절) ‘벧엘’(하나님의 집) 야곱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곳을 ‘하나님의 집(벧엘)’, ‘하늘의 문’이라 칭했다. ‘하나님의 집’은 이곳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던 자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결코 하늘 위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이 땅에 임재하여 그의 사랑하는 백성과 동행하시는 분이다. ‘하늘의 문’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땅에 있는 백성이 만날 수 있는 만남의 자리를 상징한다. 이곳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진 ‘시은소’(施恩所)다. 사람이 감히 하나님을 만날 자격도 능력도 없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와 말 걸어 주시고 만나 주신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집, 성소다. 3)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한 내용은 무엇입니까?(20-22절) ‘하나님의 도움으로 내가 평안히 돌아온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나는 이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고 주께 십일조를 드릴 것이다.’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로 안전하게 이 땅에 돌아오면, 야곱은 여호와를 진정한 하나님으로 모시며, 이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고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이 약속은 야곱 당대에 다 성취되는 게 아니다. 사실은 구약과 신약 전 역사를 통해 성취된다.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은 구약 시대 성소를 의미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는데 바로 그 자리가 성소다. 그 하늘의 성소가 출애굽 광야에서 성막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광야 성막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발전하고, 예수님은 이 땅에 참 성전으로 성육신하신다(요 1:14). 또한 예수님과 연결된 교회가 바로 성전이다(엡 2:20-22). 요한계시록 3:8과 4:5에 나오는 ‘열린 문’은 지상 성전과 하늘 성전을 연결하는 통로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의 은혜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눔 2 야곱에게 벧엘은 돌베개를 베고 자던 차가운 땅이었지만, 하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이 되었습니다. 일상(일터, 가정, 학교)에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예배하는 ‘나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나눔 3 야곱은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십일조와 헌신을 약속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드린 서원(약속)이 있습니까? 그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지금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낙심될 때, 먼저 다가와 손잡아 주시고 위로하여 주소서. 공동체 _ 하나님께 약속한 서원을 신실하게 지킬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주소서. 260419 속회지도자 자료 2026-04-14 신내교회 260419 속회지도자 자료.pdf 4월 셋째 주 그룹큐티나눔 잠 못 이루는 밤에 창세기 28:10-22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찬송 338장, 구 364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장자의 축복을 가로챕니다. 하지만 그 결과 야곱은 형의 미움을 받고 먼 길로 도망해야 했습니다. 야곱은 외로움과 두려움을 안고 거친 들에서 노숙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먼저 다가와 말씀하시고 위로하십니다. 우리가 잠 못 이루는 밤에 하나님은 은혜로 찾아오셔서 평안과 소망을 안겨 주십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도망가던 중에 거친 들에서 노숙합니다(10-15절). 1) 야곱이 꿈에서 본 장면은 무엇입니까?(12절) 사닥다리가 땅 위에서 하늘까지 닿아 있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사닥다리’는 히브리어로 ‘술람’이다. 그런데 이 ‘술람’은 지금의 간이 사다리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높은 곳을 오르도록 쌓은 계단을 의미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계단식 탑(신전 또는 제단)에 나오는 오르막 계단이 대표적인 예다. 야곱의 꿈에 나타난 이 계단이 땅에서 하늘까지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 긴 계단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였다. 그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까지 닿은 지점을 ‘하늘의 문’이라 하였다(17절). 즉 땅에서 하늘까지 사닥다리가 놓였다는 건 하늘과 땅이 ‘하늘의 문’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의미한다. 야곱은 간교하게 형과 아버지를 속이며 쫓기는 신세였지만, 하나님은 땅의 야곱을 보살피고 있었다. 야곱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돌보고 계셨다. 2) 야곱이 꿈에서 들은 말씀은 무엇입니까?(13-15절) “네가 이 땅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며,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리라.”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권한을 간교한 술수로 탈취한 잘못을 범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야곱을 책망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야곱에게 다시 말씀하신다(13:14-15).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이 언약의 말씀을 도망자 야곱에게 하신 것이다. 야곱의 자손이 동서남북으로 퍼져나갈 것이며 모든 족속이 야곱의 자손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야곱이 아직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때, 아니 찾을 기회도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야곱에게 찾아와 은혜의 손을 내민 것이다. 나눔 1 도망자 신세가 되어 두려움에 떨며 노숙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들려주셨습니다. 야곱처럼 외롭게 광야 생활을 해야 했던 적은 언제입니까? 그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위로하고 회복시켜 주셨는지 나눠 봅시다. 2. 야곱이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서원합니다(16-22절). 1) 야곱이 잠에서 깬 후에 비로소 깨달은 사실은 무엇입니까?(16절) 여호와께서 자신이 있는 곳에 계시다는 사실 야곱은 꿈을 꾸면서도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꿈을 꾸고 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게 되었다. 신구약 성경이 완전히 기록되기 이전에 백성들은 꿈과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야곱은 꿈에서 계시의 말씀을 들었으며, 꿈을 깬 후에 그 말씀에 대한 해석을 시도했다(16-17절). 야곱은 말씀 묵상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성경 묵상이다. 성경 묵상은 단지 성경의 팩트만 파악하는 게 아니라 그 말씀의 팩트 속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구체적인 메시지를 찾는 것이다. 야곱은 그간 남을 속이는 삶만 살아오다가 벧엘에서 비로소 말씀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2)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장소를 무엇이라고 명명합니까?(17-19절) ‘벧엘’(하나님의 집) 야곱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곳을 ‘하나님의 집(벧엘)’, ‘하늘의 문’이라 칭했다. ‘하나님의 집’은 이곳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던 자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결코 하늘 위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이 땅에 임재하여 그의 사랑하는 백성과 동행하시는 분이다. ‘하늘의 문’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땅에 있는 백성이 만날 수 있는 만남의 자리를 상징한다. 이곳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진 ‘시은소’(施恩所)다. 