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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1 선교회 모임
2026-06-17 20:49:08
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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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2 속회지도자 자료 2026-07-08 신내교회 260712 속회지도자 자료.pdf 7월 두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사람을 향하신 주님 시편 8:1-9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찬송 79장, 구 40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 봅시다. 웅장한 산맥과 광활한 평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 앞에서 우리는 종종 대자연의 장엄함에 압도당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토록 경이로운 우주 만물조차 하나님의 손끝에서 빚어진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저 광활한 우주와 창조주이신 당신 사이에 ‘인간’을 세워 두셨습니다. 시편 8편의 시인은 인간이 자연보다 존귀하며, ‘하나님보다 조금 못할 뿐’이라고 벅차게 노래합니다. 흙으로 지어진 유한한 우리가 어찌 창조주보다 단지 ‘조금’ 못한 존재일 수 있겠습니까? 시인이 진정 말하려 한 본질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시선이 그토록 특별하고 위대하다는 사실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하나님의 영광은 하늘을 뛰어넘습니다(1-3절). 1)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을 덮었다고 말합니까?(1절) 하늘 현대인이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은 성경이 고대인의 언어와 세계관을 통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 시편을 묵상할 때도 당대 세속적 가치관에 대항하는 시인의 신앙적 시선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대인들에게 ‘하늘’은 단순히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늘의 해와 달, 별 자체를 신(神)으로 숭배했으며, 그곳을 수많은 신이 거주하며 세상을 움직이는 신성한 처소로 여겼다. 이러한 다신론적이고 범신론적인 배경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위엄이 하늘을 덮었다”고 선포한다. 이는 이방인들이 신성시하던 하늘조차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음을 선언하는 파격적인 신앙 고백이다. 이처럼 시인은 당대의 가치관에 정면으로 맞서며, 온 우주의 진정한 통치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드러낸다. 2) 하나님은 대적들을 잠잠하게 하기 위해 누구의 입을 통해 권능을 세우십니까?(2절)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 고대 사회에서 신의 대리자는 항상 왕이나 제사장처럼 높은 계급과 강력한 힘을 가진 인물이었다. 신의 위엄을 드높일 자격이 있는 존재는 응당 사회적 정점에 있는 권력자일 때 신의 위엄이 더 높아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세상의 가치관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하나님은 화려한 권력을 쥔 이들이 아니라, 당시 가치관으로는 가장 힘없고 미약한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을 통해 자신의 권능을 세우시는 분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지위나 물리적인 힘에 기대지 않음을 보여 주는 파격적인 선포다. 세속적인 힘의 논리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 사이에는 이처럼 거대한 간격이 존재한다. 가장 천하게 여겨지던 자의 입술을 통해 대적들의 기세를 꺾으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진정한 권위다. 나눔 1 우리를 짓누르는 커다란 문제들도 광활한 밤하늘의 별들을 손가락으로 만드신 하나님께는 티끌 같을 뿐입니다. 요즘 나를 막막하게 만드는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크심을 묵상할 때, 그 문제가 어떻게 새롭게 해석되는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2. 하나님은 사람을 존귀하게 대하십니다(4-9절). 1) 시인은 인간을 어떤 말로 표현하며,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어떻게 대하십니까?(4절) 시인이 ‘사람’과 ‘인자’라고 표현한 인간을 하나님은 생각하고 돌보신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신화인 <에누마 엘리쉬>나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에 익숙했던 이들에게 자연은 그 자체로 신성한 존재였다. 신의 사체를 쪼개 세상을 만들었다는 신화적 관념은 자연 속에 신의 속성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그 안에서 인간은 만물보다 아래에 있는 비천한 존재이자 신들을 시중드는 도구로 여겨졌다. 그러나 시인의 선포는 당대의 가치관을 정면으로 뒤집는 가히 혁명적인 고백이다. 광활한 우주에 비해 인간이 비록 보잘것없는 ‘에노쉬’(사람)와 ‘벤 아담’(사람의 아들)에 불과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우주 만물보다 귀하게 여기시며 직접 생각하고 돌보신다.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만물을 다스리는 영광의 관을 씌우셨다는 시인의 노래는, 인간의 위상을 만물 위에 두시는 하나님의 파격적인 사랑을 고대 세계관의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드러낸다. 2) 하나님이 사람을 높이신 지위와 그에게 맡기신 것은 무엇입니까?(5-8절)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 또한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는 권한을 맡기셨다는 시인의 선포는 고대 세계의 종교적 근간을 뒤흔드는 놀라운 선언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해와 달, 별을 비롯한 대자연은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인 ‘신성한 실체’였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자연을 숭배의 자리가 아닌 인간의 다스림을 받는 자리로 옮겨 놓음으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뒤바꾼다. 3) 이 시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공통된 고백은 무엇입니까?(1, 9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인은 시의 처음과 끝을 동일한 찬양으로 장식하는 ‘수미상관’ 방식을 통해, 온 땅에 가득한 여호와의 이름이 지닌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고대 세계의 사람들은 자연을 무수한 신들의 각축장으로 인식했다. 그들에게 신은 변덕스럽고 폭력적인 존재였기에, 인간은 신들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끊임없이 제사를 바쳐야 하는 나약하고 피동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인이 노래하는 하나님의 통치는 이러한 비극적 세계관을 완전히 뒤바꾼다. 하나님은 인간을 억압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영광을 부여하시며 온 세상을 당신의 자비와 위엄으로 채우시는 분이다. 시인은 이 고백을 시의 입구와 출구에 배치함으로써, 신앙의 여정은 결국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발견하는 데서 출발하여 그분의 위대함을 확증하는 찬양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아름답게 보여 준다. 나눔 2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질 때, ‘하나님이 나를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되었던 적은 언제입니까? 나의 가치를 세상의 평가가 아닌 하나님의 시선에서 찾기로 결심한 지점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나눔 3 우리가 머무는 곳을 선하게 가꿀 때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집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작은 세상(가정, 일터, 소그룹)은 어디입니까? 그곳에서 하나님의 따뜻함과 공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이번 주 내가 책임감을 가지고 실천할 구체적인 행동은 무엇입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광활한 세상에서 먼지 같은 저를 기억하고 돌보시는 주님의 은혜를 오늘도 찬양합니다. 공동체 _ 우리에게 맡겨 주신 세상과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60705 속회지도자 자료 2026-07-04 신내교회 260705 속회지도자 자료.pdf 7월 첫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주께로 향하는 길 시편 1:1-6 높이가 무려 100미터에 달하는 캘리포니아의 레드우드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나무 중 하나입니다. 놀라운 점은 이 거목의 뿌리가 생각보다 아주 얕게 퍼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 나무는 수천 년의 거센 폭풍우를 견디며 거대한 몸집을 지탱해 온 것일까요? 그 비결은 바로 ‘연대’에 있습니다. 레드우드는 홀로 깊이 뿌리내리는 대신, 뿌리를 옆으로 넓게 뻗어 이웃한 나무들의 뿌리와 단단히 하나로 얽힙니다. 모진 비바람이 몰아쳐도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 주기에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의인의 공동체가 그토록 복되고 강인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복 있는 사람은 죄인과 연대하지 않습니다(1-2절). 1) 복 있는 사람이 하지 않는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1절)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시편 1:1은 복 있는 사람이 멀리해야 할 행동을 ‘걷다’(따르다), ‘서다’, ‘앉다’라는 점진적인 동사 변화를 통해 묘사한다. 이는 죄가 인간의 삶에 어떻게 은밀히 침투하여 견고하게 뿌리 내리는지를 탁월하게 보여 준다. 처음에는 단순히 악인의 ‘꾀’(생각)를 수용하며 함께 걷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그들의 ‘길’에 익숙해져 멈추어 서게 되고, 결국에는 오만함이라는 ‘자리’에 깊이 정착하게 된다는 경고다. 시인은 죄가 일회적인 유혹을 넘어 하나의 삶의 양식으로 고착되는 치명적인 과정을 날카롭게 통찰한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복은 죄의 영향력이 습관으로 굳어지기 전에 그 연결고리를 단호히 끊어 내는 거룩한 구별됨에서 시작한다. 2) 복 있는 사람이 즐겨 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2절)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 시인이 노래하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은 곧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과 같은 신앙적 태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주야’(晝夜)는 흔히 ‘항상’이라는 시간적 연속성으로 이해하지만, 이를 ‘밝은 낮’과 ‘어두운 밤’이라는 인생의 계절적 대조로 바라보면 그 의미가 더욱 풍성해진다. 지구가 자전하며 낮과 밤이 반복되듯, 우리 인생에도 기쁨이 충만한 시간과 고통스러운 시련의 시간이 교차하기 마련이다. 흔히 평탄한 낮의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기 좋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에 가장 깊이 새겨지는 계기는 칠흑 같은 ‘밤의 시간’이다. 삶의 가장 힘겨운 순간에도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갈망하며 말씀을 붙드는 사람이야말로, 환경에 매이지 않는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나눔 1 나를 무너뜨리는 것은 멀리 떼어놓아야 하고,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곁에 두려 애써야 합니다. 요즘 나의 하루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이나 ‘물건’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은 다릅니다(3-6절). 1) 시인은 의인을 무엇에 비유합니까?(3절) 시냇가에 심은 나무 팔레스타인은 강수량이 적어 물이 매우 귀한 지역이다. 이스라엘 문화에서 우기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하나님의 전적인 공급을 상징했다면, 사람이 직접 판 ‘웅덩이’는 한계가 있는 인간의 수고를 의미한다. 시인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마르지 않는 ‘시냇가’로 묘사했다. 따라서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가뭄과 같은 환경 변화에 휘둘리지 않는다. 생명의 근원인 물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시절을 좇아 자연스럽게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생명력을 유지한다. 결국 의인의 형통이란 내 능력이 아니라, 생명수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온전히 연결되어 있을 때 완성되는 것이다. 2) 악인은 무엇에 비유됩니까?