사람이 감히 하나님을 만날 자격도 능력도 없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와 말 걸어 주시고 만나 주신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집, 성소다. 3)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한 내용은 무엇입니까?(20-22절) ‘하나님의 도움으로 내가 평안히 돌아온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나는 이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고 주께 십일조를 드릴 것이다.’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로 안전하게 이 땅에 돌아오면, 야곱은 여호와를 진정한 하나님으로 모시며, 이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고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이 약속은 야곱 당대에 다 성취되는 게 아니다. 사실은 구약과 신약 전 역사를 통해 성취된다.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은 구약 시대 성소를 의미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는데 바로 그 자리가 성소다. 그 하늘의 성소가 출애굽 광야에서 성막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광야 성막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발전하고, 예수님은 이 땅에 참 성전으로 성육신하신다(요 1:14). 또한 예수님과 연결된 교회가 바로 성전이다(엡 2:20-22). 요한계시록 3:8과 4:5에 나오는 ‘열린 문’은 지상 성전과 하늘 성전을 연결하는 통로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의 은혜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눔 2 야곱에게 벧엘은 돌베개를 베고 자던 차가운 땅이었지만, 하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이 되었습니다. 일상(일터, 가정, 학교)에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예배하는 ‘나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나눔 3 야곱은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십일조와 헌신을 약속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드린 서원(약속)이 있습니까? 그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지금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낙심될 때, 먼저 다가와 손잡아 주시고 위로하여 주소서. 공동체 _ 하나님께 약속한 서원을 신실하게 지킬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주소서. 260412 속회지도자 자료 2026-04-08 신내교회 260412 속회지도자 자료.pdf 4월 둘째 주 그룹큐티나눔 미리 준비하는 아버지 창세기 22:1-18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복의 근원 강림하사(찬송 28장, 구 28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부르십니다. 그 시험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언약의 씨’인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받으시고 친히 번제로 쓸 양을 따로 준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친히 자기 아들을 준비하셨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아브라함은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을 받았지만, 아침 일찍 길을 떠납니다(1-8절). 1)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1-2절)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부르셨다. 시험의 내용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다. 야고보서 1:13에 의하면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 그렇다면 야고보서 1:13과 창세기 22:1은 서로 모순되는 말씀인가? 아니다.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시험은 ‘유혹’(temptation)을 의미한다. ‘유혹’은 어떤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함정을 파고 유인하는 거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죽음의 길로 이끌기 위해 미혹하지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순종)하는지는 시험(Test)하신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백 세에 낳은 약속의 씨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차마 순종하기 어려운 시험 문제를 하나님께 받았다. 2)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가던 이삭이 이상하게 여겨 질문한 것은 무엇입니까?(6-7절) “번제를 위한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번제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제물인데 정작 양은 없고 장작과 불만 있는 게 이삭이 보기에 몹시 이상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질문한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예루살렘)까지 거리는 약 100km 정도다. 3일 정도 쉼 없이 걸어야 하는 거리다. 이삭은 당시 십대를 넘어 청년의 나이였을 것이다. 고대 맏아들을 인신 제사로 드리는 풍습이 만연해 있었기에 이삭은 혹시 자기가 제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청년 이삭은 3일 동안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아버지의 길을 따랐다. 3) 아들 이삭의 질문에 아버지 아브라함은 어떻게 대답합니까?(8절)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이삭의 질문에 아브라함은 번제로 드릴 어린양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거라고 에둘러 말한다. 사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드는 순간까지도 숫양을 따로 준비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몰랐다. 이런 차원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한 답변은 다소 궁색한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 상황을 단지 모면하려고 임기응변으로 말한 게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몸부림친 것이다.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내놓을 수 있다는 믿음을 표한 것이다. 나눔 1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시험은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를 불러 맡기신 시험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시험대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나눠 봅시다. 2. 하나님이 번제물을 친히 준비하십니다(9-18절). 1) 아브라함이 이삭을 칼로 찌르려 할 때 하늘에서 어떤 음성이 들려왔습니까?(9-12절) “네 아들에게 손대지 말라. 네가 독자를 아낌없이 바치려 하였으니,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이제 내가 알겠다.” 이삭은 청년이고 아브라함은 노년의 할아버지였기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완력으로 제압해서 결박할 수는 없었다. 이삭이 순순히 받아들였기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고 칼을 들어 잡으려 하였다. 여기서 ‘잡다’라는 히브리어 ‘샤하트’는 ‘도살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이삭을 도살하려 했던 거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린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 네가 독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진짜 원하신 건 인신 제사가 아니라 헌신의 믿음이었다. 2) 결국 아브라함은 어떤 제물로 번제를 드립니까?(13-14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신 숫양으로 번제를 드렸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숫양을 준비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일관되게 인신 제사를 가증스럽게 여기신다(신 12:31; 레 18:21; 20:2-5; 렘 7:31; 19:5; 미 6:7; 왕하 16:3).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사람을 제물로 바치게 한 적이 없다. 