(4절) 바람에 나는 겨 시인은 악인의 본질을 ‘바람에 나는 겨’로 묘사한다. 고대 농경 문화에서 키질을 통해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 내는 풍경은 누구나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이 표현은 청중에게 악인의 운명을 직관적인 시각적 이미지로 전달한다. 겨는 거창한 폭풍이 아니라 키질로 발생하는 아주 작은 바람에도 속절없이 흩어지는 ‘존재의 가벼움’을 상징한다. 시인은 이 비유를 통해 세상에서 제아무리 강하고 견고한 권세를 가진 악인이라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라는 바람 앞에서는 힘없이 날아갈 수밖에 없는 허무하고 무가치한 존재임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겉모습은 화려할지 모르나 생명의 알맹이가 없는 악인의 실체를 꼬집는 탁월한 비유다. 3) 악인이 참여하지 못하는 곳은 어디입니까?(5절) 의인들의 모임 시인은 앞서 제시한 비유들을 하나로 연결하며 심판의 필연성을 강조한다.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하나님의 말씀(율법)에서 생명수를 충분히 공급받아 영적인 무게감을 지닌 존재다. 반면, 악인은 말씀과 무관하게 살아가기에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흩어지는 겨와 같이 가볍기 그지없다. 세상 속에서는 의인과 악인이 뒤섞여 살아가는 듯 보이나,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심판의 바람 앞에서는 오직 은혜의 수분을 머금어 견고해진 의인들만이 흔들리지 않고 서 있게 된다. 악인이 의인의 모임에 끝내 참여하지 못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들은 세상의 자원은 풍족히 누렸을지언정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영적인 물은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메마르고 가벼운 영혼은 결국 심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흩어지고 만다. 나눔 2 요즘 내 마음을 흔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유행이나 눈앞의 이익 앞에서 ‘바람에 나는 겨’처럼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는지, 아니면 말씀에 깊이 뿌리내린 견고한 ‘나무’처럼 든든히 서 있는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정직하게 나눠 봅시다. 나눔 3 의인은 홀로 서 있는 외로운 나무가 아닙니다. 시냇가에 심겨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의인들의 모임’(5절)에 속한 자입니다. 우리가 메마르지 않는 ‘생명의 시냇가’가 되기 위해, 이번 주 지체들에게 건넬 수 있는 따뜻한 격려나 구체적인 섬김이 있다면 함께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말씀을 묵상함으로 말씀의 시냇가에 뿌리내리게 하소서. 공동체 _ 우리 공동체가 서로의 뿌리를 든든히 붙들어 주는 연대의 장이 되게 하소서. 260628 속회지도자 자료 2026-06-24 신내교회 260628 속회지도자 자료.pdf 6월 네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부활의 열매 고린도전서 15:20-34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나의 영원하신 기업(찬송 435장, 구 492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세상은 우리에게 “인생은 한 번뿐이니 후회 없이 즐겨라” 하고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남들 다 즐기는 것을 참으며 굳이 손해 볼 필요가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회의감이 들기도 합니다. 만약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우리가 주님을 위해 흘린 눈물과 이름 없는 헌신은 그저 헛된 낭비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과 최후 심판이 있기에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결말’은 우리 ‘현재’를 전혀 다르게 규정합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부활하신 예수님이 고난받는 성도에게 새 소망을 주십니다(20-28절). 1)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잠자는 자들’에게 어떤 존재가 되셨습니까?(20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기독교는 예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 위에 세워졌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초대 공동체의 신념과 결단으로 발생한 사상에 불과하다면 바울의 말대로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은 헛될 뿐이다(15:14, 17). 하지만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예수가 역사적으로 부활하였음을 확증하여 선포한다(15:1-8, 20).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부활하시고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여기 ‘잠자는 자들’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에 놓인 자들이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 사건으로 ‘잠자는 자들’이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나라로 옮겨질 수 있게 되었다. 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21-22절)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부활할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인류가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권세 아래 있을지라도 예수를 믿는 자들은 이미 예수 부활에 동참하여 영생의 맛을 조금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 장차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이들은 예수의 ‘영광의 몸’의 형체처럼 온전한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이다(빌 3:21). 중요한 건 현재 예수를 믿고 부활에 동참한 자가 미래 예수의 재림 때에도 부활의 몸을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첫 사람 아담의 죄로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렀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를 통해 영생이 주어졌다. 3) 맨 나중에 멸망 받을 궁극적인 원수는 무엇입니까? (26절) 사망 바울은 ‘사망’을 인격화하여 예수가 물리쳐야 할 ‘최후의 원수’로 규정한다. 예수 부활의 목적이 사탄의 최종 병기 ‘사망의 권세’를 깨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세상은 생명과 안식의 나라였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은 결과 이 땅은 죄와 사망의 나라로 전락했다.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가 사탄의 권세가 왕 노릇하는 비정상적인 세상으로 변질된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이유는 바로 이 비뚤어지고 왜곡된 세상을 생명과 안식의 나라로 정상 회복하기 위해서다. 나눔 1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그분을 믿는 우리도 반드시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부활하게 된다는 보증입니다. 부활 소망이 현재 내 삶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나눠 봅시다. 2.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선한 일을 위해 고난받을 이유가 없습니다(29-34절). 1) 부활 소망을 품은 바울이 매일 다지는 삶의 각오는 무엇입니까?(31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한다. 이는 바울이 날마다 사선을 넘나드는 듯한 위험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는 걸 말한다. 바울의 이 선언은 그의 사역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 사역인지를 방증한다. 바울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했음을 간증하고 있다. 바울은 날마다 순교의 각오를 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역했다. 바울에게 부활 신앙이 없었다면 결코 이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삶의 동력은 바로 부활 신앙이다. 2)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살겠다고 말합니까? (32절)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면서 현재의 안락과 쾌락을 추구하겠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고 한다(32a절). 이 맹수가 진짜 원형 경기장의 맹수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바울은 기독교인을 박해하며 핍박한 적대자들을 가리켜 맹수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어쨌든 바울은 에베소에서 거의 죽음에 이르는 극심한 환난을 겪었다. 그런데 바울이 반문한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나의 이런 고생이 무슨 의미가 있나?” “만일 부활이 없다면 차라리 오늘 먹고 마시고 편하게 사는 게 더 낫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바울은 부활 소망이 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역했다. 3) 부활을 기다리는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33-34절) 부활을 부정하며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악한 동무들’에게 속지 말고,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 바울은 ‘악한 동무들이 선한 행실을 타락시킨다’라는 메난더(Menander)의 희극 타이스(Thais)의 격언을 인용하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권면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이미 부활하여 구원의 완성을 누린다’고 말하면서 정작 미래의 부활은 부인하는 자들을 강력하게 규탄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헛된 신앙을 가진 자들을 경계하며 오직 바른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권면한다. 나눔 2 부활이 없다면 오늘을 즐기는 삶이 최선이지만, 부활이 있기에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부활 소망 때문에 견뎌야 할 고난은 무엇입니까? 나눔 3 나의 신앙을 무디게 하고 죄로 유혹하는 ‘악한 동무’는 무엇입니까? 장차 부활하여 주님을 대면할 자로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내가 멀리해야 할 나쁜 습관이나 가까이해야 할 거룩한 습관은 무엇입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부활의 소망을 갖고 죄의 유혹을 담대히 이기게 하소서. 공동체 _ 세상의 죄와 사망의 문화에 물들지 않고 선한 일을 추구하게 하소서. 260621 선교회 모임 2026-06-17 신내교회 6월_선교회_모임_자료 (1).pdf 260614 속회지도자 자료 2026-06-09 신내교회 260614 속회지도자 자료.pdf 6월 두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성령의 전 고린도전서 6:12-20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찬송 8장, 구 9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기에, 사람은 어떤 일이든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선택은 자신은 물론, 공동체 전체를 병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의 자유가 말씀의 울타리 안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말씀의 빛 아래 있을 때 가장 빛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도가 자기 몸을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도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이기 때문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자유는 유익함을 위해 있고 몸은 주님을 위해 있습니다(12-14절). 1)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라는 주장에 대해, 바울은 무엇이라고 응답합니까?(12절) “다 유익한 것이 아니며, 나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겠다.” ‘내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말은 당시 고린도 지역 사람들의 구호였다. 그들은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으며 살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이들의 주장을 일부 인정한다. 성도는 죄와 사망의 권세, 율법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은 이것이 곧 방종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한다. 