아브라함에게는 그의 아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정작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어 모든 인류를 위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셨다. 인류 구원을 위한 궁극적인 희생 제물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것이다. 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거듭 말씀하신 언약의 복은 무엇입니까?(15-18절) “네가 나의 말에 순종했으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네 자손으로 인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의 씨를 통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게 하는 것이다. 즉 이삭이 언약의 씨가 될 것이며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이스라엘 나라를 만드실 것이다. 바울은 이 사건을 그리스도 예수에게 적용한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씨’(자손)는 여럿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오직 한 사람을 가리키는 데 바로 그분이 ‘그리스도 예수’라는 거다(갈 3:1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 복이 예수를 통해 온전히 성취된 것이다. 예수를 믿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나눔 2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만 받으시고 번제물은 친히 준비하셨습니다. 이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것에 대한 예표이기도 합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해 주신 은혜를 경험한 적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나눔 3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며, 네 자손들로 인해 세상 모든 사람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은 무엇입니까? 가정과 공동체에 하나님이 주신 복을 헤아리며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이성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 말씀일지라도 믿음으로 순종하게 하소서. 공동체 _ 교회가 ‘복의 통로’가 되어 세상에 생명의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260405 속회지도자 자료 2026-04-01 신내교회 260405 속회지도자 자료.pdf 4월 첫째 주 그룹큐티나눔 안식 후 첫날 제자들이 찾는 것 요한복음 20:1-18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예수 부활했으니(찬송 164장, 구 154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제자들이 안식 후 첫날 아침부터 찾고 있는 것은 부활의 주님이 아니라 차가운 주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부활하셨지만, 제자들은 빈 무덤 앞에서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을까?’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넋이 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죽음의 절망에 빠진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안식 후 첫날, 제자들은 ‘빈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습니다(1-10절). 1)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이 빈 것을 알고 어떻게 행동합니까?(1-2절) 제자들에게 가서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보고하면서,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간 것 같다고 말했다. 안식 후 첫날 예수의 무덤에 간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마리아가 ‘시몬 베드로’와 ‘사도 요한’(‘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빈 무덤 사실을 보고할 때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무덤에 간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와 더불어 여러 여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공관복음에서는 모두 막달라 마리아를 포함한 다른 여인들이 함께했음을 보고한다(마 28:1; 막 16:2; 눅 24:1, 10). 즉 예수의 빈 무덤을 목격한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었다. 여인들에게 아직 예수 부활에 대한 의식은 없었지만, 그들이 분명하게 보고 증언하는 바는 바로 ‘빈 무덤’이다. 2) 마리아의 말을 듣고 무덤에 간 제자들이 재차 확인한 것은 무엇입니까?(3-7절)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 베드로와 ‘다른 제자’(사도 요한)가 여인들의 말을 듣고 즉각 예수의 무덤으로 달려갔다. 사도 요한이 베드로보다 젊었기에 좀 더 빨리 뛰어 무덤에 도착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무덤 밖에서 안을 확인할 뿐 무덤 안으로는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드로는 주저하지 않고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은 없었고,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더 특이한 점은 예수의 얼굴을 감쌌던 수건(수다리온)이 시신 머리 부분에 따로 가지런히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예수의 몸을 쌌던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이 그대로 있는 채 예수님의 몸만 빠져나간 것을 보여 준다. 3) 제자들이 ‘빈 무덤’을 보고도 깨닫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9절)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리라는 성경 말씀 베드로와 사도 요한 모두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고 예언한 구약의 말씀은 깨닫지 못했다(참조. 시 16:10; 호 6:2).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가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초대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후다(요 2:22; 눅 24:45-46). 빈 무덤은 부활의 분명한 증거이긴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제로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제자들과 만나 인격적으로 말씀을 나누며 자신을 보여 주는 일이 남아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직접 심방하신다(요 20:19). 나눔 1 ‘빈 무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명확한 증거임에도 제자들은 그 빈 무덤에서 다시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려 했습니다. 혹시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전히 무덤에서 찾으려는 건 아닙니까? 여전히 ‘죽음의 굴레’에 갇힌 채 낙망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서로 나눠 봅시다. 2.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11-18절). 1) ‘빈 무덤’을 보며 마리아가 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13절) 예수님의 시신이 도둑맞았다는 생각에 탄식했다. 마리아는 여전히 ‘빈 무덤’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예수님의 시신 ‘절도’로만 이해하려 한다. ‘빈 무덤’이 ‘예수의 부활’의 증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믿음이 아직 부족했던 거다. 여인은 단지 눈에 보이는 현상만 볼 뿐, ‘빈 무덤’의 의미를 예수님의 생전 말씀과 연결하지 못하고 있다(참조. 마 16:21; 17:22-23; 20:17-19). 빈 무덤은 예수 부활의 명확한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믿음이 부족하여 예수 시신을 지키지 못한 것만 자책하며 탄식하고 있다. 2)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인 줄 모르고 부탁한 것은 무엇입니까?(14-15절) “예수님의 시신을 혹시 당신이 옮겼다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십시오.” 끝까지 여인이 관심을 두는 건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다. 심지어 살아계신 예수님께 ‘예수의 시신’을 어디에 두었는지 알려 달라고 요청한다. 기막힌 역설이다. 