사람에게 자유가 있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모든 행위가 다 유익한 건 아니다. 즉 성도가 자유를 부르짖으며 무책임하게 타인 또는 공동체의 생명과 자유를 침해한다면 그건 자유가 아니라 범죄다. 진정한 자유는 자기뿐 아니라 교회의 지체에도 유익이 되어야 한다. 자유롭게 행한다고 하면서 방종한 삶을 사는 것은 오히려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기 권리를 통제할 줄 아는 것이다. 2) 몸을 욕구 충족의 도구로 여기는 사고방식에 반대하는 바울의 해석은 무엇입니까?(13절)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신다.”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다’는 말 역시도 당시 고린도 사람들의 대표적인 구호였다. 당시 헬라의 영육 이원론 사상에 의하면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 그래서 배에 어떤 음식을 채우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상은 단지 배의 음식 문제만이 아니라 몸의 성적인 문제로도 확장된다. 어차피 육체는 물질이기에 문란하게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사상에 대해 ‘몸은 음란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주를 위해 있으며, 주도 몸을 위해 있다’라고 반박한다. 특히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주를 위해 자기 몸을 써야 한다(참조. 롬 6:12-14; 갈 2:20). 나눔 1 성경은 ‘몸’을 자기 욕심이나 즐거움을 위해 함부로 쓰지 말고 공동체와 주님을 위해 제한하라고 가르칩니다. 주님과의 깊은 교제나 주님의 명예를 위해, 혹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내 몸(의 일)을 어떻게 절제할지 나눠 봅시다. 2.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자 성령의 전입니다(15-20절). 1) 우리 몸을 음란한 목적으로 사용하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15-17절) 음행은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의 몸을 죄와 정욕의 지체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선언하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교회)의 지체들이라고 한다(참조. 고전 12:27).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연합한 자들이며, 예수와 함께 살아야 할 존재들이다(참조. 롬 6:3-11). 마치 신랑과 신부가 하나가 되듯이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로 연합되어 살아가야 할 존재들이다(참조. 엡 5:23).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인이 그의 몸을 창기와 합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한 몸’(연합) 됨을 깨는 행위다. 음행은 단지 육체적인 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를 내는 심각한 영적인 범죄다. 2) ‘음행’이 다른 죄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무엇입니까?(18절) 다른 죄는 몸 밖에 있지만,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음행을 피하라’(헬, 퓨게테 뗀 포르네이안)를 직역하면, ‘음행으로부터 도망치라’이다. 이것은 음행을 저지를 만한 어떤 환경도 만들지 말라는 거다. 음행과 우상숭배의 유혹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정도 유혹은 견딜 수 있다’고 교만을 떨며 음행의 자리를 전전해서는 안 된다. 아예 음행을 저지를 환경 자체를 조성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철저히 음행을 피해야 하는 이유는 음행의 죄가 다른 죄와 달리 그 사람의 몸에 부정을 각인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몸은 주께 속하고 주를 위해 써야 할 몸이다. 그런데 그 몸을 창기와 연합시키면 그 사람은 자기 몸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상태로는 주님과 연합할 수 없다. 음행은 단지 부적절한 육체관계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심각한 영적인 죄다. 3) 우리 몸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19-20절) 우리의 몸(성도, 교회)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며, 값이 지불된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다(참조. 요 1:14; 2:19-21). 바울은 예수님의 이 성전론을 이어받아 건물이 아닌 예수님과 연합된 교회가 성전이라고 선언한다(참조. 엡 2:20-22). 본문 19절에서도 ‘너희 몸’은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라고 한다. 바울은 교회가 성전이며, 그리스도인 각자의 몸이 또한 성전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음란한 행동으로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을 부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또한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산 존재이기에(구속받은 자) 더 이상 사탄(죄)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나눔 2 그리스도의 지체답게 살지 못하도록 나를 유혹하는 환경은 무엇입니까? 그 유혹을 ‘피하기’(18절) 위해 오늘 내가 실천할 일은 무엇입니까? 나눔 3 단순히 나쁜 일을 피하는 수준을 넘어, 하나님의 소유인 나와 우리 공동체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일은 무엇일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정욕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게 하소서. 공동체 _ 우리 개인과 공동체가 성령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전이 되게 하소서. 260607 속회지도자 자료 2026-06-04 신내교회 260607 속회지도자 자료.pdf 6월 첫번째 주 그룹큐티나눔 지혜로운 건축자 고린도전서 3:1-15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내 주의 나라와(찬송 208장, 구 246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갓난아기가 엄마 젖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젖 뗄 나이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모유만 찾는다면, 그 아이는 제대로 성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인 지 꽤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미성숙한 삶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이 분파를 형성하여 서로 다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린도 교회를 향해 바울은 ‘그날’에 불의 시험이 있을 거라고 경고합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영적 미성숙을 지적합니다(1-9절). 1) 바울이 고린도 성도를 ‘육신에 속한 자’라고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3-4절) 고린도 성도가 분파를 만들어 서로 시기하고 분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도를 ‘신령한 자’(1절, spiritual people)와 ‘육신에 속한 자’(1절, people of the flesh)로 나눈다. ‘신령한 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 사람을 의미하고,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을 의미한다. 육신에 속한 자는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분파(바울, 베드로, 아볼로)를 만들며 분쟁하는 미성숙한 성도를 의미한다. 2) 바울과 아볼로의 수고도 있지만, 결국 교회를 성장시킨 분은 누구입니까?(6-7절) 하나님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능력과 은사는 ‘통치의 수단’이 아니라 ‘섬김의 수단’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 아볼로, 베드로의 은사와 능력을 차별화하면서 각기 자기 우두머리로 삼고 추앙했다. 바울과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를 위해 수고한 건 사실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선포했으며, 아볼로는 바울의 뒤를 이어 성도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했다. 하지만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역의 도구였을 뿐 교회를 궁극적으로 성장시킨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교회는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성장한다. 3) 바울과 아볼로가 지닌 공통된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9절) 하나님의 동역자 ‘바울과 아볼로’(9절,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헬, 쉬네르고이)이다. ‘쉬네르고스’(동역자)는 동일한 일을 하는 일꾼, 사역자를 의미한다. 즉 바울과 아볼로의 직분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같은 일을 하는 동역자들이다. 5절에서는 이를 ‘사역자들’(헬, 디아코노이)이라고 표현한다. ‘디아코노이’(사 역자들)는 요한복음 2:9에서는 ‘하인들’로, 요한복음 12:26에서는 ‘섬기는 자’로, 디모데전서 3:8에서는 ‘집사들’로 쓰인다. 헬라어 ‘디아코니아’는 원래 ‘식탁에서 시중들기’란 의미를 담고 있다. 바울은 교회 안의 다양한 직분을 지칭할 때, 당시 로마의 높은 관직명을 쓰지 않고, ‘디아코니아’로 통일하여 부른다(참조. 고전 12:5). 즉 바울과 아볼로 모두 교회 안에서는 ‘섬김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였다. 나눔 1 바울은 교회 성도를 향해 사람을 중심으로 파벌을 만들지 말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몸이 되라고 말합니다. 혹시 우리 공동체에 분열과 갈등은 없는지 돌아보고,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 무엇에 힘써야 할지 이야기해 봅시다. 나눔 2 교회에서 봉사하거나,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나를 다른 성도와 비교하거나 경쟁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경쟁자가 아닌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각자의 사명을 격려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이야기해 봅시다. 2. 바울은 사역자의 ‘공적’이 평가받을 날에 대해 말합니다(10-15절). 1) 바울은 어떤 터(토대) 위에 교회 공동체를 세웠습니까?(10-11절) 예수 그리스도 바울이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어 교회의 ‘터’(기초)를 잘 세웠지만(10절), 이 ‘터’는 바울의 ‘사상과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다. 바울이나 그 어떤 사역자도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없다. 복음 사역자들은 오직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의 ‘터’(기초) 위에 교회를 세우며 섬기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예수 외에 그 어떤 사람이 교회의 기초가 되어서도 안 되고, 또한 복음이 아닌 그 어떤 사상이나 지혜, 가르침(율법), 공적이 교회의 터가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의 유일한 기초는 그리스도 예수다. 2) ‘그날’이 이르면 하나님 나라 사역자들의 ‘공적’은 어떻게 평가받습니까?(12-15절) 그날에 모든 사역자의 공적이 불의 시험을 받을 것이다.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을 것이다. ‘그날’(최후의 심판 날)에 복음 사역자들은 그들의 공적에 따라 평가받을 것이다. 복음 사역자들이 만일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듯이 거짓되고 불성실하게 사역하면 그 공적이 다 불타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단단한 금이나 보석처럼 성실하고 바르게 사역하면 그 사람의 공적은 불의 시험에도 남게 될 것이다. 불충하게 사역한 자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 받은 것 같다’(헬, 후토스 데 호스 디아 퓌로스)라는 관용구는 마치 ‘불을 통과한 자 같이’ 간신히 구원을 받는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은 부끄러운 구원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가 주님을 믿음으로써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긴 하지만 그가 맡은 하나님 나라 사역은 전혀 빛을 내지 못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면 불에 타지 않는 공적으로 인정받은 사람이 받는 상은 무엇인가? 이것은 구원 외에 또 다른 부가적 상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충성스럽게 수고한 모든 일이 심판 날에 이르기까지 인정되며 찬란하게 빛나는 것 자체가 그에게 큰 영광이며 상이라는 의미다. 