여인이 이렇게 하는 건 예수에 대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여인이 지극히 예수를 사랑하며 따랐기에 예수의 죽음에 예를 표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온전한 믿음은 예수의 죽음에 예를 표하는 게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3) 마리아는 방금 대화한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떻게 행동합니까?(16-18절) 즉시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렸다. 예수님은 자기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여전히 예수의 시신을 찾는 마리아의 우둔함을 책망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따뜻하게 ‘마리아야’라고 이름을 불러 주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 부활의 모습을 마리아에게 보여 주시고 이 사실(예수 부활)을 형제들(제자들)에게 가서 증언하라고 말씀하신다. 마리아는 이 예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며 제자들에게 가서 ‘살아나신 주님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신앙생활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을 증언하는 삶이다. 나눔 2 마리아는 무덤만 바라보며 주님의 부재를 한탄하다가, 부활하셔서 자기 등 뒤에 계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삶에서 ‘정말 주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하고 강렬한 주님의 임재를 느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나눔 3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달려가 “내가 주를 보았다”고 외친 것처럼, 내가 이 기쁜 부활의 소식을 전해 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지 구체적인 실천 한 가지를 정해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무덤(죽음, 삶의 문제)에서 시선을 돌려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소서. 공동체 _ 교회가 부활의 증인이 되어 생명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게 하소서. 260329 속회지도자 자료 2026-03-25 신내교회 260329 속회지도자 자료.pdf 3월 다섯째 주 그룹큐티나눔 주님이 떠난 자리에 요한복음 16:1-15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내가 매일 기쁘게(찬송 191장, 구 427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성도에게는 누구나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듯한 ‘영혼의 밤’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텅 빈 자리는 버려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또 다른 ‘초대’의 시간입니다. 눈에 보이는 껍데기에 의존하던 낡은 습관을 버리고, 마음의 눈을 떠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본심을 마주하라는, 가장 신비롭고 은밀한 사랑의 초대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예수님은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1-4절). 1)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가올 박해를 미리 말씀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1절)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고난을 미리 말씀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닥쳐올 시련 앞에서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박해 그 자체보다 더 위험한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의심에 빠져 신앙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이다. 주님은 이 모든 일을 미리 예고하심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비극이 통제 불능의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와 계획 안에 있음을 확증해 주셨다. 결국 이 예고는 제자들이 겪을 고통의 의미를 재정의하고, 끝까지 신뢰를 잃지 않게 하려는 주님의 세심한 배려다. 2) 사람들이 제자들을 박해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입니까?(3절) 사람들이 아버지와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겪게 될 박해의 가장 역설적인 지점은 가해자들이 그 폭력을 하나님을 위한 제의적 봉사로 확신한다는 점이다. 당시 유대교 사회에서 ‘출교’는 단순한 종교적 축출을 넘어 모든 사회적·경제적 관계가 단절되는 사회적 사형 선고와 같았다. 그들은 율법을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잔인한 박해를 행하면서도 그것이 신앙적인 정의라고 믿었다. 예수님은 이 비극의 근본 원인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무지’로 규정하신다. 하나님을 안다고 자부했으나, 정작 그분이 보내신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 영적 맹목이 종교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나눔 1 누구나 형통한 삶을 꿈꾸며 신앙생활을 시작하지만, 실상은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입거나 억울한 상황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뜻밖의 고난으로 주님을 원망하거나, 믿음이 요동했던 적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2. 성령님이 오셔서 제자들에게 할 일을 알려 주십니다(5-15절). 1)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인 까닭은 무엇입니까?(7절) 예수님이 떠나가시지 않으면 보혜사(성령)가 제자들에게로 오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떠나시는 것이 유익인 이유는,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 한 번에 한 장소에서만 제자들과 함께하실 수 있었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보내실 보혜사(성령)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서 각 사람의 심령 속에 내주하시며 우리를 도우신다. 당시 슬픔에 잠겼던 제자들은 이 영적 원리를 이해하기 어려웠겠지만, 결과적으로 성령의 오심은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땅끝까지 전파되는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다. 2) 성령님은 무엇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까?(8절) 죄, 의, 심판에 대하여 성령님이 오셔서 행하시는 책망은 단순히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당연하게 여겨온 기준을 완전히 뒤엎는 폭로다. 세상은 자신들이 ‘의롭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을 ‘심판’했으나, 성령님은 거꾸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이며, 하늘로 가신 예수님만이 참된 ‘의’이고, 오히려 예수를 죽인 세상 권세가 ‘심판’을 받았음을 드러낸다. 즉, 성령님은 인간이 세운 허구의 법정을 해체하시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승리했음을 온 천하에 알리는 역할을 하신다. 3) 진리이신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말하고 나타내고 알리시는 것은 무엇입니까?(13-15절) 예수님에게 들은 것을 말하고,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예수님의 것으로 알리신다. 본문은 성령님의 사역이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임을 보여 준다. 성령님은 스스로 나타내지 않으시고 오직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아버지의 것이 다 내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알리신다. 이는 성부-성자-성령의 완벽한 일치와 연합을 보여 준다. 결국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심으로써, 우리가 단순히 성경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권능에 동참하게 만드는 사역을 수행하신다. 나눔 2 제자들에게 주님의 빈자리는 공허가 아니라,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는 역전의 현장이 될 것입니다. 혹시 우리 삶에도 텅 비어 버린 상실의 공간이 있습니까? 성령께서 그 공간을 어떠한 은혜로 채우시길 원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나눔 3 성령님은 세상의 그릇됨을 책망하심으로 세상을 진리로 이끄십니다. 