나눔 3 지혜로운 건축자는 자기 의로움이나 열정으로 교회를 건축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기초 위에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태도로 공동체를 건축합니다. 무엇을 기초로, 어떤 동기로, 어떤 수단으로, 어떤 목적을 위해 교회에서 봉사할지 나의 결심을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날마다 순전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주의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공동체 _ 분열과 다툼이 아닌 존중과 배려로 공동체를 건강히 세우게 하소서. 260531 속회지도자 자료 2026-05-27 신내교회 260531 속회지도자 자료.pdf 5월 다섯째 주 그룹큐티나눔 아버지의 마지막 노래 창세기 49:16-28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복의 근원 강림하사(찬송 28장, 구 28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유리마다 빛깔과 모양이 제각각이지만, 한데 모으면 경이로운 작품이 탄생합니다. 오래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꼭 그렇습니다. 멀리서는 하나의 성스러운 그림이나, 가까이서 보면 서로 다른 조각이 복잡하게 이어져 있을 뿐입니다. 야곱은 이처럼 제각각 다른 아들들의 삶을 두고 노래합니다. 단순한 과거의 회상을 넘어, 그들의 미래에 하나님의 빛이 통과할 때 어떤 영광이 드러날지를 미리 보여 주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야곱이 자녀들을 축복합니다(16-21절). 1) 야곱은 심판자가 될 ‘단’을 무엇과 같다고 합니까?(17절) 길섶의 뱀, 샛길의 독사 야곱은 이름의 발음이 유사한 ‘단’과 ‘심판’(딘)을 연결하여 언어유희로 노래한다. 야곱은 단을 길섶에 숨은 뱀이나 샛길의 독사에 비유하는데, 이는 단 지파가 압도적인 규모의 군사력은 아닐지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적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는 기습적 용맹함과 지략을 가졌음을 뜻한다. 말의 뒷굽을 물어 기마병을 거꾸러뜨리는 독사의 모습은 훗날 단 지파 출신인 삼손이 보여 준 놀라운 힘을 연상시킨다. 똬리를 틀고 기회를 엿보다 적을 무너뜨리는 단 지파의 기질은 작지만 결코 얕볼 수 없는 날카로운 공격성과 통찰력을 상징한다. 2) ‘갓’은 적들에게 쫓길 때 도리어 어떻게 합니까?(19절) 도리어 그(군대) 뒤를 추격할 것이다. 갓 지파에 대한 야곱의 예언은 훗날 이들이 처하게 될 지정학적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갓 지파는 요단 동편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아 일찍 정착했으나, 지리적 특성상 암몬이나 모압 같은 이방 민족의 끊임없는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전쟁이 일상이 된 환경 속에서 때로는 적의 공격에 밀리거나 후퇴해야 하는 고달픈 상황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야곱은 갓이 단순히 쫓기는 자로 남지 않을 것임을 선포한다.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할 것이라”는 외침은 위기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전세를 역전시켜 끝내 승리하는 갓 지파의 강인한 용맹함과 회복력을 상징한다. 이는 고난에 함몰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적의 배후를 치는 반격의 역사를 예고하는 축복이다. 나눔 1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큰 문제(사람, 환경, 내면의 약점 등) 앞에서, 단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길을 찾아내거나, 혹은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끝까지 견뎌내어 결국 승리한 경험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2. 야곱은 아들마다 알맞은 복을 빕니다(22-28절). 1) 야곱은 요셉을 무엇에 비유합니까?(22절) 샘 곁의 무성한 가지 야곱은 유다와 더불어 요셉을 축복의 핵심 인물로 비중 있게 다룬다. 흉년의 위기 속에서 온 가족을 보호한 요셉의 공로를 생각하면 이러한 강조는 지극히 당연하다. 요셉이 샘 곁에 뿌리를 두고 그 가지가 담을 넘을 정도로 번영할 것이라는 예언은, 훗날 북이스라엘의 주역이 될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거대한 성장을 암시한다. 또한 이 노래는 요셉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의 굴곡을 그대로 투영한다. 인생의 도처에서 나타난 대적들이 그를 향해 증오의 활을 쏘아 대며 학대했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고 견고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팔에 힘을 주시고 늘 동행하셨기 때문이다. 창세기 39장과 41장이 거듭 강조하듯, 요셉이 거둔 승리와 무성함은 끊이지 않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그 존재의 뿌리를 깊이 박은 결과다. 2) 요셉의 팔이 힘을 얻은 비결은 무엇입니까?(24절)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하나님)의 손을 힘입기 때문이다. 야곱은 요셉의 팔이 그 어떤 학대와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비결이 바로 하나님의 손을 힘입었기 때문이라고 선포한다. 요셉의 인생 행로를 보면 수많은 대적자가 그를 향해 활을 쏘며 괴롭혔지만, 정작 그의 활은 더욱 견고해졌고 팔은 힘을 얻었다. 이는 요셉 개인의 뛰어남보다 ‘야곱의 전능자’이자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하나님의 권능이 그를 붙들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성경의 서사 속에서 하나님의 손은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요셉이 처한 모든 위기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셨다’는 말로 묘사된다. 아무리 세상의 대적자가 강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이길 존재는 없다. 결국 야곱은 요셉을 향해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 곧 ‘하나님의 전능하신 보호와 중단 없는 동행’을 노래하고 있다. 3) 야곱은 무엇을 바탕으로 복을 빌었습니까?(28절)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했다. 야곱이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했다는 표현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각 자녀가 살아온 삶의 궤적과 그들의 고유한 성품, 그리고 앞으로 그들이 형성할 지파가 마주하게 될 구체적인 현실을 깊이 통찰한 결과다. 야곱은 아버지로서 자녀들의 장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감당해야 할 고유한 사명에 맞추어 예언적 격려를 전한 것이다. 결국 이 축복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허락하신 은사의 분량과 그릇의 크기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선의 삶을 일구어 가도록 응원하는 사랑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어떤 예언은 그들의 허물을 지적하며 엄중하게 들릴지라도, 그 바탕에는 자손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바르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 나눔 2 요셉은 모진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을 꼭 붙잡고 어떤 역경도 뛰어넘는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높은 담장과 같은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넘기 위해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면 이야기해 봅시다. 나눔 3 야곱의 아들들은 각기 다른 축복을 받았지만, 그 복들은 모두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세우는 데 꼭 필요한 조각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활용해 구체적으로 실천해 보고 싶은 ‘나다운 섬김’이 있다면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내 모습 그대로 주께 뿌리를 내리게 해 주소서. 공동체 _ 각자 고유한 빛깔로 하나 되어 주님의 영광을 가득 채우는 교회 되게 하소서. 260524 속회지도자 자료 2026-05-20 신내교회 260524 속회지도자 자료.pdf 5월 넷째 주 그룹큐티나눔 하나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창세기 45:1-15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나의 갈 길 다 가도록(찬송 384장, 구 434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2006년 10월, 평화롭던 아미쉬 마을 학교에 한 괴한이 침입해 총기를 난사했습니다. 범인은 아무 원한도 없는 소녀 5명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곧장 범인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복수가 아니라, 두려움에 떨고 있을 범인의 아내와 아이들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당신들 역시 우리처럼 소중한 가족을 잃은 피해자일 뿐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마침내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1-8절). 1) 요셉이 정체를 드러낸 순간 형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3절) 놀라서 대답하지 못했다. 야곱의 아들들은 흉년으로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왔다가 정탐꾼으로 몰리는 등 큰 곤경에 처한다. 시므온이 인질로 잡히고 막내 베냐민까지 은잔 사건에 휘말리자, 형제들은 아버지를 위해 베냐민을 살려달라며 간곡히 애원한다. 이 진심 어린 호소에 감정이 격해진 요셉은 마침내 자신이 요셉임을 밝힌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생이 대제국의 총리가 되어 눈앞에 서 있는 현실에 형들은 충격으로 얼어붙는다. 과거 자신들이 은 이십 세겔에 팔아넘겼던 요셉이 자신들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은 형들의 상상을 완전히 초월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극심한 당혹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서 있을 뿐이다. 이 정적은 인간의 악행을 선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2) 요셉은 누가 자신을 애굽으로 보냈다고 고백합니까? (5, 7-8절) 하나님 요셉은 경악하여 아무 말도 못 하는 형제들에게 사건의 내막을 차분히 설명한다. 그는 자신을 판 일로 자책하거나 괴로워하지 말라며 형들을 안심시키고, 이 모든 과정이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이었음을 강조한다. 노예 생활과 억울한 옥살이를 거친 13년의 세월은 요셉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시련의 주체를 ‘형들’이나 ‘보디발의 아내’가 아닌 ‘하나님’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과의 약속을 잊었을 때조차 원망 대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지혜를 배운 것이다. 아들 므낫세를 낳으며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되었기에, 형제들을 향한 그의 고백은 이제 원망 없는 진실이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악행조차 선한 결과로 바꾸어 놓으신다. 요셉의 영성이 고난을 통해 성숙해졌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가문의 극적인 재회와 화해를 허락하셨다. 나눔 1 누군가 나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사람이 밉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그 아픈 일조차 나를 훈련하시고 다른 누군가를 돕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2. 요셉은 형제들의 가족을 초청합니다(9-15절). 1) 요셉은 가족에게 무엇을 약속합니까?(11절)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아직 다섯 해나 남은 극심한 흉년을 언급하며 애굽으로 이주할 것을 권유한다. 이 제안은 단순히 거처를 옮기는 차원을 넘어, 온 가족의 생계를 자신이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강력한 약속이다. 여기서 요셉이 언급한 보호의 대상에는 자신을 상인에게 팔아넘겼던 형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요셉의 파격적인 호의 앞에 형들은 본능적인 의심과 어리둥절함을 느꼈을 것이다. ‘나중에 우리를 보복하려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이나 앞으로의 흉년에 대한 불신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형제들이 요셉의 진심을 믿지 못하는 것은 요셉의 태도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지금까지 아버지를 속이며 거짓되게 살아온 방식이 타인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누군가를 신뢰하지 못하는 형제들의 불안은, 그들 스스로가 정직하지 못한 삶을 살아왔음을 보여 주는 내면의 투영이다. 2) 요셉은 자신의 약속을 믿을 수 있도록 형들에게 무슨 말을 덧붙입니까?