말씀과 양심을 통해 잘못을 꾸짖는 성령님 덕분에 다시 선한 마음을 품고 바른길로 가게 된 적이 있습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눈에 보이는 상황이 막막할지라도, 제 안에 계신 성령님을 더 깊이 신뢰하며 진리의 길을 걷게 하소서. 공동체 _ 화려한 프로그램에 의존하는 공동체가 아닌, 보이지 않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60322 속회지도자 자료 2026-03-18 신내교회 260322 속회지도자 자료.pdf 3월 넷째 주 그룹큐티나눔 발을 닦고, 길을 닦아 보이다 요한복음 13:1-17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십자가를 질 수 있나(찬송 461장, 구 519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명문대 출신의 수재이자 대형 교회들이 탐내던 스타 목사 사무엘 로건 브렝글. 그는 모든 부귀영화를 뒤로하고 윌리엄 부스를 찾아가 구세군에 자신을 투신했습니다. 자신의 화려한 이력이 큰 쓰임새가 되리라 믿었지만, 그에게 맡겨진 첫 임무는 훈련소 지하실에서 훈련생들의 진흙투성이 군화를 닦는 일이었습니다. 모욕감을 느껴 불평하던 순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예수님의 모습이 그의 뇌리를 스쳤습니다. 그는 군화의 진흙을 닦아 내며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닦아야 할 것은 군화에 묻은 진흙이 아니라, 마음 깊이 덕지덕지 붙어 있던 ‘교만’이었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1-11절). 1)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1절)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기 위해 당시 유대 사회에서 먼지 묻은 발을 씻기는 일은 가장 비천한 종이나 노예가 맡았던 낮은 자의 의무였다. 제자가 스승을 극진히 섬기는 관례는 있었으나, 스승이 종을 자처하여 제자의 발을 씻기는 것은 당대 사회의 위계질서를 완전히 뒤엎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요 1:14)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신 하나님의 성육신적 사랑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재현된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노예의 위치에 서심으로써, 사랑이란 위에서 아래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 섬기는 것임을 몸소 보여 주셨다. 2) 베드로가 자기 발을 씻지 못하게 하자, 예수님은 무슨 말로 그를 설득하셨습니까?(8절)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때로 우리는 ‘자격이 없다’는 겸손을 앞세워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거절하곤 한다. 베드로 역시 스승에 대한 예우를 지키려 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주님의 사역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씻겨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씻기심으로써 비로소 주님과 관계(상관) 있는 자로 만드신다. 내가 자격 없음을 고백하며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나, 반대로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며 은혜를 당연시하는 것 모두 ‘은혜의 본질’을 오해하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주님의 손길이 내 삶에 닿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순종이다. 나눔 1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을 섬겨야 한다는 생각에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섬김’보다 ‘씻김’이 먼저입니다. 그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께 사랑받는 기쁨’보다 ‘일의 성취나 인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진 않았는지 솔직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2.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본을 따르기를 바라십니다(12-17절). 1)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명령하셨습니까?(14절)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라는 말씀에서 ‘옳으니라’라는 표현은 도덕적, 신앙적 당위성을 담고 있다. 당시 사회적 통념으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발을 씻기는 것이 당연했지만, 예수님은 이 구조를 완전히 뒤엎으셨다. 스승이신 주님이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기에, 이제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더 높은가를 다투는 대신 누가 더 낮은 곳에서 섬길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 되어야 했다. 결국 성도의 위대함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거느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의 발을 씻기느냐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준다. 2)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15절) 제자들이 그대로 따르도록 보여 주신 본(본보기)이다. 예수님은 섬김을 관념적인 이론이나 고결한 철학으로만 남겨 두지 않으셨다.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행동, 즉 ‘발을 씻기심’이라는 시각적이고 실천적인 패턴을 직접 몸으로 그려 내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가르침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여 주신 그 행동 양식을 삶의 표준으로 삼아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인 삶의 태도로 낮아짐과 섬김을 증명해 내는 것이다. 3)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17절)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본을 따라 서로를 섬겨야 마땅함을 알고 행하는 것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의 비결은 단순히 주님의 가르침을 깨닫는 ‘지식’에 머물지 않고, 그 지식을 삶으로 번역해 내는 ‘실천’에 있다. 당시 요한복음의 수신자들은 영적인 지식만 있으면 구원에 충분하다고 믿던 영지주의적 풍조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된 지식이란 반드시 사랑의 행위로 증명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즉, 제자도의 핵심은 머리로 이해한 ‘섬김의 원리’가 손과 발을 통해 ‘섬김의 실제’로 나타날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복이 임한다는 것이다. 나눔 2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그들이 걸어가야 할 삶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공동체와 우리가 몸담은 이 사회 속에서, 주님을 따라 걸어야 할 ‘섬김의 길’은 무엇일지 함께 나눠 봅시다. 나눔 3 남의 발을 씻기는 것은 종의 일이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발을 씻기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발을 씻어 주는 태도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 누린 ‘복’에 대해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높아지려는 교만과 대접받으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예수님처럼 허리에 수건을 두르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공동체 _ 세상 속에서 섬김의 본을 보임으로 복음의 길을 닦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60315 속회지도자 자료 2026-03-13 신내교회 260315 속회지도자 자료.pdf 3월 셋째 주 그룹큐티나눔 믿으면 보이는 것들 요한복음 11:38-46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찬송 545장, 구 344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1945년 이후 육상계에는 ‘마의 4분 벽’이 존재했습니다. 당시 의학자들은 ‘인간이 4분 안에 1마일(약 1.6km)을 주파하면 심장이 터져 죽을 것’이라며 이는 신체 구조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했습니다. 하지만 로저 배니스터는 이 한계가 신체가 아닌 마음에 있다고 믿었고, 결국 1954년에 3분 59초 4의 기록으로 그 벽을 넘어섰습니다. 놀랍게도 불가능해 보이던 그 기록은 그 후 수많은 선수에 의해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불가능’이라는 돌을 치울 때, 비로소 ‘가능’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이는 믿음의 능력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을 막은 돌을 옮기려 하십니다(38-40절). 1) 예수님이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시자, 마르다는 무엇이라 말합니까?(39절)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고, 벌써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영혼이 3일 동안은 시신 주위를 맴돌며 다시 몸으로 돌아올 기회를 엿본다는 관념이 있었다. 그러나 ‘나흘째’가 되었다는 것은 영혼이 완전히 떠났으며, 신체 부패가 시작되어 생물학적 회복이 불가능한 절대적인 죽음을 의미했다. 마르다가 “벌써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오라버니가 이제는 그 어떤 기적의 범주에서도 벗어났다는 현실적이고도 처절한 절망을 드러낸 것이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십니까?(40절)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 예수님은 인간의 보편적인 인식론을 완전히 뒤집으신다. 대부분의 사람은 도마와 같이 “보아야 믿겠다”는 경험적 증명을 요구하지만, 예수님은 “믿으면 보리라”는 영적 원리를 선언하신다. 이는 믿음이 기적의 ‘결과’가 아니라 기적을 경험하기 위한 ‘전제’임을 의미한다. 썩은 냄새가 나는 절망적인 현실(4일 된 시신) 앞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먼저 신뢰할 때, 비로소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영광이 실재가 되어 나타난다. 나눔 1 마르다의 의식을 지배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이미 시신이 부패하여 냄새가 나는 참혹한 현실이었습니다. 혹시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보다 눈앞의 문제가 더 커 보여서, ‘이젠 끝났다’며 스스로 굳게 닫은 마음의 돌문이 있지 않습니까? 2.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십니다(41-46절). 1) 예수님이 주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 내어 기도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42절)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둘러선 무리가 믿게 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늘 소통하고 계셨기에 굳이 소리 내어 기도하실 필요가 없었으나, 곁에 선 무리를 위해 특별히 이 기도를 들려주셨다. 이는 이 기적이 예수의 개인적인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의 온전한 연합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원 성취’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음을 계시하는 도구로 기도를 사용하신 것이다. 결국 이 기도는 기적을 목격할 무리가 그 기적 너머에 있는 ‘보내신 이’(하나님)를 발견하도록 돕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2)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44a절) 죽은 자(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으나, 그의 모습은 여전히 ‘수족을 베로 동인 상태’였다. 당시 유대인의 매장 관습은 시신을 세마포로 감싸는 것이었으며, 이는 나사로가 생물학적으로는 살아났지만 외형적으로는 여전히 죽음의 흔적에 묶여 있었음을 보여 준다. 시신이 부패하여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자연의 법칙과 죽음의 굴레조차, 예수님의 한마디 권능 앞에서는 나사로를 무덤 속에 가두어 둘 수 없었음을 시각적으로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다. 3)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명하십니까?(44b절) “(나사로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은 직접 행하셨지만, 그를 묶고 있는 베를 푸는 일은 주변 사람들에게 맡기셨다. 이는 죽음에서 옮겨진 한 영혼이 다시 일상의 삶을 영위하고 공동체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은혜와 더불어 지체의 돕는 손길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다니게 하라”는 말씀은 그가 이제 무덤이라는 폐쇄된 공간을 벗어나,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삶의 현장으로 당당히 복귀해야 함을 선포한다. 나눔 2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에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 이웃을 죽음의 결박에서 해방하고 생명을 누리도록 돕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나눔 3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나의 판단을 내려놓고 주님을 신뢰함으로 반전을 경험한 일이 있습니까? 막혔던 벽이 문이 되고 보이지 않던 해결책이 보였던 놀라운 은혜가 있다면 함께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눈앞의 현실이 아무리 암담해도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돌을 옮기게 하소서. 공동체 _ 우리 공동체가 사망의 권세에 결박되어 있는 이웃을 자유케 하는 주님의 손길이 되게 하소서. 260308 속회지도자 자료 2026-03-04 신내교회 260308 속회지도자 자료.pdf 3월 둘째 주 그룹큐티나눔 양을 위해 희생하는 목자 요한복음 10:1-21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찬송 569장, 구 442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9·11 테러 당시, 모건 스탠리의 보안 책임자 릭 레스콜라는 아수라장 속에서도 침착하게 대피를 지휘했습니다. 그의 지도력 덕분에 2700명의 직원 중 2687명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남은 이들을 구하려고 다시 불길 속으로 들어간 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는 위기의 순간에 도망치는 ‘삯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양 떼의 안전을 생각하여 끝까지 자리를 지킨, 우리 시대의 ‘선한 목자’였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예수님이 자신을 비유로 소개하십니다(1-10절). 1) 예수님은 자신을 무엇에 비유하십니까?(7절) “나는 양의 문이다.” 예수님은 당시 제자들에게 익숙했던 목축 문화를 빌려 자신을 ‘양의 문’이라 선포하셨다. 목자가 양 떼를 몰고 멀리 나갔을 때, 밤이 되면 돌을 쌓아 임시 우리를 만들곤 했다. 이때 별도의 문이 없는 출입구 바닥에 목자가 직접 누워 잠을 청했는데, 이는 목자의 몸이 곧 우리로 드나드는 유일한 ‘문’이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비유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양들의 안전을 직접 책임지는 목자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지키는 ‘살아있는 문’이자 유일한 보호자가 되심을 강력하게 보여 준다. 2) 양의 문을 통하여 우리에 들어가는 양은 무엇을 받습니까?(9절) 구원을 받게 되고, 꼴을 얻게 된다. 본문에서 말하는 ‘구원’은 단순히 죽어서 가는 천국에 머물지 않는다. 예수님은 양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뿐만 아니라, 다시 밖으로 나가는 역동적인 모습(“들어가며 나오며”)을 통해 이 구원의 풍성함을 설명하신다. 이는 목자이신 주님의 보호 아래에서 누리는 일상의 자유와 안전을 의미한다. 참된 신앙은 심판을 피하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매 순간 주님과 동행하며 삶의 활력과 참된 생명력을 경험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나눔 1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으로 비유하시며, 그 문을 통할 때 얻게 될 구원과 풍성한 꼴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우리가 누리게 된 구원의 감격과 삶 속에서 채워 주시는 풍성한 기쁨을 소개해 봅시다. 2.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로 소개하십니다(11-21절). 1) ‘선한 목자’는 어떤 사람입니까?(11절)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로 정의하시며, 위기의 순간에 도망치는 ‘삯꾼’과 극명하게 대조하신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고용된 삯꾼은 이리가 나타나면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양을 버리는 것이 정당한 선택이었으나, 양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는 참된 목자는 목숨을 걸고 양을 지켰다. 예수님은 백성을 도구로 삼아 착취하던 바리새인들을 삯꾼으로 꾸짖으시며, 양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는 자신의 희생적 사랑이 진정한 목자의 증거임을 선포하신다. 2) 목자가 이리가 오는 것을 보고도 양을 버리고 달아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13절) 그가 삯꾼(품삯을 받고 임시로 일하는 일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난은 단순히 도덕적인 차원을 넘어, 당대 유대 사회의 최소한의 상식적 기준마저 저버린 무책임함을 지적하고 있다. 