(12절)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요셉이 ‘내 입’이 직접 말하고 있음을 강조한 것은 두 가지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언어적 확신이다. 요셉은 그동안 통역관을 사이에 두고 형들과 대화했으나(창 42:23), 모든 시종을 물러나게 한 뒤(45:1) 그들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로 직접 말을 건넸다. 이집트 최고의 권력자가 자신들의 언어로 소통하는 것을 직접 보고 듣는 순간, 형들은 그가 진짜 요셉임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둘째는 관계의 진실성이다. 요셉은 이제 통치자로서의 가면을 벗고 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려 한다. 그동안 아버지를 속이며 거짓에 익숙한 삶을 살았던 형제들에게 요셉은 자신의 말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정직함을 호소한다. 즉, “내 입이 말한다”는 선언은 지금 형들이 듣고 있는 이 파격적인 약속이 어떠한 정치적 계산이나 속임수도 없는 요셉 자신의 인격에서 나온 진실임을 증명하려는 강력한 다짐이라 할 수 있다. 3) 형들이 비로소 요셉과 대화하기 시작한 때는 언제입니까?(15절) 요셉이 형들과 입 맞추며 안고 울었을 때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던 형들이 요셉과 대화를 시작한 것은, 요셉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가족 부양에 대한 진심을 전하며 설득한 이후다. 요셉은 형들을 안심시킨 뒤 한 사람씩 입을 맞추며 안고 울었다. 이때의 입맞춤은 단순한 형식적 인사가 아니라, 오랜 세월 억눌려 있던 죄책감과 원망을 녹여 내고 새로운 관계를 열어 가는 화해의 징표다. 이는 어긋나고 삐뚤어졌던 형제들의 마음을 회복시키는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형들은 이 뜨거운 눈물과 포옹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들처럼 누군가를 속이는 것은 아니며 진실한 용서가 실제로 존재함을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서로의 입맞춤으로 얼어붙었던 형들의 입이 열리고 진정한 소통이 시작되었다. 나눔 2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은 흉년 동안 그들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절연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처럼 그의 형편을 살피거나 진심으로 잘되기를 바란 적이 있습니까? 나눔 3 두려움에 떨던 형들은 요셉이 먼저 다가갔을 때 비로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오해나 갈등으로 오랜 기간 침묵하던 관계가 누군가 먼저 건넨 사과나 진심 어린 행동으로 풀린 경험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는 지혜를 주소서. 공동체 _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안고 거짓 없는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260517 선교회 모임 자료 2026-05-14 신내교회 5월_선교회_모임_자료.pdf 260510 속회지도자 자료 2026-05-06 신내교회 260510 속회지도자 자료.pdf 5월 둘째 주 그룹큐티나눔 피로 적신 채색옷 창세기 37:18-36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주 안에 있는 나에게(찬송 370장, 구 455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태피스트리는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면서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그 뒷면에는 매듭과 실오라기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습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선 현실도 꼭 태피스트리의 뒷면 같을 때가 있습니다. 수많은 갈등과 사건이 무질서하게 꼬여 있어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을 엮어 가시는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시간이 지나 시선을 달리할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매듭이 필연적이었던 하나님의 작품을 마주하게 됩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시기심에 사로잡힌 형들은 동생을 죽이려는 무서운 음모를 꾸밉니다(18-24절). 1) 저 멀리서 요셉이 다가오는 것을 본 형들은 어떤 계획을 세웁니까?(20절) 요셉을 죽여 구덩이에 던지고 짐승에게 잡아먹힌 것처럼 꾸민 다음,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했다. 멀리서 다가오는 요셉을 본 형들은 그동안 품어 온 증오를 실행에 옮기기로 결의한다. 이들의 모의는 단순히 우발적인 감정이 아니라 살해와 시체 은폐, 그리고 거짓 보고까지 포함된 매우 치밀한 계획이었다. 형들은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에 대한 질투를 넘어, 그가 꾼 꿈이 자신들을 조롱한다고 믿으며 분노를 키웠다. 결국 그들이 제거하고자 했던 핵심은 요셉이라는 개인을 넘어 그가 가진 ‘꿈’ 그 자체였다.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는 조롱 섞인 말은 그 꿈을 비웃고 짓밟으려는 일그러진 시선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이들의 악랄한 음모는 아이러니하게도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가동하는 결정적인 출발점이 된다. 인간은 폭력으로 꿈을 죽이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 악행조차 꿈을 이루는 통로로 사용하신 것이다. 2) 르우벤은 요셉을 살리기 위해 형제들을 어떤 말로 설득합니까?(21-22절) “죽이지는 말고, 광야 구덩이에 던지기만 하자.” 장자 르우벤은 형제들의 살인 모의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도 못했다. 요셉을 향한 형제들의 분노를 알았기에 적어도 ‘살인’만은 막으려 했다. 나름의 계획은 요셉을 몰래 구출하여 아버지에게 무사히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르우벤의 정확한 의도를 성경은 밝히지 않으나, 요셉이 사라진 뒤 절규하는 그의 모습은 장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 준다. 동생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아니었을지라도 그의 개입 덕분에 요셉은 생명을 보존한다. 비겁한 인간의 타협안조차 요셉의 생명을 지키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다. 나눔 1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어느 한 사람을 비난하거나, 옳지 않은 방향으로 분위기가 흘러 불편함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그때 르우벤처럼 상황을 조금이라도 바꾸려 노력했거나, 혹은 용기가 부족해 망설인 적이 있다면 솔직하게 나눠 봅시다. 2.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은 아버지까지 기만합니다(25-36절). 1) 결국 형들은 요셉에게 어떤 일을 저지릅니까?(28절) 은 이십에 동생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다.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은 형제들은 태연히 음식을 먹다가 지나가는 상인들을 발견한다. 그들은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이십에 판다. 여기서 은 이십은 화폐가 통용되기 전 시대이므로 무게 단위인 ‘세겔’을 의미한다. 형들은 동생을 은 이십 세겔의 무게만큼 받기 위해 상인들과 흥정하며 저울에 무게를 달았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요셉은 사랑받아야 할 동생이 아닌, 사고팔 수 있는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한다. 누군가를 인격체인 사람이 아니라 이익을 위한 물건으로 취급하는 순간, 그 안에 깃든 하나님의 형상은 처참히 파괴된다. 형제들의 이러한 냉혹한 매매는 요셉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를 이집트라는 더 큰 무대로 이끄는 서막이 된다. 2) 형제들은 요셉의 채색옷에 숫염소의 피를 적시고 아버지에게 보여 줍니다. 야곱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33-35절) 요셉이 짐승에 잡아먹힌 줄 알고, 큰 슬픔으로 오랫동안 통곡하며 주변의 어떤 위로도 거절했다. 요셉의 형제들은 숫염소의 피를 채색옷에 적셔 아버지를 철저히 속인다. 야곱은 피 묻은 옷을 보고 요셉이 악한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고 확신하며 절규한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라는 그의 탄식은 아들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참담한 심경을 잘 보여 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평생 타인을 속이며 살아왔던 야곱이 이제는 자식들에게 철저히 속임을 당하고 있다는 역설이다. 그는 주변의 어떤 위로도 거부한 채 굵은 베를 허리에 묶고 오랫동안 애통해한다. 야곱은 피 묻은 채색옷을 붙들고 오열하며 자신의 지난 삶과 기구한 운명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의 눈물은 아들을 잃은 극심한 슬픔인 동시에, 자신의 속임수가 초래한 비극적인 현실에 대한 처절한 회한과 고통의 증거다. 3) 요셉을 산 상인들은 그를 누구에게 팝니까?(36절)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다. 요셉의 이야기는 상인에게 팔려 간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를 다시 알 수 없는 미궁으로 인도한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자리에서 노예로 추락하여 이집트 정치의 중심부인 친위대장의 집으로 팔려 간다. 현실은 처참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우나 요셉의 삶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장이 시작된 것뿐이다. 우리는 삶에 닥친 급격한 변화의 의미를 당장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감당하기 힘든 순간을 묵묵히 버티며 살아갈 때, 훗날 돌아본 그 시간 속에서 비로소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을 발견하게 된다. 요셉에게 닥친 시련은 결국 거대한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한 신비로운 섭리의 과정이다. 나눔 2 누군가를 시기하거나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결과적으로 가까운 사람(가족, 친구, 교우)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준 적이 있습니까? 혹은 내 안의 질투심 때문에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적이 있습니까? 나눔 3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까?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그 시간이 나를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임을 알게 된 경험을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남들 손에 떠밀려 벼랑 끝에 설지라도 나를 붙잡은 주님 손만 믿고 묵묵히 견디게 하소서. 공동체 _ 욕심과 질투로 깨어진 곳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 되어, 새 창조를 경험하게 하소서. 260503 속회지도자 자료 2026-04-29 신내교회 260503 속회지도자 자료.pdf 5월 첫째 주 그룹큐티나눔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보다 창세기 33:1-20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찬송 272장, 구 330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19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장 발장을 따뜻하게 맞이한 이는 미리엘 신부였습니다. 그러나 장 발장은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붙잡히고 마는데, 신부는 그를 꾸짖는 대신, “왜 은촛대는 가져가지 않았소?”라며 더 귀한 것까지 내주었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만, 어쩌면 하나님은 예기치 못한 용서의 자리, 그 용서를 건네는 이의 따뜻한 얼굴 속에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드디어 야곱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형 에서와 마주합니다(1-11절). 1) 야곱은 형 에서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아갑니까?(3절) 가족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가까이 갔다. 야곱은 에서를 단순한 형이 아니라 자신의 생사권을 가진 ‘왕, 주’로 높여 대우하고 있다. 과거에는 속임수로 축복을 가로챘지만(창 27장), 이제는 진실하게 몸을 굽히며 사죄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야곱이 서 있는 ‘위치’다. 얍복강 씨름 전까지 그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행렬의 맨 뒤에 숨어 있었다. 형의 분노가 확인되면 언제든 도망칠 궁리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3절은 야곱이 모든 무리의 ‘맨 앞’에 서서 형을 맞이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위치 변화는 야곱이 더 이상 ‘속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고 직면하는 ‘이스라엘’로 변화되었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다. 2) 에서는 야곱을 어떤 모습으로 맞이합니까?