유대 법전인 ‘미쉬나’에 따르면 고용된 목자는 사자나 곰, 혹은 ‘이리 두 마리’ 이상이 나타나는 불가항력적 상황에서만 면책권이 주어졌다. 즉, 본문에 등장하는 ‘이리 한 마리’(단수) 정도는 목자의 막대기로 충분히 쫓아낼 수 있는 수준으로 간주 되었다. 그럼에도 양을 버리고 달아난 삯꾼은 법적 면책 사유조차 없는 극도의 태만함과 무관심을 보여 주며, 이는 당시 백성을 돌보지 않던 종교지도자들의 무책임한 실상을 날카롭게 폭로한다. 3)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14-15절) 예수님과 양이 서로 아는 것이, 아버지와 예수님이 서로 아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근거는 단순한 책임감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완전한 ‘앎’의 관계에 있다. 이는 목자가 없어서 흩어진 양 떼를 위해 하나님이 친히 목자가 되겠다고 선언하신 에스겔 34장의 약속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여기서 ‘안다’는 표현은 히브리어 ‘야다’의 개념으로,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닌 전인격적이고 경험적인 친밀함을 뜻한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을 온전히 아시고 사랑하시듯, 예수님 또한 우리를 그토록 깊이 알고 사랑하시기에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시는 것이다. 나눔 2 예수님은 나의 이름뿐만 아니라 숨겨진 아픔과 고민까지 다 아십니다. ‘주님이 내 상황과 마음을 다 알고 계셨구나’라고 깨달은 순간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나눔 3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주신 분이 해결하지 못하실 문제는 없습니다(참조. 롬 8:32). 이 믿음을 가지고, 지금 내가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할 걱정이나 염려는 무엇입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세상의 헛된 소리가 아닌 주님의 음성만 듣고 따라가는 주님의 양이 되게 하소서. 공동체 _ 주님의 마음을 품어 서로를 위해 기꺼이 수고를 감당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60301 속회지도자 자료 2026-02-25 신내교회 260301 속회지도자 자료.pdf 3월 첫째 주 그룹큐티나눔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는 시간 요한복음 9:1-12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어두운 내 눈 밝히사(찬송 366장, 구 485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일본에는 깨진 도자기를 버리는 대신, 그 틈을 옻과 금가루로 메우는 ‘킨츠기’라는 기법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수리된 그릇은 깨지기 전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예술품으로 재탄생합니다. 예수님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은 깨진 도자기처럼 상처 입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깨어진 틈을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채우셔서 우리를 세상에 하나뿐인 걸작으로 다시 빚어내십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예수님과 제자들이 시각장애인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눕니다(1-3절). 1) 제자들은 그가 시각장애인이 된 원인을 무엇으로 보았습니까?(2절) 자신의 죄, 혹은 부모의 죄 당대 유대 사회는 “복은 순종의 결과이며 불행은 죄의 대가”라는 인과응보적 신학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잠언과 같은 지혜 문학의 전통과 맞닿아 있었으며, 심지어 태아의 범죄 가능성이나 부모의 죄가 자녀에게 전가된다는 구체적인 신학적 논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제자들의 질문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고난의 원인을 오직 ‘누구의 죄 때문인가’라는 정죄의 틀 안에서만 파악하려 했던 당시의 한계를 보여 준다. 2) 예수님은 그 사람이 시각장애인이 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십니까?(3절) 당사자나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설명하신다. 유대 사회가 시각장애를 죄의 대가로 정죄하려 했다면, 예수님은 이 고통을 통해 일하실 하나님께로 사람들의 시선을 옮긴다. 이는 “선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강력한 대답이기도 하다. 인간의 연약함과 고통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로 재정의됨으로써, 시각장애인의 치유 사건은 단순한 신체적 회복을 넘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된다. 나눔 1 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내가 뭘 잘못했나?’ 하며 자책하거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통해 도리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일을 이야기해 봅시다. 2. 예수님이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4-12절). 1)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5절) 세상의 빛 예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선포하신 것은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빛과 어둠의 대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흑암을 물리치고 빛을 창조하셨던 사건을 연상시키며, 이제 예수께서 시각장애인이 처한 어둠을 몰아내고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심을 시사한다. 이 선포의 배경에는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의 강력한 시각적 이미지가 담겨 있다. 초막절 기간, 예루살렘 성전 ‘여인의 뜰’에는 거대한 횃불들이 타올라 온 성안을 환하게 비췄다. 이 빛은 광야 시절 이스라엘을 인도했던 ‘불 기둥’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나아가 열방을 비출 메시아를 고대하는 소망을 담고 있다. 예수님은 성전의 횃불을 보시며, 그 인공적인 빛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인도자이자 영원한 빛이 바로 자신임을 제자들에게 일깨워 주신다. 2) 예수님은 어떻게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까?(6-7절)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도록 하셨다. 예수께서 침으로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신 행위는,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던 창세기의 창조 사건(창 2:7)을 강력하게 연상시킨다. 이는 단순히 당시의 민간요법을 따르신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결여되었던 시각 기능을 창조주로서 새롭게 창조하고 빚으시는 신성한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만드셨던 태초의 하나님처럼, 예수님은 어둠 속에 갇힌 태생적 시각장애인에게 빛의 세계를 선물하신다. 기혼 샘에서 흘러나온 물이 모이는 실로암 못은 성전 제례 시 정결 예식을 위해 사용되던 거룩한 장소였다. 시각장애인이 그곳에서 씻어 눈을 뜨게 된 것은, 육체적인 치유를 넘어 그동안 죄인으로 낙인찍혀 소외되었던 그가 공동체 안에서 온전한 정결함을 인정받고 회복되었음을 공포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3) 주변 사람들은 그가 눈을 뜨게 된 것을 알아보았습니까?(8-9절)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고,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이 눈을 뜨고 세상을 보게 된 사건은 주변 사람들의 인식을 뒤흔들 만큼 강렬했다. 늘 같은 자리에 앉아 구걸하던 비천한 ‘걸인’의 모습이 사람들의 기억에 너무나 강하게 박혀 있었기에, 눈을 뜨고 당당히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동일인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생소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주변에서 동일인 여부를 두고 논쟁을 벌일 정도였으나, 그는 단호하게 “내가 그다”라고 밝힌다. 이는 그가 단순히 시력만 회복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덧씌운 ‘거지’라는 낙인을 벗고 하나님이 회복시키신 새로운 정체성을 스스로 선포했음을 의미한다. 나눔 2 침으로 이긴 진흙을 눈에 바르고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때로 우리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거나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하는 일을 요구하십니다. 예상치 못한 명령에 순종함으로 예기치 못한 은혜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나눔 3 제자들은 이유를 찾아 헤맸지만, 예수님은 목적을 밝히시는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유를 찾느라 방황하기보다 하나님의 일이 시작될 현장이자 참 빛을 만날 시간으로 재정의해야 할 내 삶의 형편은 무엇입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제 인생의 풀리지 않는 고난과 어두움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기회로 삼으소서. 공동체 _ 서로 아픔에 대해 탓하기보다, 그 속에 채워질 하나님의 능력을 기다리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260222 속회지도자 자료 2026-02-18 신내교회 260222 속회지도자 자료.pdf 260222 속회지도자 자료.pdf 2월 넷째 주 그룹큐티나눔 양식을 주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6:1-15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즐겁게 안식할 날(찬송 43장, 구 57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자기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함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생명의 양식이 공급된 은혜의 사건입니다. 유월절 가까운 때에 광야에서 양식을 공급하신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유월절 어린양으로 드림으로써 인류에 영생의 양식을 공급하실 것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먹일 양식이 모자란 상황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시험하십니다(1-7절). 1)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신 시기는 어떤 절기가 가까운 때입니까?(3-4절) 유월절 3절의 ‘산에’(데 에이스 토 오로스)에 정관사 ‘토’가 사용된다. 그래서 직역하면 ‘그 산에, on the mountain’이다. ‘그 산’은 구약의 출애굽 시절 광야에 있는 ‘시내산’을 연상시킨다(참조. 출 19:20). 모세가 여호수아와 함께 시내산에 오르듯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랐다(참조. 출 24:12-13; 마 5:1).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른 때는 ‘유월절 가까운 때’다. ‘유월절’ 또한 출애굽 때에 어린양의 피를 통해 이스라엘 장자의 생명이 보전되는 걸 연상케 한다(참조. 출 12:1-14; 요 6:4, 53-57). 또한 이어질 오병이어 기적은 광야에서 먹은 만나를 연상시킨다(참조. 신 8:3, 16; 요 6:49-51). 이처럼 예수님이 유월절 가까운 때에, 산 위에 오르고, 말씀을 전하며, 오병이어 사건을 일으키신 이유는 출애굽 모티프를 바탕으로 구원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다. 2) 큰 무리가 자기에게 다가오자 예수님은 빌립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5절) “우리가 어디에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큰 무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세우려는 자들이다(요 6:15). 예수님은 이런 무리에 대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평가하신다(요 6:26). 예수님은 무리의 실제적 필요를 아셨지만 단지 그 필요만을 채우기 위해 표적을 행한 건 아니다. 표적은 예수가 생명의 양식을 나눠 줄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 주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5절에서 예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고 질문한 것은 무리를 먹일 책임을 제자들에게 전가하려는 게 아니라 무리의 ‘생명의 필요’를 진짜 채워 줄 자가 누구인지를 고민하게 하신 것이다. 3) 예수님이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신 말씀에 빌립은 뭐라고 대답합니까?(6-7절)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합니다.” 빌립은 지극히 이성적으로 대답했다. 무리에게 떡을 조금씩 나눠주더라도 200데나리온어치의 떡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200데나리온은 노동자 200일 품삯이다. 절대 적지 않은 액수다. 빌립은 이 많은 돈이 제자 공동체에 없으니, 무리의 ‘생명의 필요’도 책임질 수 없다는 거다. 지극히 평범하고 합리적인 대답이다. 예수님은 빌립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고 물어보신 게 아니라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하셨다. 즉 제자 공동체의 한계 상황에서 어떻게 ‘생명의 필요’를 채울 수 있을지를 도전하신 것이다. 나눔 1 예수님이 “이 큰 무리를 먹일 떡을 어디서 사겠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은 제자들의 믿음을 보시기 위함입니다. 빌립은 지극히 이성적인 대답을 내놓고 현실에 좌절합니다. 내 상식과 인식의 한계를 초월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2.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십니다(8-15절). 1) 안드레가 예수님 앞에 가져온 것은 무엇입니까?(8 -9절) 한 아이에게 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다. 그가 한 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예수께 나아왔다. 안드레가 오병이어를 예수께 드린 건 이것을 사용해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부탁하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터무니없는 도전을 비웃으며 우리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시위하려는 것이다. 2) 예수님은 건네받은 오병이어를 어떻게 하십니까?(10 -11절) 떡과 물고기를 들고 축사하신 후에 오천 명이 되는 무리에게 나눠 주어 먹게 하셨다. 오천 명은 여자와 아이가 계수되지 않은 숫자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먹여야 할 인원은 최소 만 명에서 만 오천 명 규모다. 오병이어는 기껏 5인 가족이 한 끼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작은 양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작은 도시락을 축사하고 오천 명에게 나눠 주신다. 누가 봐도 무모한 시도다. 하지만 주님은 무모해 보이는 일을 서슴지 않고 행하신다. 예수님은 초자연적 이적을 통해 참된 생명의 양식을 나눠 주실 이가 바로 예수 자신임을 보여 주려 하신 거다(요 6:35, 48). 3) 배부르게 먹고 생기가 돈 백성은 어떤 일을 시도합니까?(15절)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 무리는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 받자마자 곧바로 세속적인 본색을 드러낸다. 즉 무리는 예수님을 자기들의 양식의 필요를 채워 줄 도구로 활용하고 싶었다. 그래서 예수를 자신들의 왕으로 세우려 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의 세속적 요구를 뿌리치시고 다시 홀로 산으로 들어가신다. 예수께서 표적을 일으킨 것은 단지 인간의 육체적 필요만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영생을 선물하는 ‘생명의 떡’이라는 걸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끼 식사만을 위해 주님을 찾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주님을 찾는 궁극적 이유는 주님을 통해 하늘 백성이 되어 참된 영생을 누리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나눔 2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천 명을 먹일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라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도움을 구하는 경건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가정, 공동체, 사회의 결핍과 필요는 무엇입니까? 결핍과 필요를 주께 아뢰며 도움을 구합시다. 나눔 3 예수님은 물질적 결핍만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더 큰 영적 결핍인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문제 해결사로만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까? 내가 따르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절대 결핍과 한계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며 주의 긍휼을 구합니다. 공동체 _ 우리 필요를 채우는 일에 주님을 도구로 사용하려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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