(4절) 달려가서 야곱을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 맞추고 함께 울었다. 야곱은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수많은 재물을 준비하며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에서는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동생이 보낸 재물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동생을 보자마자 달려와 목을 안으며 진한 그리움을 쏟아 냈다. 이 눈물 섞인 포옹은 지난 세월의 아쉬움과 형제애를 한순간에 회복시키는 놀라운 화해의 장면이다. 야곱은 재물로 형의 마음을 사려 했으나, 에서는 이미 그 모든 응어리를 털어 버린 성숙한 모습으로 동생을 환대했다. 3) 야곱은 에서의 얼굴을 보며 마치 ‘누구’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말합니까?(10절) 하나님의 얼굴 에서는 야곱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그를 이미 용서하고 뜨겁게 환대했다. 이에 감격한 야곱은 형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고백한다. 이 표현은 단순히 형의 비위를 맞추려는 아첨이 아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밤새 씨름하며 대면했던 하나님의 얼굴(브니엘, 창 32:30)을, 이제 자신을 용서하는 형의 얼굴을 통해 다시금 생생하게 경험한다. 야곱에게 있어 하나님의 얼굴은 환상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마주하는 구체적인 실재가 되었다.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용서’라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완성되는지를 보여 준다. 나눔 1 내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뒤로 숨거나 도망치고 싶었던 적이 있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나 특별한 위로(기도, 말씀, 예배 등)를 통해 책임을 다할 용기를 얻은 경험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나눔 2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상황에서, 혹은 나를 비난할 줄 알았던 그 사람에게서 조건 없는 용서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내 두려움과 경직된 마음까지 녹아내리게 한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고 느낀 적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2. 야곱은 세겜으로 가서 하나님을 찾습니다(12-20절). 1) 야곱은 함께 가자는 에서의 청을 어떻게 사양합니까? (13-14절) 연약한 자식들과 가축 때문에 빨리 갈 수 없으니, 형이 앞서 가면 천천히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화해가 곧바로 ‘함께 이동하거나 거주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브라함과 롯이 거처를 나누었던 것처럼, 때로는 깊은 신뢰 관계 안에서도 서로를 위한 적절한 거리두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야곱에게는 돌봐야 할 어린 자녀들과 가축들이 있었다. 반면 에서는 400명의 군사를 거느린 전사이자 빠른 기동력을 가진 지도자였다. 두 사람은 태생부터 기질과 삶의 방식이 전혀 달랐기에(창 25:27), 에서의 호의가 야곱의 연약한 가족들에게는 오히려 감당하기 힘든 속도가 될 수 있다. 야곱은 형의 친절을 정중히 거절함으로써 이제 막 회복된 관계를 불편함 없이 유지하는 동시에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형편을 존중하는 지혜를 발휘한다. 2) 세겜에 당도한 야곱은 장막을 친 땅을 얼마에 구입합니까?(19절) 백 크시타 야곱은 장막 칠 부지를 얻기 위해 양 100마리에 달하는 비용을 지불한 셈이다. 아무리 야곱이 많은 가축을 거느린 거부였다 하더라도, 이는 결코 가벼운 지출이 아니었다. 어쩌면 하몰의 아들들이 이방인인 야곱의 형편을 이용해 시세보다 비싼 값을 불렀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야곱은 이 불리할 수 있는 거래를 피하지 않고 묵묵히 성사시킨다. 이를 통해 야곱은 가나안 땅에서 더 이상 떠도는 나그네가 아니라,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자신의 터전을 확보한 당당한 거주자가 되었다. 과거의 야곱이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속임수를 써서 이득을 취했겠지만, 이제는 타인이 자신을 속이려 할지라도 결코 속임수로 맞서지 않는다. 3) 야곱은 세겜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무엇이라 불렀습니까?(20절) 엘엘로헤이스라엘 벧엘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고(창 28:13), 야곱은 무사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서원했다. 야곱은, 마침내 그 서원을 이행하며 감사의 제단을 쌓았다. 그는 이 제단의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이름하였다. 과거에는 막연히 조상들의 하나님으로만 여겼으나, 이제는 자신의 험난한 삶을 직접 인도하고 지켜 주신 분을 당당히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 제단은 야곱의 신앙이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는 단계에서 벗어나, 직접 경험하고 증명해 낸 살아 있는 신앙으로 성숙했음을 보여 주는 위대한 기념비가 된다. 나눔 3 주변 사람들이나 부모님을 통해 막연하게 알고 있던 하나님의 존재를, ‘정말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구나!’ 하고 뜨겁게 만난 나만의 ‘엘엘로헤이스라엘’ 같은 순간이 있습니까? 이후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하나님의 은혜로 원수인 줄 알았던 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하게 해 주소서. 공동체 _ 서로의 얼굴에서 주님을 닮은 모습을 발견하며, 아픈 마음들이 따뜻한 사랑으로 아물게 하소서. 260426 속회지도자 자료 2026-04-22 신내교회 260426 속회지도자 자료.pdf 4월 넷째 주 그룹큐티나눔 잠 못 이루는 밤에 창세기 28:10-22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찬송 338장, 구 364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장자의 축복을 가로챕니다. 하지만 그 결과 야곱은 형의 미움을 받고 먼 길로 도망해야 했습니다. 야곱은 외로움과 두려움을 안고 거친 들에서 노숙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먼저 다가와 말씀하시고 위로하십니다. 우리가 잠 못 이루는 밤에 하나님은 은혜로 찾아오셔서 평안과 소망을 안겨 주십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도망가던 중에 거친 들에서 노숙합니다(10-15절). 1) 야곱이 꿈에서 본 장면은 무엇입니까?(12절) 사닥다리가 땅 위에서 하늘까지 닿아 있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사닥다리’는 히브리어로 ‘술람’이다. 그런데 이 ‘술람’은 지금의 간이 사다리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높은 곳을 오르도록 쌓은 계단을 의미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계단식 탑(신전 또는 제단)에 나오는 오르막 계단이 대표적인 예다. 야곱의 꿈에 나타난 이 계단이 땅에서 하늘까지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 긴 계단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였다. 그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까지 닿은 지점을 ‘하늘의 문’이라 하였다(17절). 즉 땅에서 하늘까지 사닥다리가 놓였다는 건 하늘과 땅이 ‘하늘의 문’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의미한다. 야곱은 간교하게 형과 아버지를 속이며 쫓기는 신세였지만, 하나님은 땅의 야곱을 보살피고 있었다. 야곱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돌보고 계셨다. 2) 야곱이 꿈에서 들은 말씀은 무엇입니까?(13-15절) “네가 이 땅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며,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리라.”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권한을 간교한 술수로 탈취한 잘못을 범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야곱을 책망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야곱에게 다시 말씀하신다(13:14-15).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이 언약의 말씀을 도망자 야곱에게 하신 것이다. 야곱의 자손이 동서남북으로 퍼져나갈 것이며 모든 족속이 야곱의 자손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야곱이 아직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때, 아니 찾을 기회도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야곱에게 찾아와 은혜의 손을 내민 것이다. 나눔 1 도망자 신세가 되어 두려움에 떨며 노숙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들려주셨습니다. 야곱처럼 외롭게 광야 생활을 해야 했던 적은 언제입니까? 그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위로하고 회복시켜 주셨는지 나눠 봅시다. 2. 야곱이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서원합니다(16-22절). 1) 야곱이 잠에서 깬 후에 비로소 깨달은 사실은 무엇입니까?(16절) 여호와께서 자신이 있는 곳에 계시다는 사실 야곱은 꿈을 꾸면서도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꿈을 꾸고 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게 되었다. 신구약 성경이 완전히 기록되기 이전에 백성들은 꿈과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야곱은 꿈에서 계시의 말씀을 들었으며, 꿈을 깬 후에 그 말씀에 대한 해석을 시도했다(16-17절). 야곱은 말씀 묵상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성경 묵상이다. 성경 묵상은 단지 성경의 팩트만 파악하는 게 아니라 그 말씀의 팩트 속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구체적인 메시지를 찾는 것이다. 야곱은 그간 남을 속이는 삶만 살아오다가 벧엘에서 비로소 말씀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2)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장소를 무엇이라고 명명합니까?(17-19절) ‘벧엘’(하나님의 집) 야곱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곳을 ‘하나님의 집(벧엘)’, ‘하늘의 문’이라 칭했다. ‘하나님의 집’은 이곳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던 자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결코 하늘 위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이 땅에 임재하여 그의 사랑하는 백성과 동행하시는 분이다. ‘하늘의 문’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땅에 있는 백성이 만날 수 있는 만남의 자리를 상징한다. 이곳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진 ‘시은소’(施恩所)다. 사람이 감히 하나님을 만날 자격도 능력도 없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와 말 걸어 주시고 만나 주신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집, 성소다. 3)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한 내용은 무엇입니까?(20-22절) ‘하나님의 도움으로 내가 평안히 돌아온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나는 이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고 주께 십일조를 드릴 것이다.’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로 안전하게 이 땅에 돌아오면, 야곱은 여호와를 진정한 하나님으로 모시며, 이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고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이 약속은 야곱 당대에 다 성취되는 게 아니다. 사실은 구약과 신약 전 역사를 통해 성취된다.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은 구약 시대 성소를 의미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는데 바로 그 자리가 성소다. 그 하늘의 성소가 출애굽 광야에서 성막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광야 성막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발전하고, 예수님은 이 땅에 참 성전으로 성육신하신다(요 1:14). 또한 예수님과 연결된 교회가 바로 성전이다(엡 2:20-22). 요한계시록 3:8과 4:5에 나오는 ‘열린 문’은 지상 성전과 하늘 성전을 연결하는 통로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의 은혜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눔 2 야곱에게 벧엘은 돌베개를 베고 자던 차가운 땅이었지만, 하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이 되었습니다. 일상(일터, 가정, 학교)에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예배하는 ‘나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나눔 3 야곱은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십일조와 헌신을 약속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드린 서원(약속)이 있습니까? 그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지금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낙심될 때, 먼저 다가와 손잡아 주시고 위로하여 주소서. 공동체 _ 하나님께 약속한 서원을 신실하게 지킬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주소서. 260419 속회지도자 자료 2026-04-14 신내교회 260419 속회지도자 자료.pdf 4월 셋째 주 그룹큐티나눔 잠 못 이루는 밤에 창세기 28:10-22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찬송 338장, 구 364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장자의 축복을 가로챕니다. 하지만 그 결과 야곱은 형의 미움을 받고 먼 길로 도망해야 했습니다. 야곱은 외로움과 두려움을 안고 거친 들에서 노숙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먼저 다가와 말씀하시고 위로하십니다. 우리가 잠 못 이루는 밤에 하나님은 은혜로 찾아오셔서 평안과 소망을 안겨 주십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도망가던 중에 거친 들에서 노숙합니다(10-15절). 1) 야곱이 꿈에서 본 장면은 무엇입니까?(12절) 사닥다리가 땅 위에서 하늘까지 닿아 있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사닥다리’는 히브리어로 ‘술람’이다. 그런데 이 ‘술람’은 지금의 간이 사다리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높은 곳을 오르도록 쌓은 계단을 의미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계단식 탑(신전 또는 제단)에 나오는 오르막 계단이 대표적인 예다. 야곱의 꿈에 나타난 이 계단이 땅에서 하늘까지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 긴 계단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였다. 그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까지 닿은 지점을 ‘하늘의 문’이라 하였다(17절). 즉 땅에서 하늘까지 사닥다리가 놓였다는 건 하늘과 땅이 ‘하늘의 문’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의미한다. 야곱은 간교하게 형과 아버지를 속이며 쫓기는 신세였지만, 하나님은 땅의 야곱을 보살피고 있었다. 야곱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돌보고 계셨다. 2) 야곱이 꿈에서 들은 말씀은 무엇입니까?(13-15절) “네가 이 땅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며,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리라.”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권한을 간교한 술수로 탈취한 잘못을 범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야곱을 책망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야곱에게 다시 말씀하신다(13:14-15).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이 언약의 말씀을 도망자 야곱에게 하신 것이다. 야곱의 자손이 동서남북으로 퍼져나갈 것이며 모든 족속이 야곱의 자손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야곱이 아직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때, 아니 찾을 기회도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야곱에게 찾아와 은혜의 손을 내민 것이다. 나눔 1 도망자 신세가 되어 두려움에 떨며 노숙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들려주셨습니다. 야곱처럼 외롭게 광야 생활을 해야 했던 적은 언제입니까? 그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위로하고 회복시켜 주셨는지 나눠 봅시다. 2. 야곱이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서원합니다(16-22절). 1) 야곱이 잠에서 깬 후에 비로소 깨달은 사실은 무엇입니까?(16절) 여호와께서 자신이 있는 곳에 계시다는 사실 야곱은 꿈을 꾸면서도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꿈을 꾸고 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게 되었다. 신구약 성경이 완전히 기록되기 이전에 백성들은 꿈과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야곱은 꿈에서 계시의 말씀을 들었으며, 꿈을 깬 후에 그 말씀에 대한 해석을 시도했다(16-17절). 야곱은 말씀 묵상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성경 묵상이다. 성경 묵상은 단지 성경의 팩트만 파악하는 게 아니라 그 말씀의 팩트 속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구체적인 메시지를 찾는 것이다. 야곱은 그간 남을 속이는 삶만 살아오다가 벧엘에서 비로소 말씀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2)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장소를 무엇이라고 명명합니까?(17-19절) ‘벧엘’(하나님의 집) 야곱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곳을 ‘하나님의 집(벧엘)’, ‘하늘의 문’이라 칭했다. ‘하나님의 집’은 이곳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던 자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결코 하늘 위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이 땅에 임재하여 그의 사랑하는 백성과 동행하시는 분이다. ‘하늘의 문’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땅에 있는 백성이 만날 수 있는 만남의 자리를 상징한다. 이곳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진 ‘시은소’(施恩所)다. 사람이 감히 하나님을 만날 자격도 능력도 없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와 말 걸어 주시고 만나 주신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집, 성소다. 3)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한 내용은 무엇입니까?(20-22절) ‘하나님의 도움으로 내가 평안히 돌아온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나는 이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고 주께 십일조를 드릴 것이다.’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로 안전하게 이 땅에 돌아오면, 야곱은 여호와를 진정한 하나님으로 모시며, 이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고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이 약속은 야곱 당대에 다 성취되는 게 아니다. 사실은 구약과 신약 전 역사를 통해 성취된다.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은 구약 시대 성소를 의미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는데 바로 그 자리가 성소다. 그 하늘의 성소가 출애굽 광야에서 성막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광야 성막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발전하고, 예수님은 이 땅에 참 성전으로 성육신하신다(요 1:14). 또한 예수님과 연결된 교회가 바로 성전이다(엡 2:20-22). 요한계시록 3:8과 4:5에 나오는 ‘열린 문’은 지상 성전과 하늘 성전을 연결하는 통로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의 은혜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눔 2 야곱에게 벧엘은 돌베개를 베고 자던 차가운 땅이었지만, 하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이 되었습니다. 일상(일터, 가정, 학교)에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예배하는 ‘나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나눔 3 야곱은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십일조와 헌신을 약속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드린 서원(약속)이 있습니까? 그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지금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낙심될 때, 먼저 다가와 손잡아 주시고 위로하여 주소서. 공동체 _ 하나님께 약속한 서원을 신실하게 지킬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주소서. 260412 속회지도자 자료 2026-04-08 신내교회 260412 속회지도자 자료.pdf 4월 둘째 주 그룹큐티나눔 미리 준비하는 아버지 창세기 22:1-18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복의 근원 강림하사(찬송 28장, 구 28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부르십니다. 그 시험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언약의 씨’인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받으시고 친히 번제로 쓸 양을 따로 준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친히 자기 아들을 준비하셨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아브라함은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을 받았지만, 아침 일찍 길을 떠납니다(1-8절). 1)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1-2절)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부르셨다. 시험의 내용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다. 야고보서 1:13에 의하면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 그렇다면 야고보서 1:13과 창세기 22:1은 서로 모순되는 말씀인가? 아니다.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시험은 ‘유혹’(temptation)을 의미한다. ‘유혹’은 어떤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함정을 파고 유인하는 거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죽음의 길로 이끌기 위해 미혹하지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순종)하는지는 시험(Test)하신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백 세에 낳은 약속의 씨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차마 순종하기 어려운 시험 문제를 하나님께 받았다. 2)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가던 이삭이 이상하게 여겨 질문한 것은 무엇입니까?(6-7절) “번제를 위한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번제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제물인데 정작 양은 없고 장작과 불만 있는 게 이삭이 보기에 몹시 이상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질문한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예루살렘)까지 거리는 약 100km 정도다. 3일 정도 쉼 없이 걸어야 하는 거리다. 이삭은 당시 십대를 넘어 청년의 나이였을 것이다. 고대 맏아들을 인신 제사로 드리는 풍습이 만연해 있었기에 이삭은 혹시 자기가 제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청년 이삭은 3일 동안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아버지의 길을 따랐다. 3) 아들 이삭의 질문에 아버지 아브라함은 어떻게 대답합니까?(8절)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이삭의 질문에 아브라함은 번제로 드릴 어린양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거라고 에둘러 말한다. 사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드는 순간까지도 숫양을 따로 준비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몰랐다. 이런 차원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한 답변은 다소 궁색한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 상황을 단지 모면하려고 임기응변으로 말한 게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몸부림친 것이다.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내놓을 수 있다는 믿음을 표한 것이다. 나눔 1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시험은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를 불러 맡기신 시험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시험대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나눠 봅시다. 2. 하나님이 번제물을 친히 준비하십니다(9-18절). 1) 아브라함이 이삭을 칼로 찌르려 할 때 하늘에서 어떤 음성이 들려왔습니까?(9-12절) “네 아들에게 손대지 말라. 네가 독자를 아낌없이 바치려 하였으니,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이제 내가 알겠다.” 이삭은 청년이고 아브라함은 노년의 할아버지였기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완력으로 제압해서 결박할 수는 없었다. 이삭이 순순히 받아들였기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고 칼을 들어 잡으려 하였다. 여기서 ‘잡다’라는 히브리어 ‘샤하트’는 ‘도살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이삭을 도살하려 했던 거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린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 네가 독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진짜 원하신 건 인신 제사가 아니라 헌신의 믿음이었다. 2) 결국 아브라함은 어떤 제물로 번제를 드립니까?(13-14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신 숫양으로 번제를 드렸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숫양을 준비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일관되게 인신 제사를 가증스럽게 여기신다(신 12:31; 레 18:21; 20:2-5; 렘 7:31; 19:5; 미 6:7; 왕하 16:3).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사람을 제물로 바치게 한 적이 없다. 아브라함에게는 그의 아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정작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어 모든 인류를 위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셨다. 인류 구원을 위한 궁극적인 희생 제물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것이다. 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거듭 말씀하신 언약의 복은 무엇입니까?(15-18절) “네가 나의 말에 순종했으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네 자손으로 인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의 씨를 통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게 하는 것이다. 즉 이삭이 언약의 씨가 될 것이며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이스라엘 나라를 만드실 것이다. 바울은 이 사건을 그리스도 예수에게 적용한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씨’(자손)는 여럿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오직 한 사람을 가리키는 데 바로 그분이 ‘그리스도 예수’라는 거다(갈 3:1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 복이 예수를 통해 온전히 성취된 것이다. 예수를 믿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나눔 2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만 받으시고 번제물은 친히 준비하셨습니다. 이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것에 대한 예표이기도 합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해 주신 은혜를 경험한 적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나눔 3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며, 네 자손들로 인해 세상 모든 사람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은 무엇입니까? 가정과 공동체에 하나님이 주신 복을 헤아리며 나눠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이성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 말씀일지라도 믿음으로 순종하게 하소서. 공동체 _ 교회가 ‘복의 통로’가 되어 세상에 생명의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260405 속회지도자 자료 2026-04-01 신내교회 260405 속회지도자 자료.pdf 4월 첫째 주 그룹큐티나눔 안식 후 첫날 제자들이 찾는 것 요한복음 20:1-18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예수 부활했으니(찬송 164장, 구 154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제자들이 안식 후 첫날 아침부터 찾고 있는 것은 부활의 주님이 아니라 차가운 주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부활하셨지만, 제자들은 빈 무덤 앞에서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을까?’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넋이 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죽음의 절망에 빠진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안식 후 첫날, 제자들은 ‘빈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습니다(1-10절). 1)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이 빈 것을 알고 어떻게 행동합니까?(1-2절) 제자들에게 가서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보고하면서,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간 것 같다고 말했다. 안식 후 첫날 예수의 무덤에 간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마리아가 ‘시몬 베드로’와 ‘사도 요한’(‘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빈 무덤 사실을 보고할 때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무덤에 간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와 더불어 여러 여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공관복음에서는 모두 막달라 마리아를 포함한 다른 여인들이 함께했음을 보고한다(마 28:1; 막 16:2; 눅 24:1, 10). 즉 예수의 빈 무덤을 목격한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었다. 여인들에게 아직 예수 부활에 대한 의식은 없었지만, 그들이 분명하게 보고 증언하는 바는 바로 ‘빈 무덤’이다. 2) 마리아의 말을 듣고 무덤에 간 제자들이 재차 확인한 것은 무엇입니까?(3-7절)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 베드로와 ‘다른 제자’(사도 요한)가 여인들의 말을 듣고 즉각 예수의 무덤으로 달려갔다. 사도 요한이 베드로보다 젊었기에 좀 더 빨리 뛰어 무덤에 도착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무덤 밖에서 안을 확인할 뿐 무덤 안으로는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드로는 주저하지 않고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은 없었고,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더 특이한 점은 예수의 얼굴을 감쌌던 수건(수다리온)이 시신 머리 부분에 따로 가지런히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예수의 몸을 쌌던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이 그대로 있는 채 예수님의 몸만 빠져나간 것을 보여 준다. 3) 제자들이 ‘빈 무덤’을 보고도 깨닫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9절)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리라는 성경 말씀 베드로와 사도 요한 모두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고 예언한 구약의 말씀은 깨닫지 못했다(참조. 시 16:10; 호 6:2).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가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초대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후다(요 2:22; 눅 24:45-46). 빈 무덤은 부활의 분명한 증거이긴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제로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제자들과 만나 인격적으로 말씀을 나누며 자신을 보여 주는 일이 남아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직접 심방하신다(요 20:19). 나눔 1 ‘빈 무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명확한 증거임에도 제자들은 그 빈 무덤에서 다시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려 했습니다. 혹시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전히 무덤에서 찾으려는 건 아닙니까? 여전히 ‘죽음의 굴레’에 갇힌 채 낙망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서로 나눠 봅시다. 2.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11-18절). 1) ‘빈 무덤’을 보며 마리아가 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13절) 예수님의 시신이 도둑맞았다는 생각에 탄식했다. 마리아는 여전히 ‘빈 무덤’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예수님의 시신 ‘절도’로만 이해하려 한다. ‘빈 무덤’이 ‘예수의 부활’의 증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믿음이 아직 부족했던 거다. 여인은 단지 눈에 보이는 현상만 볼 뿐, ‘빈 무덤’의 의미를 예수님의 생전 말씀과 연결하지 못하고 있다(참조. 마 16:21; 17:22-23; 20:17-19). 빈 무덤은 예수 부활의 명확한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믿음이 부족하여 예수 시신을 지키지 못한 것만 자책하며 탄식하고 있다. 2)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인 줄 모르고 부탁한 것은 무엇입니까?(14-15절) “예수님의 시신을 혹시 당신이 옮겼다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십시오.” 끝까지 여인이 관심을 두는 건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다. 심지어 살아계신 예수님께 ‘예수의 시신’을 어디에 두었는지 알려 달라고 요청한다. 기막힌 역설이다. 여인이 이렇게 하는 건 예수에 대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여인이 지극히 예수를 사랑하며 따랐기에 예수의 죽음에 예를 표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온전한 믿음은 예수의 죽음에 예를 표하는 게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3) 마리아는 방금 대화한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떻게 행동합니까?(16-18절) 즉시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렸다. 예수님은 자기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여전히 예수의 시신을 찾는 마리아의 우둔함을 책망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따뜻하게 ‘마리아야’라고 이름을 불러 주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 부활의 모습을 마리아에게 보여 주시고 이 사실(예수 부활)을 형제들(제자들)에게 가서 증언하라고 말씀하신다. 마리아는 이 예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며 제자들에게 가서 ‘살아나신 주님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신앙생활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을 증언하는 삶이다. 나눔 2 마리아는 무덤만 바라보며 주님의 부재를 한탄하다가, 부활하셔서 자기 등 뒤에 계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삶에서 ‘정말 주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하고 강렬한 주님의 임재를 느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나눔 3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달려가 “내가 주를 보았다”고 외친 것처럼, 내가 이 기쁜 부활의 소식을 전해 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지 구체적인 실천 한 가지를 정해 봅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무덤(죽음, 삶의 문제)에서 시선을 돌려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소서. 공동체 _ 교회가 부활의 증인이 되어 생명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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